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supervision을 하면서 정규 수련 과정 중이거나 이를 완료한 전문가들인데도 자신의 역량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상담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지금도 놀라곤 합니다.
저는 가장 큰 원인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강압적인 수련 과정에 있다고 보는데 정작 자신은 노하우도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그저 박사, 교수, 자격번호 앞 순위 선배라는 타이틀 하나만 갖고 supervisee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알량한 자존감을 유지하는 supervisor가 너무 많습니다. 임상, 상담 따질 것도 없습니다. 다 똑같아요.
상담의 경우는 회기 제한의 단기 상담으로 시스템이 고착화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심화와 함께 예산 배정을 건수 실적 중심으로 하다보니 생기는 고질적인 문제인데 이로 인해 내담자가 완전하게 치유되는 걸 경험한 상담자의 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수련 과정 내지는 초심 전문가 시기에 자신의 주력 분야 선정을 위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것과 함께 가능한 한 최기 제한이 없는 세팅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하겠습니다. 급여가 줄어드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강압적인 수련 과정, 단기 상담 중심의 환경 등은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것이니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임상 전공자여서 제대로 된 상담 수련 과정을 밟은 적이 없지만 반대로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상담을 시작해서 앞서 언급한 강압적인 상담 수련 과정의 악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고(꼰대갑질을 당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 상담에 대해 사실 상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편견 없이 다양한 상담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좋았으며 운 좋게도 회기 제한이 없는 공익 기관(?)에서 자율적으로 근무하면서 중독, 아동/청소년, 부부, EAP 등 다양한 상담을 원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상담자로서 밟아온 단계를 말씀드리면 제대로 된 수련 과정을 거친 선생님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1단계 : 조기 종결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
회기 제한이 있든 없든 대부분의 초심 상담자들은 상담을 구조화하는 것도, 초기 라포를 형성하는 것도 서투릅니다. 하다 못해 내담자가 상담을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마음을 읽어주는 것도, 카리스마있게 보이는 것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 3년 간 제 목표 중 하나가 10회기 이상을 유지하는 비율을 50%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2단계 : 성공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
2단계부터 단기 상담 세팅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상담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내담자에게 치유 경험이 나타나는 걸 상담자가 확인하면서 세밀하게 조율을 하려면 장기 상담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담자의 치유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치료적 기법을 경험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메우려고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이 2단계입니다. 2단계 중반이 되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서 상담이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자신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상담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5년차에서 10년차 기간이 그랬습니다.
3단계 : 자신이 어떤 상담자인지 알게 되고 자신에게 맞는 세팅을 완성하는 단계
3단계부터는 스스로 초심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누가 봐도 초심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진 내담자를 만나든 별로 두렵지 않게 되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꽤 많은 성공 경험이 쌓였기 때문에 상담이 치유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없는 상태이고 내담자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상담자인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구로 확장됩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치료 기법이나 접근법을 확립하게 되고 때로는 여러가지 기법을 혼용해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이 약한지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고 다른 전문가와 협업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11년차에서 15년차 기간이 3단계였습니다.
4단계 :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정리하는 단계
3단계를 성공적으로 지나왔다면 상담자로서의 강,약점 분석과 노하우 등을 잘 정리한 것에 더하여 자신이 상담자, 분석가, 평가자, 교수, 강연자, 작가, 프로그램 시행자, supervisor 중 어느 세부 직역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알게 됩니다. 3단계가 끝나가는 기간에 저는 제가 내담자를 직접 만나는 상담자나 치료자보다는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전문가에게 알려주는 supervisor, 강연자 역할을 더 좋아하고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기관에 사표를 던지고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Season 2를 시작합니다').
모든 상담자가 저와 똑같은 길을 거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참고하여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대략이라도 점검해 보시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포스팅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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