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과 상담의 직능이 다르다고는 해도 이미 간극이 많이 좁혀졌고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기 때문에 상담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가들도 심리평가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임상심리학자에게 심리평가를 아웃소싱하는 상담자들은 점점 일하기 힘들어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담자도 심리평가를 잘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심리검사의 실시, 심리평가보고서 작성, 해석 상담을 모두 하겠다는 자세부터 확립해야 합니다.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한 후 해석 상담까지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다음에 심리평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험치를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임상이 상담보다 심리평가를 잘 하는 이유는 별 거 없습니다. 수련 기간 동안에 미친듯이 심리검사(수련 과정 중에 해석 상담까지 하는 임상심리 수련 레지던트는 거의 없을테니 제 기준으로 임상도 제대로 된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심리검사만 미친듯이 하고 있을 뿐이죠)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상담자가 상담이 어렵다고 느끼는 건 일의 특성 상 심리평가처럼 상담 사례를 급격하게 늘릴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니 심리평가를 잘 하고 싶으면 무조건 심리평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상담심리학회 수련을 받고 있다면 저는 제가 수련받고 있는 기관의 모든 심리평가를 담당하겠다고 자청할 겁니다.
제가 보통 심리평가의 감을 잡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례 수가 최소 1,000 케이스 정도인데 일 년에 100케이스씩 소화해도 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담자 중 1년에 100케이스의 심리평가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나요? 아마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을 겁니다. 그러니까 직접 경험이 적으면 그만큼 간접 경험이라도 늘려야 합니다. 모든 사례 회의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거죠. 제가 진행하는 group supervision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아시겠지만 저는 당일에 참석하지 않거나 시간에 늦는 것에 대해 아무런 penalty를 부여하지 않고 뭐라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본인 손해니까요. supervision 자체가 당일 무산되지 않는 이상 저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도 꼬박꼬박 한 달에 최소 160개에서 최대 200여 개의 새로운 심리평가 데이터를 제 머릿 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는 중이니까요.
자, 그러면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일반적인 상담자가 저처럼 사례 수를 늘릴 수는 없을테니 열악한 상담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편법 두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 심리검사의 실시 순서와 해석 순서를 일치시킬 것
우리가 개인 PT를 받으러 가면 인바디 측정을 한 뒤 트레이너가 최적의 운동 순서를 가르쳐 줄 겁니다. 나중에 자유 운동을 할 때도 그 순서를 따를 거구요. 왜냐하면 그게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 운동 순서니까요. 마찬가지로 심리검사 실시 순서를 정하고 그 순서대로 해석하면 시간도 단축되거니와 일종의 흐름이 생기면서 나름의 해석 노하우가 생기게 됩니다. 자기보고형 검사지를 주로 사용하는 상담 장면의 특성 상 수검자에게 특정 순서대로 작성하라고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자신만의 해석 순서는 정할 수 있겠죠.
종합심리평가를 기준으로 제가 수검자에게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해석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TCI/JTCI -> MMPI-2/A -> SCT -> BGT -> 지능 검사 -> 그림 검사(KFD 포함) -> 로르샤하(TAT, CAT 포함)
저는 항상 이 순서대로 심리검사를 실시하고 이 순서대로 해석합니다. 이 순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의 조합으로 정한겁니다.
* 구조화된 검사(객관적 검사) -> 비구조화된 검사(투사 검사)
* 자기보고형 검사 -> 대면 검사
* 의식 수준의 검사 -> 무의식 수준의 검사
* general한 검사 -> special한 검사
깔대기 모양으로 밖에서 안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수검자의 응답지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 결과지를 해석합니다.
2. 수검자의 개인 정보를 가능한 한 보지 말고 심리검사 결과를 해석하는 연습을 할 것
이건 전통적인 심리검사 결과 해석 방법과 배치됩니다. 대부분의 심리검사 해석법에서는 수검자의 개인 정보와 맥락을 고려하여 해석할 것을 제안하니까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이건 사례 수가 많은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일종의 정석이고요. 심리평가 사례 수가 태부족인 상담자들은 배경 정보 없이 해석하는 blinded interpretation이 더 효과적으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훨씬 더 난해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고비만 넘어서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어납니다. 이것도 제가 상담으로 넘어오면서 실제 효과를 본 방법이에요. 대형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임상심리전문가가 되었지만 상담으로 넘어오니 제가 그동안 익혔던 케이스에 대한 노하우가 거의 쓸모가 없더군요. 대상군이 완전히 다르니까요. 조현병, 분열정동장애, 양극성 장애 환자가 아닌 도박 중독, 애착 외상에 의한 Delayed PTSD, 성격 장애 등을, 그것도 변별 진단이 아닌 치료적 개입을 위한 formulation을 새로 해야 했으니까요. 상담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심리평가의 틀을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blinded interpretation입니다.
물론 2만 사례 이상 쌓인 지금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몰아부치지는 않지만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여전히supervision을 할 때는 지금도 개인 정보를 가능한 한 보지 않고 검사 결과만으로 formulation을 하고 그 다음에 배경 정보와 맞춰보는 역순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외부로 group supervision을 나가도 일반 상담 수퍼비전과 달리 미리 자료를 받지 않고 현장에서 즉문즉답을 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고요.
조금 무식해보이는 방법이지만 짧은 시간 내에 실력을 급격하게 올리는데는 확실히 효과적이니 한번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해 보자면, 심리평가 실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제 노하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심리검사 결과를 보는 routine을 정해서 속도를 높일 것
2. 개인 정보를 최대한 보지 않고 검사 결과만으로 formulation하는 blinded interpretation 연습을 할 것
모든 분에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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