이번에 사감위에서 내놓은 종합발전계획안의 핵심은 도박 중독 유병률을 줄이는 것이며 실제로 총량제 설정의 보정 기준으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감위 계획안에서 도박 중독 유병률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한 측정 도구는 CPGI인데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 한국판 CPGI는 너무나 문제가 많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 표준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2001년에 Ferris & Wynne이 캐나다에서 CPGI를 개발할 당시 자국의 사회적, 문화적, 정서와 배경이 반영되도록 심혈을 기울여 무려 3년에 걸친 연구 기간과 엄밀한 타당화 과정을 거쳤습니다. 특히 이들은 다른 언어 사용 국가에서 CPGI를 사용할 경우에는 자국에서 개발하는 정도의 과정을 거치도록 엄중히 권고하고 있는데
국내의 CPGI는 이런 표준화 과정을 제대로 거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사감위의 일각에서는 표준화 과정을 거쳤다고 주장하지만 2006년 문광연 연구에 대한 문제 제기 이후 2008년 2월에 관련 기관에 검토를 요청한 CPGI 번역문을 보면 '번안'이 아닌 단순 '번역'에 그치고 있으며 그마저도 적절한 '번역-역번역', '동등성 검증', '번역자 전문성 검증' 등의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고 생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2006년 연구에서 내적 일관성 신뢰도만 산출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고 이를 수정했다고는 하나 교차 타당화를 비롯해 제대로 된 신뢰도, 타당도를 산출하지 않았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사감위에서 이 부분에 대해 떳떳하다면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검증을 받으면 됩니다.
둘째, 척도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CPGI를 제외한 국내 도박 중독 진단 척도는 모두 '그렇다/아니다'의 이분 척도(dichotomous scal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K-NODS, K-MAGS의 경우에는 모두 10 가지 진단 기준 중 5 가지 이상에서 '그렇다'고 대답해야 병적 도박자로 진단되는 데 비해 CPGI는 '간혹 그렇다'라는 애매한 범주에 1점이 부여되고 '대체로 그렇다'에 2점이 부여되므로 9문항 중 단 3문항에만 '간혹 그렇다'로 응답하면 이미 기준인 3점이 넘어 '중위험 도박자'로 분류되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즉 CPGI를 사용할 경우 이미 유병률이 과다 추정되는 것으로 알려진 SOGS와 마찬가지로
유병률 과다 추정의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사감위 계획안에서는 CPGI가 이분 척도가 아닌 4점 Likert 척도이기때문에 타당성이 높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얼마나 근거가 취약한 지는 기존 국내 연구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K-NODS, K-MAGS의 경우 도박 중독 유병률이 2~5%로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비해 CPGI는 최근 연구만 봐도 1.6%(2006)에서 9.5%(2008)에 이르기까지 6배까지 차이가 나고 있어
안정성이 매우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적용 대상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 CPGI는 개발할 당시 DSM-IV의 병리적 기준을 일반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 의해 대안적인 도구로 개발된 것으로, 진단보다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예방정책의 수립 및 시행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한 목적이 강하므로
일반인을 대상으로만 사용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감위 계획안에는 총량제 설정의 보정 기준으로 사행산업 별 이용자의 문제성 도박 비율을 추정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게 사용하면 안 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사행산업 별 문제성 도박자의 비율을 산출해 정책에 반영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또한 그 수치를 유병률이라고 명명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룸살롱만 대상으로 조사해서 산출한 알코올 중독자의 비율을 알코올 중독 유병률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넷째, 사용 범위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번 계획안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도박 중독 유병률은 2008년 문화관광정책연구원에서 내놓은 9.5%인데 이는 '문제성 도박자'와 '중위험 도박자'의 비율을 합산한 수치입니다.
CPGI를 사용한 세계 어느 유병률 조사를 보아도 '문제성 도박자'와 '중위험 도박자'의 비율을 합산한 수치를 사용한 연구가 없습니다. CPGI 8점 이상인 문제성 도박자의 유병률만 대표적인 수치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진국의 선례를 따르자면 9.5%가 아니라 2.3%라고 해야 합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측정 도구에 의해 측정된 유병률에 비해 오히려 낮은 수준입니다. 사실 이것도 CPGI 문제성 도박자 범주와 다른 진단 도구의 병적 도박자 범주가 개념 상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CPGI의 문제성 도박자 범주를 유병률 추정에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개발된 다른 측정 도구와 달리 CPGI는 '내성'과 '추격매수'를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기존의 다른 진단도구들과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문제가 많은 한국판 CPGI는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일하는 기관에서도 도박 중독 평가 도구로 K-MAGS, K-NODS를 사용하고 참고 삼아 SOGS를 사용하지만 CPGI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문제가 많은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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