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샤 검사는 심리평가가 주 무기인 임상 전공자에게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내담자를 만나는 상담자에게도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입니다.
미국에서는 이제 별로 안 쳐주는 검사인 것 같지만 그건 미국이 기본적으로 정신역동적 접근을 배타하는 문화인데다 계량화, 구조화된 검사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서 그렇지, 로샤 검사가 그만큼 무시해도 되는 듣보잡 검사여서가 아닙니다.
구조화된 요약에만 목숨을 걸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상담을 하면서 로샤의 질적 해석을 해 보면 왜 로샤가 이런 불완전한 해석 체계를 갖고도 지금까지 당당히 살아남은 검사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임상 수련을 받는 사람은 어차피 피할 수도 없거니와 기존의 수련 체계에서 로샤를 공부할 기회가 충분히 많이 있으나 상담자는 스스로 공부 의지를 불태우지 않으면 로샤를 공부할 기회 자체가 별로 없거니와 설사 마음을 굳게 먹었다손쳐도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죠.
그래서 상담자의 입장에서 로샤 공부를 하는 방법을 단계적으로 추천드려보겠습니다.
1. Exner의 종합체계 워크북 구입
: 로샤 관련 책들은 번역서로도 많이 나와 있지만 이 책은 어차피 읽어야 할 필독서인데다 다른 책만 봐서는 제대로 로샤를 익힐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책을 독파하는 게 낫습니다. 괜히 쉬운 길 가겠다고 주해서 같은 책으로 공부해 봤자 어차피 이 책을 다시 봐야 합니다. 그러니 정석으로 가세요.
이 때, 로샤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로샤 검사에 오염되기 전에 전문가에게 로샤 검사를 받아보는 겁니다. 이 자료는 나중에 채점 연습을 하기 위해서 잘 챙겨둬야 합니다. 관련글(
'심리학도는 오염되기 전에 심리평가를 받을 것')
2. 종합체계 워크북 정독
: 이 단계 공부 패턴에 따라 다른데 혼자서 일독하는 것도 괜찮고 팀 플레이에 강한 분들은 스터디 팀을 짜서 강독을 해도 됩니다.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겁니다. 스터디를 할 때는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부분도 자신이 발표하는 부분처럼 철저히 읽고 연습해야 합니다.
워크북을 읽을 때 중요한 건 실제 원자료를 채점해 보는 경험을 갖는 것입니다. 이 때 미리 받아놓은 자신의 로샤 원자료를 활용합니다. 스터디를 한다면 팀원들의 원자료를 돌려가면서 채점하고 토론하면 다양한 원자료를 채점할 수도 있고 자신의 채점 오류에 대해 깨닫게 되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3. 로샤 워크샵 듣기
: 임상 전공이라면 수련 과정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로샤 채점과 해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워크샵까지 굳이 들을 필요가 없지만 상담 전공자라면 종합체계 워크북을 정독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로샤가 워낙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핵심을 요약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훑어주는 워크샵을 한번쯤은 듣는 것이 좋습니다. 가끔 워크샵을 먼저 듣고 종합체계 워크북을 나중에 보면 안 되냐고 묻는 분이 계신데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로샤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워크샵을 들어봤자 흰 것은 프로젝터 바탕 화면이요, 빨간 것은 레이저 포인터일 뿐입니다.
힘들더라도 책을 먼저 보시고 그 다음에 워크샵을 듣는 것이 시간 대비, 비용 대비 효율성이 훨씬 높습니다.
4. 로샤 실시 및 채점, 구조적 요약의 반복 연습
: 종합체계 워크북도 공부했고 관련 워크샵도 들었다면 머릿속에 들어간 지식이 망각되기 전에 자꾸 리허설해서 장기기억으로 넘겨줘야 합니다. 임상 전공자는 수련 과정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로샤를 실시, 채점, 해석하는 연습을 하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상담 전공자는 상담하느라 로샤를 실시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능한 한 많은 로샤 실시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로샤 검사가 불필요한 내담자에게 실시하는 게 윤리적으로 부담스러우면 주변 지인이라도 마루타로 삼아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최소한 워크샵을 들은 지 1년 이내에 50개 이상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채점해야 합니다.
정 사례가 없으면 종합체계 워크북에 실린 300개 예제라도 반복해서 채점하고 채점이 틀린 예제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따로 모아서 공부하세요.
로샤를 채점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최소한 10 사례 정도는 채점 프로그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손으로 구조적 요약을 해 보라는 겁니다. 이건 통계 방법론을 익힐 때 변량분석을 손으로 직접 계산해서 해 보는 것과 유사한데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지표들이 계산되는지 손으로 계산하면서 익혀놔야 나중에 지표 해석 이해가 쉽습니다. 복잡하다고 채점 프로그램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아무리 단계별 해석 방법을 공부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가끔은 무식한 방법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조언드리면, 가끔
로샤 채점 체계의 불완전성을 강변하면서 구조적 요약 없이 질적 해석만 공부하면 안 되냐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렇게는 안 됩니다. 질적 해석의 풍부함은 구조적 요약의 바탕 하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구조적 요약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질적 해석을 아무리 열심히 파 봐야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령 부리지 말고 구조적 요약을 돌파한 뒤 질적 해석으로 넘어가시는 게 낫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4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