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내에서 보니데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젊은 처자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 이야기, 친구 이야기, 남자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등 그 또래 아가씨들의 대화로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정작 제 귀를 잡아끈 것은 그 중 한 처자가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 등장시킨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러게 내가 B형 남자는 사귀지 말라고 그랬잖아", "원래 AB형 상사와 O형 부하직원은 잘 안 맞는단 말야" 등등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화에 혈액형이 등장하고 모든 사건의 원인을 혈액형으로 귀결시키더군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혈액형론을 믿고 있지만 이런 골수 신봉자는 처음 보았기 때문에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혈액형론이 대체 무엇입니까?
20세기 초에 나치가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하던 우생학과 그 뿌리를 같이하던 것으로 독일에 유학하던 일본의 의사 키타마 하라에 의해 일본으로 유입된 이론입니다. 1927년 8월 일본의 심리학자인 후루카와가 자신의 동료, 친척, 학생 등 319명을 조사해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라는 논문을 일본심리학회지에 발표하였는데 이 비과학적이고 부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문에 의해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설이 시작되었지요. 당시 이 논문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는데 이 논문이 제시한 분류법에 심취했던 일본의 작가 노오미가 1971년에 쓴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이 대유행을 불러오면서 여성지 등을 중심으로 궁합, 대인관계, 학습법, 운세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어 일파만파로 확산되었고 우리나라에 유입된 이후로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려 지금까지도 혈액형과 성격이 연관되어 있다는 미신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 "B형 남자"라는 가요가 유행하였고 모 금융 기관에서는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기준으로 특정 혈액형을 명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혈액형론과 성격은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혈액형과 성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혈액형 인간학은 ABO식 혈액형 분류법에 의해 인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혈액형을 분류하는 방법은 ABO식 말고도 수백 가지에 이르며 우리는 이미 Rh식이라는 분류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ABO식 분류법이 혈액형 인간학에 사용되는 이유는 ABO식 분류법이 후루카와가 논문을 쓰던 1927년 당시에 혈액을 분류하던 유일한 분류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혈액형 분류법들이 그 당시에도 모두 존재했다면 아마 후루카와는 ABO식 분류법에 의한 기질 분류를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혈액형 인간학의 생물학적 기본 가정은 혈액이 온몸 구석구석 퍼져 있으므로 인간의 다양한 특질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사실과 다릅니다. 사람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뇌에는 혈액 뇌관문(Blood Brain Barrier; BBB)이라는 것이 있어 ABO식 혈액형을 결정하는 항원이나 항체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즉, 뇌에 ABO식의 혈액형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죠. 생물학 전공자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생물학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습니다. 연구할 가치도 없기 때문이죠.
또한 혈액형 인간학은 대부분 그럴듯한 통계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이 또한 매우 부정확하며 비과학적인 방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추론 통계학의 핵심은 일반화 가능성이며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본의 대표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혈액형 인간학은 매우 제한된 숫자의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선발 과정 또한 매우 임의적입니다. 혈액형 인간학이 주장하는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는 통계적인 근거가 매우 희박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혈액형론을 신봉하는 것일까요?
심리학에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는 심리 현상이 있습니다. 바넘 효과란 모호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정보만을 채택하고 이에 상반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혈액형과 성격의 관계에 대해 적용해보면 사람들이 막연하고 일반적인 성격 묘사가 누구에게나 들어맞는다는 사실은 간과한 채 그들 자신에게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B형 남자는 다혈질이다'라는 정보를 접하면 이러한 묘사에 적합한 자기 주변의 B형 사람들을 찾고는 '역시 그렇군'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입니다. 이때 신중하고 침착한 B형 남자의 존재는 무시되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특정 혈액형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자신의 고정 관념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행동함으로써 특정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게 됩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고 부릅니다.
이제는 정말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떠돌고 있는 혈액형론의 망령을 무덤으로 돌려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덧1. 페루 인디언은 모두 O형이라는데 그들은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요? -_-;;;
덧2. 제가 B형이라서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ㅠ.ㅠ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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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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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형 외향적, A형 논리적, B형 감성적” 이란 시시껄렁한 기사가 올라온 김에 써본다.혈액형학, 그 탄생 배경이 매우 불순하다는 걸 둘째쳐도 그건 정말 순도 100% 구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