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담을 받으러 방문하는 내담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는 거의 대부분 둘 중 하나이기 마련입니다. 대인 관계 갈등이나 어려움이 하나의 영역이고 우울, 불안, 강박 등의 증상이 다른 하나의 영역입니다. 증상을 호소하는 내담자라 해도 그 증상의 원인이나 증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탐색하면 항상 대인 관계 문제가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상담자들은 보통 내담자의 문제 또는 그 원인이 대인 관계의 어려움에 있다고 가정하고 들어갑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프로이트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두 가지 삶의 영역이 '일'과 '대인 관계'라고요.
그런데 왜 임상가들은 대인 관계의 어려움만 탐색하는 걸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대인 관계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이 대인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일이 대인 관계만큼 중요한 삶의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그만큼 제대로 탐색되지 않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죠.
학교 부적응 문제로 Wee class나 상담복지센터를 방문하는 아동/청소년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사례를 supervision하면서 성적이나 학업 성취도를 물어보면 그걸 제대로 확인하는 상담자가 거의 없더군요. 확인을 했다고 해도 내담자나 부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꼼꼼히 확인해보면 학교 부적응 문제의 원인이 학업 성취도가 낮아서일 때가 많습니다.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니 학업을 따라갈 수 없고 그래서 흥미도 떨어지고 동기도 저하되어 학교를 가고 싶어하지 않는 겁니다. 당연히 이런 아동/청소년은 또래 관계도 좋지 않습니다. 또래 관계라도 좋다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 즐거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는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친구와 만나서 놀 수 있는 건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의 짧은 시간 뿐입니다. 긴 수업 시간은 혼자 버텨야 합니다. 그러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기 어렵습니다. 학교 부적응 문제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아동/청소년 중에 반에서 1등을 하거나 전교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나요? 저는 1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죠.
조직 부적응 문제로 EAP 상담을 받으러 온 직장인이 있습니다. 동료나 상사와 관계가 좋지 않다거나 불합리한 조치 때문에 피해를 당하거나 해서 회사를 다니기 힘들다고 호소합니다. 물론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보고 하지만 그 이유가 대인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직장인 중에서 본인이 스스로 선택해서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고 일이 너무나 재미있으며 일의 성과를 인정받아서 승승장구하다가 재수없게 이상한 상사를 만나서 다 때려치고 싶을만큼 힘들어져 온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요? 역시 저는 그런 사례가 1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교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아동/청소년이나 회사에서 능력으로 촉망받는 직장인은 왜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을까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상당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버틸 힘이 있습니다. 그동안 받아왔던 사회적 지지와 인정으로 인해 자존감과 자아 강도가 높은 수준이라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우리나라는 과제 지향적인(task-oriented) 문화보다는 관계 지향적인(relationship-oriented) 문화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굉장히 과제 지향적인 문화에 속하는데 이를 관계 지향적이라고 포장한 것 뿐입니다. 관계 지향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합니다. 조직이나 집단에서 튈 때,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래서 따돌리거나 배척할 때에만 관계 지향성이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는 별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동북아 3국인 일본, 중국, 우리나라가 특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러므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대인 관계 스트레스 때문에 내담자가 힘들어 하는 게 맞다고 해도 일 영역의 문제를 좀 더 꼼꼼히 탐색해야 합니다.
친구가 자신을 따돌려서 힘들다고 온 청소년은 사실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를 다니는 게 힘든데 교우 관계까지 소원해져서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기에 상담을 받으러 왔을 수 있고 직장 상사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화가 나서 온 직장인은 사실 회사에서 무능력자로 낙인 찍혀서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불안감에 상담을 받으러 왔을 수 있습니다.
특히 대인 관계는 최소한 2자 관계 이상으로 연결된 복잡한 문제입니다. 내담자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담자와 연결된 환경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 환경은 통제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설사 통제 가능한 수준이라고 해도 바뀌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일은 오로지 내담자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빠른 변화가 가능합니다.
지적 제한으로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청소년이라면 표준화된 지능 검사 결과에 따라 자신의 능력과 흥미에 맞는 자신의 목표를 다시 설정할 수 있고 원치 않는 영역에서 일하면서 직무 동기가 떨어진 직장인이라면 진로 적성 코칭을 통해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새로운 일을 찾게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대인 관계' 영역을 탐색하기 전에 '일' 영역을 먼저 탐색합니다. 제 경험 상 '일' 영역의 문제는 항상 '대인 관계'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일' 문제가 빨리 해결될수록 '대인 관계' 문제도 쉽게 해결되곤 했습니다.
대인 관계 영역에 집중해서 상담을 진행하지만 진척이 잘 되지 않고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 상담자라면 한번쯤 '혹시 내가 일 문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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