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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싶은 걸까요? 부모님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며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이용되기도 하죠.
하지만 대부분 부모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가장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모와 자녀는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태생적으로 조건이 달릴 수 밖에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자녀가 잘 되고 못 되는 건 그냥 무시해도 되는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부모 자신들의 자존심, 평판이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최소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1. 부모님 스스로 행복한 상태여야 함
2. 자신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가는 자녀를 격려, 축복, 지원할 수 있어야 함
3.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야 함
행복하지 못한 부모는 본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식을 성공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불행하지 않다는 걸 세상에 증명하고자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건 어렵기도 하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베팅할 기회가 있는 자식에게 거는 것이죠. 이런 부모일수록 자녀는 독립된 존재가 아닌 자신들에게 속한 소유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들의 자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권이 없으니 당연히 물어보지도, 상의하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결정을 따르라고만 강요합니다.
부모가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가는 자녀를 지원하고 칭찬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다른 길을 가는 걸 격려, 축복, 지원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죠. 자녀가 자신들과 독립된 별개의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부모의 행복이 자녀의 행복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자녀의 길을 온전히 축복할 수 있거든요.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 바로 조건이 걸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부모가 사랑을 선물처럼 주지 않았다는 것이죠(
'부모는 어떤 양육자가 되어야 하는가').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투자에 가까워서 자녀는 여기에 순익을 더해서 갚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겁니다. 부모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면 부담스러운 게 아니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마땅하겠죠.
저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부모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자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것이 어렵다는 말일 겁니다. 특이한 건 자녀의 인생을 마음대로 하려는 이기적인 부모일수록 자신들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고 믿고 있더군요. 그런 부모일수록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거다'. '너는 어쩜 부모 마음도 모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거냐'며 자신들의 언행을 강변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무조건적이라고 믿는 부모님들은 과연 위의 세 조건을 충족하는지 자신들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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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부부가 이혼하거나 사귀던 커플이 헤어질 때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는 말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은 그렇게 해도 실상은 조건이 안 맞아서, 경제적인 문제로, 성적인 문제로 헤어진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 상 실제로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정확하게는 기질 차이로 헤어지게 되는 것이죠. 성, 경제, 집안, 학력 등 다른 차이는 대부분 외부 요인이고 어렵기는 해도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질은 혈액형처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업무 특성 상 커플, 부부 갈등으로 상담을 받는 사람들의 기질 검사 결과를 비교하는 일이 많은데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기질이 상극인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최근에도 오래 부부 상담을 받았지만 간극이 전혀 좁혀지지 않는 부부의 TCI 결과를 supervision했는데 남편이 HML, 부인이 LMH 유형으로 서로 상극이었습니다.
'TCI/JTCI HML, LMH 기질의 비교 이해'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HML 기질은 제가 '야생 호랑이', '집시'로 부르는 유형이고 LMH 기질은 '원칙주의자 공무원' 유형입니다. 둘 다 원칙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HML 기질은 자유를 고수하는 것이 원칙이고 LMH 기질은 규칙을 고수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막을 알고 보면 절대로 함께 갈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성격 미발달 문제가 있다면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공통점에 먼저 혹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관계를 시작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겁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건데 썸타는 사이가 되면 더 깊은 관계로 진행하기 전에 어설픈 타로점이나 사주팔자를 보지 말고 TCI, MMPI-2 조합으로 심리적 궁합부터 맞춰보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이러한 심리 궁합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글을 참고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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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는 결국 일 아니면 관계 중 하나로 귀결되고 집단주의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관계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합니다. 일보다 관계 문제가 더 많거나 혹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블로그에도 여러 차례 올린 포스팅이 있으니 검색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관계 문제만 떼놓고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에게 섭섭하다는 감정이 깔려 있고 이 섭섭하다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탐색하다보면 결국 '내가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즉, 내가 give한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take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비롯하여 섭섭함, 억울함을 지나 분노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마인드가 바로 이 포스팅의 제목입니다.
'모든 관계는 사실 상 계약서 없는 비즈니스 관계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감정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관계가 비즈니스 관계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있다면 아래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나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있는가'
약간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남편이 왜 당신과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하나', '여친이 왜 당신과 만나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봐라' 등등. 상대방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과 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관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선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어차피 상대방도 알 바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어도 문제이고 알고는 있지만 일부러 주지 않고 있어도 문제입니다. 당연히 전자가 훨씬 더 큰 문제이고요.
이제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을 당신이 주고 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알지만 안 주고 있다면 먼저 주세요. 상대방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버티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을 겁니다.
가끔 긍정적인 강화를 하기 위해 품행 문제를 보이는 자녀에게 칭찬할거리를 일부로라도 찾아보라고 조언하면 칭찬받을 짓을 해야지만 칭찬하겠다고 버티는 어리석은(미성숙한) 부모들이 있습니다. 파괴적 관심 끌기를 하는 자녀에게 그런 고집을 부리는 건 바보짓이죠.
내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을 충분히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1.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 : 직접 알려주거나 잘 안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세요.
2.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으나 일부러 주지 않고 있는 경우 : 헤어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호구입니다.
갈등이 야기되는 일반적인 대인 관계를 예로 들었지만 비즈니스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비즈니스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만 먼저 생각하면 제대로 된 결과를 얻기는 커녕 불공정 계약을 하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 사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비즈니스 관계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왜 나랑 이 비즈니스 관계를 맺으려는 걸까에 대한 자기 객관화), 내가 과연 상대방의 그 needs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윈 윈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의 반려인과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도 이 친구가 내게 뭘 원하는걸까, 내가 그걸 충족시켜줄 수 있나였습니다. 반려인이 원했던 건 성실함과 책임감이었습니다. 둘 다 제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신이 있었고요. 나중에 물어보니 뭘 해도 가족을 밥 굶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승락했다고 하더군요.
그 때의 깨달음으로 저는 지금도 어떤 제안이 들어올 때 상대방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충족시켜줄 능력이 제게 있는지부터 따져봅니다.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맨 마지막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큰 실패 없이 일을 해 온 것 같네요.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 관계 문제로 고민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이 부분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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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죠.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회사를 그만두는 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는 배우자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건 니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하는 부모
얼핏 보면 본인이 선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도록 배려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상대방에게 떠미는 것일 뿐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든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것이든 일신 상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책임은 선택한 본인이 진다고 해도 당연히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놓친 것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배우자나 부모 등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의견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니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선을 긋는 건 이러한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보다 관계에 훨씬 더 해로운 짓입니다.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결국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라면 해로운 짓임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반대한 결과(그것이 무엇이든)를 책임질 여지를 두고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지지를 하지 않는 건 '너는 내가 원하는 걸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고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 책임은 너 혼자서 져야 할거야'라고 손절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걸 암묵적으로 강요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교활한 속셈이 깔린 행동이죠.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만약 순수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다면 두 가지 옵션이 뒤따랐을 겁니다. 첫째, '내 생각에는 이러저러한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진심어린 조언, 둘째, '만약 내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라는 지지 표명.
그러니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훨씬 더 성숙한 행동이고 관계를 유지하는데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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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가 짓고 싶은 집 설계 계약을 했습니다'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 집 설계가 진행 중인데 아직은 계획 설계 단계라서 현황 측량 결과에 따른 최종 계획 도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제가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인테리어에 대한 아이디어나 좀 얻으려고 여러 건축 관련 영상 클립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우연히 EBS의 '건축탐구-집' 방송 중 '7인분 노비의 집'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괴테 연구가인 전영애 (전) 교수의 '여백서원'을 소개한 영상이었는데 인트로 영상에서 자신을 7인분 노비라고 소개할 때부터 느낌이 쌔했는데 역시나 3,200평이나 되는 면적에 펼쳐진 도서관, 손님방을 쉬지도 못하고 관리하면서도 자신은 1평도 되지 않는 협소하고 지저분한 공간에 거주하는 걸 보면서 역시나 싶었습니다. 이 영상의 댓글을 보면 칭찬 일색이던데 저는 전혀 동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분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났던 자기 돌봄을 못하는 전형적인 내담자의 모습과 판박이었거든요. 진심으로 상담을 꼭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돌봄을 못하는 건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자기 돌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뼛속 깊은 생각에 기인하는 겁니다. 제 경험 상 애착 외상을 겪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심한 경우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반복적인 가스라이팅을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돌봄 없는 타인 돌봄은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과 돌봄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일 뿐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일시적인 착각일 뿐이고 일종의 중독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바치고 타인의 인정과 수용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타인 돌봄은 자기 돌봄이 잘 된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치가 있고 지속 가능합니다. 전 지금까지 자기 돌봄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타인 돌봄에만 몰두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심리평가를 해 보면 예외없이 심신이 엉망진창인 상태로 나타났고요.
자기 돌봄이 안 되는 분들은 자기 돌봄을 단순한 욕망 충족으로 폄하하고 타인을 돌보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돌봄은 그렇게 간단한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온전히 '보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자기 돌봄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신체적 건강을 챙기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영혼이 편안함을 느끼고 이를 위해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자기 돌봄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wholeness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사실 상 행복한 상태에 가장 가깝습니다. 당연히 에너지와 시간, 관심, 사랑이 남아돌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충실한 타인 돌봄을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는 선순환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열심히 타인 돌봄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공허하고 외로운 분들은 자기 돌봄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부터 꼼꼼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어디엔가 구멍이 뚫려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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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보다 보면 새벽 시장에 가 봐라, 병원에 가 봐라, 일용직 근로 현장에 가 봐라 하면서 동기 부여를 하는 영상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나약한 마음에 채찍질을 해서 마음을 다 잡으라는 좋은 의도로 만든 건 이해하지만 실제로 효과는 별로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경험을 피해야 한다는 고대 선조들의 교훈이 유전자에 뼛속 깊이 박혀 내려오고 있거든요.
아, 물론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비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는 일시적인 탈출 수단으로 작용하는 충격 요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나보다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동기 부여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부정적인 경험은 정신과 영혼에 강력한 손상(damage)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온갖 참혹한 광경을 접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생존 군인이 귀환하면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이후에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될까요?
목이 잘리고 피가 철철 흐르고 사지가 찢겨 나가는 슬래셔 무비나 영상,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이 충혈되고 머리가 곤두설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귀청이 찢어지고 머리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헤드뱅잉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인류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그런 강렬한 시각, 청각, 후각, 미각적 자극은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경험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경험을 피하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폭주하고 이를 통해 잠시 활력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기능 항진이 지속되면 장기적으로 심신에 좋을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로 이해할 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굳이 그걸 찾아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부정적인 경험을 피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재생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영혼이 병들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관성 때문에 점차 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경험을 갈구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경험을 최대한 피하고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소에 가려고 노력하고 행복한 사람만 만나려고 노력하고 그들에게서 행복의 방법을 배우세요. 행복을 위해 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요.
저도 젊었을 때는 부정적인 경험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필요한 도전이라고 여겼습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스트레스 상황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종국에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머리는 더 혼란스러워졌으며 감정 기복은 더 심해졌을 뿐입니다. 여행이라는 치료제가 없었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제가 부정적인 경험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니 제가 사실은 보기에 아름답고, 듣기에 편안하고, 맛보기에 즐거운 것들을 좋아하고 그런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니 다른 분들도 저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런 부정적인 경험이 주는 정신적인 상처가 행복으로 가지 못하게 방해할 겁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경험은 그게 무엇이든 피하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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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질 유형이 같을수록 궁합이 좋다
2. 기질 유형이 상극일수록 궁합이 나쁘다
3. 기질 유형이 상극인데 성격이 미성숙한 것이 최악의 조합이다
4. 기질 유형이 상극이라도 성격이 잘 발달되어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릴 일이 없다
5. 기질 유형이 비슷하면 성격이 상극이라도 서로 보완이 된다
6. 기질에서는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같아야 한다. 사회적 민감성은 달라도 괜찮다
지금까지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제인 MBTI 궁합입니다.
사실 저는 MBTI를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이해하는데 기대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넘 효과 때문에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거든요. 무엇보다 실제로는 아닌데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응답하는 경향이 강해 실제 자신(real self)를 반영하기보다는 '그렇다고 믿는' 내지는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이상적인 자신(ideal self)을 반영하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그래서 상담을 하면서 MBTI를 주기적으로 해 보면 유형이 계속 바뀝니다. TCI도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MBTI와 달리 TCI는 주기적으로 실시하면 점점 하나의 유형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이고 무엇보다 초기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신뢰하지도 않는 MBTI로 알아보는 궁합 이야기를 왜 하냐하면 제가 supervision했던 부부 사례 중에 TCI와 MBTI를 동시에 실시한 경우를 모아보니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경향이 관찰되었기 때문입니다.
1. TCI의 기질 유형이 같으면서 MBTI 유형은 반대일수록 궁합이 좋다
2. TCI의 기질 유형이 상극이면서 MBTI 유형이 같을수록 궁합이 나쁘다
3. TCI의 성격 유형은 MBTI 성격 유형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일반인들은 TCI를 잘 모르고 MBTI에 익숙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MBTI 유형이라면 궁합이 좋아서 끌린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상극의 기질에 끌리는 겁니다. 그래서 초기의 밀월 단계가 지나면 지옥이 시작되는거죠.
이와 상반되게 MBTI 유형이 반대라면 처음 만났을 때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싶지만 TCI 기질 유형이 같으면 만날수록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모자란 반쪽을 채워주는 느낌을 받는거죠.
TCI의 기질 유형이 상극이면서 MBTI 유형이 같은 최악의 궁합은 정말 많이 봤습니다. 직업 특성 상 문제가 있는 커플의 사례만 보니 많을 수 밖에 없지요. 그럼 TCI의 기질 유형이 같으면서 MBTI 유형은 반대인 사례는 없냐 하면 당장 저와 제 반려인이 그런 경우입니다.
'TCI로 알아보는 궁합'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LLL 기질이고 반려인은 LLH 기질입니다.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동일하고 사회적 민감성만 반대죠. TCI 궁합의 원칙 6에 해당합니다. 성격은 제가 HMH, 반려인이 LML 유형으로 반대입니다. TCI 궁합의 원칙 5에 해당되죠.
그렇다면 MBTI 유형은 어떨까요? 제가 극단적인 ISTJ이고 반려인이 극단적인 ENTP입니다. T만 일치하고 나머지 차원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제가 반려인을 처음 만났을 때 첫 인상은 '저 여자는 대체 뭐지? 제발 저 여자와만 엮이지 않으면 좋겠다'였습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여성상이었죠. 나중에 둘이 사귄다는 사실을 공개했을 때 주변에서 아무도 믿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서로 잘맞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고 삐삐를 쓰던 시기였기 때문에 집에서 유선 전화를 붙들고 밤새 수다를 떨다가 부모님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남사친-여사친 관계였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결혼 20년차인데도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고 갈등 자체가 없습니다. 완전 개과인 반려인이 저 때문에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입양했고 극내향인 제가 반려인 때문에 인생 취미인 여행에 빠졌죠. 기질이 같으면 반대되는 성격이 오히려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MBTI 유형이 반대라도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TCI를 추가 실시해서 기질 유형이 같으면 오히려 천생연분을 찾은 것일 수 있으니까요. 성격 유형까지 반대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고 꽉 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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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ceived control을 보통 통제감으로 번역하는데 오늘 제가 이야기하는 통제감은 controllability입니다. 정확하게는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통제력이니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하고는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통제력이 없는 사람이 통제감만 갖고 있는 건 정신승리의 영역이니 통제감을 느낀다는 건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통제감(controllability)이 우리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통제감을 높여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이미 어느 정도 통제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타인의 자본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통제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니까요.
제 개인적인 경험에 입각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정기 건강검진에서 요추 디스크에 팽윤이 있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계속 방치하면 결국은 디스크에 문제가 생긴다는 경고였지요. 어차피 앉아서 오래 일해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니 체압을 분산하기 위한 방석을 구매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관련 포스팅
'허리가 좋지 않은 분들을 위한 필수품 : Bullsone Balance Seat(Portable)').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통제감을 획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부의 무언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밸런스 시트가 없는 의자에 오래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 허리가 아프고 굽어지는 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통제감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만들었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결국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장거리 운전을 마치고 차에서 내릴 때 허리에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걸을 때도 어깨가 말려 있어서 의도적으로 신경을 써야 하지 허리가 저절로 굽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제 허리에 대한 통제감을 획득한거지요. 게다가 이 사소한 통제감 획득으로 인해 제 몸에 대한 자신감과 성취감이 전반적으로 올라간 느낌입니다.
코어 근육을 만들어서 통제감을 획득한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통제감이 낮은 환경을 최대한 피해야 하고 만약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통제감을 최대한 높여 나가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현실 장악력을 높인다고 부릅니다. 중고등학생이 방과 후 자율 학습에 참여할 수 밖에 없다고 할 때 학교에서 정한 그 시간에 억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하지 말고 그 시간을 주도적으로 분배해서 어떻게 활용할 지 계획을 세우고(꼭 공부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 계획대로 이용하는 게 통제감을 높이는 겁니다.
저는 15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휴가를 단 하루도 쓰지 못하고 남긴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직장인의 권리지만 의외로 휴가를 다 찾아먹는(?) 직장인은 드뭅니다. 오히려 휴가를 완전히 소진하는 건 이기적인 놈들이라는 욕이나 먹기 십상이죠. 하지만 저는 이것도 통제감을 획득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직장 생활하면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제 나름의 통제감 원칙을 잘 지켜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통제력이 아닌 통제감만 얻는 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그 상황에 머물러 있을 때만 문제가 되는 것이고 통제감을 늘려 나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통제감만 얻는 것도 지속성의 측면에서 도움이 됩니다. 통제력을 높이겠다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 결국 통제력도 얻게 되거든요.
그러니 사소한 것부터 통제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통제감의 강력한 효과를 느끼게 되실거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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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을수록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는 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주저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설사 나를 우습게 보더라도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만큼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절을 당할까봐이고 거절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자기 비하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틀을 깨야 합니다.
도움을 청했을 때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받아서 얻는 실제 이득보다 내가 도움을 받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자기 가치감이 고양됩니다. 또한 도움을 준 사람은 자신이 남을 도울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고양감이 생기기 때문에 서로 윈-윈하게 됩니다.
자기 가치감이 높아지면 도움을 청하는데 주저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확률적으로도 도움을 청하면 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따라서 점점 자기를 비하하는 경향이 감소하게 되죠. 따라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기면 억지로라도 도움을 청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수록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설사 거절을 당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니 damage가 적으니까요.
그렇다면 자기 비하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해서 자신감을 얻어서 거절 당할 확률을 최대한 줄인 다음에 도움을 청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왜냐하면 거절당했을 때 damage는 아무래도 피하고 싶으니) 생각이나 신념을 바꾸는 것보다 행동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성공 경험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성공 가능성이 너무 낮아요. 그래서 강제로 인지 부조화 상태를 만들어서(이미 도움을 청하는 행동을 했다. 이건 바꿀 수가 없음. 그러니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바꾸는 게 상대적으로 더 쉬움) 생각을 바꾸는 게 더 빠른 방법입니다.
다만 마찬가지 원리로 도움 요청을 거절당했을 때도 이미 거절당한 환경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거절당할만큼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귀인 할 수 있으니 거기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상대가 쉽게 도와줄 수 있는 가벼운 부탁부터 연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한번 연습삼아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도움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성이 중요한 영장류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종족의 안녕을 위해 협조하려는 성향이 본능처럼 내재되어 있어 간절한 도움을 거절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다 누군가를 콕 집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애매하게 간보듯이 하지 말고 간절함을 담아서 도와달라고 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1. 자존감을 높이는 건 지속적인 성공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
2. 도움을 요청하는 건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자존감을 기반으로 함
3. 행동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에 일부러 도움을 청하는 건 인지 부조화를 이용한 방법임
4. 반복적으로 거절을 당하면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요청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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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 때는 꿈이 뭐냐는 질문을 가끔씩 받곤 했죠. 이제는 그럴 나이는 지났습니다만;;;
그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싫습니다. 왠지 이루지 못할 허망함을 내포하는 단어 같거든요. 꿈 깨라는 말이 대표적이죠. 이분법으로 꿈과 현실을 나누기도 하고요. 현실의 반대 개념으로 꿈을 상정한다면 현실적이지 않은 것,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꿈이라는 말 같잖아요.
이러저러한 꿈이 있다고 말하는 건 희망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꿈을 이루고 나면 더 허망해질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잘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꿈 대신 목표를 세운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버킷 리스트의 형태이든, 체크 리스트의 형태이든 대체로 목표는 구체적이고 가는 과정도 눈에 보이거든요. 중간에 이건 아니다 싶으면 변경할 수도 있고요.
진로와 관련해서 제 목표는 대학원을 무사히 졸업하고 병원에 들어가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최종 목표였어요. 박사는 제 진로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박사 학위는 대체 왜 그렇게 따라고 난리인가'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 다음 일과 관련된 목표는 독립을 하는 것이었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지만 2018년 6월에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인생 Season 2를 시작합니다').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할 때는 연차 휴가를 하루도 남기지 않는 것 같은 사소한 목표도 세워서 달성했고요.
그 밖에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것, 고양이를 반려 동물로 입양하는 것, 비건 채식인이 되는 것 등의 목표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게는 2개의 목표만 남았습니다. 하나는 여생을 보낼 저만의 집을 짓는 것, 마지막 목표는 고통 없는 자연사를 하는 것입니다.
집 짓기에 대해서는
'집 지을 땅을 샀습니다' 포스팅에서 설명을 드렸고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현재 건축 설계 계약 바로 전입니다. 올해 도면이 나오면 그걸 바탕으로 내년에 형질 변경과 대지 조성, 건축 허가 신청을 순차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집을 짓는 목표까지 달성하면 그 다음은 그냥 자연스럽게 지금처럼 재미를 추구하는 저만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 목표인 고통 없는 자연사는 어느 정도 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그래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등 연명의료 결정제도 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강구해 둘 작정입니다. 이것도 정리하는대로 포스팅하겠습니다.
여러분도 꿈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기쁨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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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같은 가족 중심주의 문화권에서는 서구의 개인 중심주의 문화권에 비해 부모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녀에게 좋은 영향도 좋지 않은 영향도 훨씬 더 크게 미칠 수 있거든요.
일찌기 위니캇은 good-enough mother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마저도 결코 쉬운 게 아니죠.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양육자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아서 평소 제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 선생님의 역할을 하려고 애쓰지 말 것
: 어렸을 때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부모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가 부모가 아닌 선생님의 역할을 하려는 겁니다. 심하면 선생님도 아닌 지식 전달자의 역할에만 치중하기도 합니다. 역할 모델로서 자녀의 거울 역할을 하기는 커녕 기숙사 사감, 독서실 총무, 학원 강사, 운동 코치가 해야할 일만 하는거죠. 새로운 정보를 취합해서 전달하고 성취를 격려하고 때로는 push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내 자녀는 기숙사 생도, 독서실원, 학원생, 운동 선수가 아닙니다. 그 역할은 각자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부모는 부모의 역할로 돌아와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육체적, 정서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정서적 교류를 통해 사회 생활을 준비시키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선생님의 역할을 하려하면 부모의 역할을 할 사람이 없게 되고 자녀는 사실 상 부모가 없는 고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모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 사랑은 선물처럼 줘라
: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주면서 사랑이라고 강변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희생하는데 뭐가 불만인지 맨날 퉁퉁거리고 말도 안 섞으려 한다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 자녀에게 물어봤냐고 물으면 애가 뭘 아냐 어른인 내가 더 잘 알지, 물어봤지만 대꾸도 안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모 자녀 사이가 단절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녀를 학대하기 위해 마음대로 행하는 부모는 극소수입니다. 나름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애쓰는 걸텐데 문제는 그 사랑이 자녀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랑은 선물처럼 줘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고 좋아하는 지 몰래 알아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선물로 적당한 걸 찾아내도 혹시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타이밍이 적절한걸까를 또 한번 고민하죠. 그러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내고 관찰하고 또 고민합니다. 사랑도 선물처럼 줘야 합니다. 자녀가 부담없이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요. 내가 주고 싶어하는 선물을 주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욕심을 채우면서 자녀에게 고마워하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 잔소리를 하고 싶으면 최소한 칭찬 3번을 하고 해라
: 부부 상담에는 정서 통장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부부가 평소에 사랑을 많이 적립해 놔야 나중에 갈등이 생겼을 때 적립해둔 사랑을 인출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자녀와 사랑을 많이 쌓아놔야 마음이 상했을 때 쉽게 치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 하듯이 자신이 어렸을 때 얼마나 미성숙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자녀의 마음에 안 드는 구석만 잘 보이는 법입니다. 자신의 단점이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녀에게 투영되어 그런 것인데 그래서 잔소리를 해서 뜯어고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만 악화되죠. "엄마/아빠나 똑바로 하세요"같은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게 다 평소에 쌓아놓은 적립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흔히 말하는 '당근은 한 개도 안 주면서 채찍만 휘두르는' 부모들이죠. 잔소리를 하고 싶으면 최소한 칭찬 3번을 쌓아놓고 하세요. 칭찬할거리가 통 없다고요? 그걸 찾아내는 것도 부모의 의무입니다. 칭찬을 못 하겠으면 잔소리도 하지 마세요. 최소한 새로운 상처는 안 내겠지요. 잔소리를 하기 위해 억지로 칭찬할거리를 찾아도 됩니다. 그걸 찾는 과정에서 자녀의 예쁜 부분이 새롭게 눈에 들어올테니까요. 그러면 더 이상 잔소리를 하고 싶어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부모 교육이나 양육 코칭을 하면서 사용했던 기법 중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정리해 봤습니다. 생각이 나면 또 정리해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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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을 바꿀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상담자를 만나는 건 굉장히 큰 행운입니다. 하지만 좋은 상담자를 찾는 건 예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서 계속 일을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게 어려운 일입니다. 내담자로 만나본 게 아닌 이상(이중 관계 문제로 그러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상담자라고 해도 능력 있는 상담자인지까지는 모르니까요.
그래도 요새는 자신에게 맞는 상담자를 고르는 법을 SNS를 통해 알리는 상담자가 많아졌습니다.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이든 엉터리 상담자를 만나 마음의 상처를 더하는 내담자에게 측은지심을 느껴서이든 간에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맞는 좋은 상담자를 찾는 건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평판이 좋아도, SNS에서 유명하다고 해도, 결국 내 머리를 맡겨봐야 나에게 맞는 스타일리스트인지 알게 되는거니까요. 여러 곳에서 try를 해 보다 보면 마음에 드는 스타일리스트를 만날 수 있듯이 상담자도 그렇게 만나는 게 좋습니다.
오늘 저는 상담자를 사칭하는 사기꾼을 구분하는 저만의 기준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해당되는 기준이 많아질수록 사기꾼일 가능성이 커 집니다.
1. 상담 건수를 자랑하는 상담자
: 10년 동안 1만 명을 상담했다고 홍보하는 상담자가 있다고 해 보죠. 1년이면 1천 명이고 쉬는 날 없이 상담을 했다고 해도 하루에 3명을 상담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넘어가더라도 문제는 가능 불가능 여부가 아닙니다. 상담은 컨설팅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아주 짧게는 10회, 길게는 몇 년까지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이 사기꾼이 10년 동안 하루에 3명을 만난 게 사실이라고 해도 상담을 한 게 아닙니다. 그냥 1시간짜리 말장난을 친 겁니다. 무려 10년 동안 1만 명에게요. 그 중에 몇 명이나 제대로 된 도움을 받았을까요?
2. 고액 상담료를 자랑하는 상담자
: 1회 상담에 50만 원 넘게, 심하게는 1백만 원 이상을 받는다고 자랑하는 상담자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상담료가 비싸면 상담자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담 실력(?)은 상담료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아주 예외에 속하는 초일류급 상담자들의 1회(1시간) 최대 상담료도 20만 원을 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상담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상담에 입문하지 떼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려고 상담자가 되려는 사람은 제가 장담하건데 단연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과 자격, 수련 기간 등을 고려하여 최대한 합리적인 상담료를 책정하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 논리에 역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상담료를 일괄 적용하지 않고 내담자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차등 적용하는 뼛속까지 측은지심으로 똘똘 뭉친 상담자도 많습니다. 그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상담료를 책정하는 걸까요?
상담료를 너무 높게 책정하면 내가 아무리 뛰어난 상담자라고 해도 수요층이 제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입은 동일할 지 몰라도 만나는 내담자의 수도, 범위도 줄어들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상담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 등을 저울질하여 상담료를 책정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높아지지 않는 겁니다.
그럼 사기꾼은 왜 말도 안 되는 고가의 상담료를 받을까요. 상담 실력과 금액이 비례한다는 사람들의 믿음과 인지 부조화 기제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시간에 1백만 원의 상담료를 요구하는 상담자가 있다고 해 보죠. 상담을 받았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사기꾼이니 당연히 말빨은 장난아니겠지만 현란한 말장난일 뿐 상담이 끝나고 나니 무슨 도움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말도 안 되는 비용을 지불했으니 분노가 치밀어 올라야 정상일테지만 비용과 서비스의 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비용을 지불한 행동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바꿔 인지 부조화를 해결합니다. 이 상담이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죠. 그래서 초고가의 상담료를 지불한 내담자가 등장하여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는 간증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단 1회의 상담으로 인생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인생이 바뀌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변화는 아주 어렵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상담에서 흔히 말하는 '통찰'을 경험했다고 해도 이러한 통찰이 정착되기까지는 무수한 재경험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바뀌는 건 어렵습니다.
3. 미디어에 지나치게 많이 노출되는 상담자
: 요새는 온라인 미디어의 세상이니 제대로 된 상담자도 자신을 홍보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중 매체를 지나치게 기웃거리는 상담자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대체 상담은 언제 하고 공부는 언제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것인데 SNS이든, 방송이든, 언론 미디어이든 지나치게 얼굴이 많이 알려진 전문가는 거르는 게 답입니다. 미디어에 나오는 시간만큼 자신의 본업과 멀어질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라 당연히 실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으니까요. 대중의 열광에 취하면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도 숟가락을 얹게 되고 결국 큰 실수를 하고 나락에 떨어지게 됩니다. 소위 국민 강사로 불리던 사람들의 말로가 다 동일하지요. 진짜 고수는 물러날 때를 잘 아는 법입니다.
4. 극복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고 자랑하는 상담자
: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상담 영역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신기한 기술이나 문제 해결 방법이 등장한다는 건 무조건 사기라고 보면 됩니다. 상담 기법과 이론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검증과 비판을 거쳐 자리잡은 것들입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이거 하나만 먹으면 식단도 운동도 할 필요 없이 살이 쭉쭉 빠진다고 이야기하는 다이어트 사기꾼과 똑같습니다. 사기꾼이 왜 노하우를 이야기하냐 하면 상담을 통한 변화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는 걸 감추고 싶어서입니다.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이게 반드시 필요한데 그러면 대단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비판적인 태도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걸 자신만의 노하우로 포장해서 팔아먹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습니다.
뛰어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경험을 쌓기 위한 다년 간의 엄청난 노력과 실전 경험이 요구됩니다. 공인된 자격으로 그러한 최소한의 노력을 보증하는 것이고요.
그러니 달콤한 혀나 글솜씨만으로 터무니 없이 비싼 값에 허무맹랑한 희망을 팔아먹으려는 사기꾼에 놀아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진리 중 하나는 이겁니다.
"긍정적인 변화는 반드시 그만큼의 희생과 댓가를 요구한다. 그런 건 필요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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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으로 어그로를 좀 끌었습니다.
행복과 성공은 정답이 없는 주제죠. 뭐가 행복이고 뭐가 성공인지 사람마다 기준도 다르고 무엇보다 정의 자체가 다릅니다. 맨날 논쟁해봐야 쓸데없습니다. 하지만 행복하면서 성공한 사람은 남에게 자세히 설명을 못하더라도 그 느낌이 뭔지 다들 압니다.
일단 저는 행복하고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니가 뭐가 행복하냐 하나도 안 행복해 보이는데", "니까짓게 뭐가 성공했다고 나대냐"고 이야기하면 더 이상 진행이 안 되니까 그냥 그렇다고 해 주세요. 그래도 시비를 거시겠다면 너님이 무조건 옳습니다.
행복하면서 성공하는 건 의외로 굉장히 어렵습니다. 행복한 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의외로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성공하는 것도 탁월한 재능이 있으면 꽤 쉽고 설사 그런 재능이 없더라도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행복과 성공을 동시에 이루는 건 결코 쉽지 않아요. 약간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행복은 마음과 영혼의 영역이고 성공은 현실과 물질의 영역이거든요. 행복에 집중하면 성공을 소홀하게 되기 쉽고 성공에 집중하면 행복을 놓치기 쉽습니다. "아닌데? 연봉 수백 억의 일타 강사나 빌딩 사 제끼고 명품 플렉스하는 성공한 연예인은 행복해 보이던데?"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죠. 그들을 보면 행복으로 성공하는 건 어려워도 성공(명예, 인기, 금전 등)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아닙니다.
이걸 제가 어떻게 아냐 하면 제 내담자의 상당수가 그렇게 극강의 성공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이름만 대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아는 유명인도, 재산이 1조에 가까운 부자도, 학계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저명인사도 만나봤지만 그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성공한 사람들 중에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 내담자들과 그들의 입을 통해 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사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대중 앞에서는 행복해 보이는 열연을 펼치지만 다들 뒤로는 일, 운동, 약물, 도박, 섹스에 중독되어 지옥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 '하루종일 운동만 해도 행복하다'는 사람 보셨죠? 그거 일, 운동에 중독된 겁니다. 일과 운동을 할 때 생성되는 도파민에 중독된 상태에요. 이것과 관련해서는
'중독이란 무엇인가'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5년 동안 이런 분들을 만나면서 행복하면서 성공하는 방법, 그 둘의 균형을 잃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바로 '재미'였습니다.
"에이~ 장난해?"라는 원성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은데 정말로 진지하게 말씀드리지만 행복하면서 성공하는 방법은 '재미' 뿐입니다. 물론 재미만 추구해서는 안 되고 '싫어하는 일을 최대한 안 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전략도 추가해야 하지만요. 이건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일을 적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포스팅에 이미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는 일을 파고 들려면 싫어하는 일을 최대한 안 해야 가능하거든요.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면 그만큼 재미에 집중해야 할 시간을 빼앗기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에너지와 동기를 소진하게 됩니다. 그러면 절대로 재미를 실력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재미를 통해 행복과 성공을 얻고 싶은 분들은 최대한 싫어하는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하면서 재미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심리학 영역에서 30년을 먹고 살았지만 자신이 재미를 느끼지 않는 영역에서 성공한데다 행복감까지 느끼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천재는 성공할 수 있지 않나요?" 라고 물으실 수 있을텐데 그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성공은 했다해도 아마 행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리고 재미를 추구하는 삶은 결국 실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든 자신이 못하는 영역에서 계속 재미를 유지할 수가 없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흥미로 시작하지만 실력이 너무 없어서 계속 못하면 결국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계속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그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일시적인 흥미와 재미를 혼동하시면 안 되는데 흥미는 잠깐 끌리는 것이고 재미는 이러한 끌림이 쭈욱 지속되면서 점차 강도도 강해지는 겁니다. 흥미는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일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용도로만 사용해야 하고 결국 실력이 생겨야 재미가 유지되는 거죠.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이제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여러 차례 한 바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보면 비슷한 주제로 쓴 포스팅이 꽤 많이 있습니다.
저는 온전히 심리학이 재미있어서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가 심리학자라 그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습니다만 그 어려운 시기에 아무런 전망도 없는(흔히 '심사철'이라고 불리는 세 학과가 그랬죠) 심리학과에 만학도로 입학하신 걸 보면 아버지도 저처럼 재미에 끌리셨을거라고 짐작합니다. 그 재미 추구 유전자를 제가 물려받았고요. 어쨌든 그렇게 입학한 심리학과의 수업은 그야말로 재미없었습니다. 한자를 섞어서 필기한 노트를 최대한 많이 채워야 좋은 점수를 주는 한심한 교수도 있었고 대체 교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는 게 없는 교수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심리학 학술 동아리에 들어가서 4년 내내 스터디를 하면서 선배들과 심리학 공부를 독학했습니다. 그 공부로 타대 대학원에 갔고요. 그리고 대학원 때 IMF가 터졌습니다. 저는 조직 심리학 전공이라 대부분의 선배들이 경영학 냄새가 물씬나는 집단 역학이나 조직 공정성 같은 주제로 논문을 쓸 때 실직자의 심리적 경험을 주제로 그 당시에 흔히 사용하지 않던 공변량 구조 분석을 했습니다. 그냥 제 마음을 따른거죠. 그리고는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외국 컨설팅 회사에 취업하는데 저는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받기로 합니다. 임상 심리학을 조직 심리학에 접목시키면 재미있겠다 싶었거든요. Organizational Health Psychology를 하고 싶었던거죠.
안타깝게도 3년의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이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가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도저히 못견뎌서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고 실제로 supervisor 선생님과 진지하게 상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재미가 없는 3년을 버티는 게 제 영혼을 갉아먹는 것 같았거든요.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버텨냈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무능하고 형편없는 performance를 보였던 3년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무능해서 제 몫까지 동기 선생님이 떠맡는 바람에 수련 자체도 힘든데 고생을 두배로 하셨지요.
전문가가 되고 난 이후에는 임상심리전문가의 다음 코스인 박사 과정이나 종합병원 supervisor 따위는 생각도 안 했습니다. 둘 다 재미가 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재미있어 보이는 상담 영역으로 넘어왔습니다. 그것도 불모지에 가까운 도박 중독 치료부터 시작했습니다. 도박의 근원지인 마사회에서 도박 중독 치료를 한다는 게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재미를 찾았습니다. 상담, 중독, 애착 외상, TCI, 블로그, 여행, 채식, 고양이 등등 말이죠.
그래서 5,435일 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온전히 제 재미를 위해 supervisor와 강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병원 수련 3년을 빼고 제 인생은 온전히 재미만을 추구한 삶이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수행도 엉망이었고 재미가 있으면 항상 결과가 좋았습니다. 재미가 있으니 시간과 노력과 창의성과 열정을 계속 쏟아부을 수 있었고 그래서 약간의 재능만 있어도 결과가 나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프리랜서일수록 삶의 균형을 맞추는 노력이 중요하다'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는 일 년에 열 달만 일하면서도 남부럽지 않은 수입을 얻고 있고 그러면서도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잘 맞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여행을 원 없이 다녔고 이제는 저만의 집짓기에 도전하고 있죠.
기승전 제 잘난 척이 된 것 같지만 핵심을 다시 말씀드리면 행복하면서 성공하는 법은 '재미'를 잃지 않고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겁니다. 마음수련을 통해 행복할 수 있고, 재능과 노력을 통해 성공은 할 수 있지만 재미가 없으면 절대로 둘을 동시에 얻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제 모든 것은 재미가 있어서 지속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가 없어지면 당장 내일이라도 문을 닫을 겁니다. 2004년 7월 4일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걸 보면 이미 흥미가 아닌 재미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 같아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이 긴 글을 읽은 모든 분들도 꼭 재미가 유지되는 영역을 찾아서 행복과 성공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시기 바랍니다. 계묘년과 찰떡궁합인 덕담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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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포스팅을 하게 된 계기는 TCI의 기질, 성격 유형이 도무지 맞지 않는데도 연애, 결혼을 하면서 상처받는 커플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궁합을 본답시고 사주팔자, 탄생석, 별자리, 혈액형까지 맞춰보지만 그런 게 맞을리가 없죠.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TCI 결과에 따른 기질/성격 유형의 궁합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셔도 되고 재미로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시작해 보겠습니다.
TCI 궁합의 원칙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기질 유형이 같을수록 궁합이 좋다
2. 기질 유형이 상극일수록 궁합이 나쁘다
3. 기질 유형이 상극인데 성격이 미성숙한 것이 최악의 조합이다
4. 기질 유형이 상극이라도 성격이 잘 발달되어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릴 일이 없다
5. 기질 유형이 비슷하면 성격이 상극이라도 서로 보완이 된다
6. 기질에서는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같아야 한다. 사회적 민감성은 달라도 괜찮다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1. 기질 유형이 같을수록 궁합이 좋다
사람들은 기질이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유사성의 원리(principle of similarity)로 설명합니다. 당장 부모님을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기질을 물려받은 부모에게 동질감, 측은지심을 좀 더 느끼게 마련일 겁니다. 기질이 같다는 건 그냥 같은 종족이라는 걸 아는거라서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척 보면 알 정도로 통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흔히 말하는 죽이 잘 맞는 사람입니다.
2. 기질 유형이 상극일수록 궁합이 나쁘다
그렇다면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에 따라 반대되는 성향에 끌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상보성의 핵심은 '반대되는'이 아니라 '다르지만 서로 보완되는'입니다. TCI의 기질 상극은 상보성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인과 안드로메다인의 사이처럼 그냥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끌리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지구인이 안드로메다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무 이질적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기질 유형이 상극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려서 연애, 결혼을 하는 걸까요? 3번 원칙 때문입니다.
3. 기질 유형이 상극인데 성격이 미성숙한 것이 최악의 조합이다
'상극의 기질은 왜 서로에게 끌리나 : 임상가용' 포스팅에서 설명한 것처럼 상극인 기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HMH 기질과 LML 기질은 서로 상극인데 둘 다 'self-centeredness'라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성격이 미성숙하다면 서로의 self-centeredness에 끌리는 겁니다. 사실 HMH 기질은 이를 '타인의 관심'으로, LML 기질은 '타인의 무관심'으로 충족하려 하기 때문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인데도요. 성격이 미성숙하여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 상담을 통해 성격 미발달 문제가 해결되면 결별하거나 이혼하게 됩니다.
4. 기질 유형이 상극이라도 성격이 잘 발달되어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서로에게 끌릴 일이 없다
기질 유형이 상극이라도 성격이 잘 발달되어 있다면 자신의 기질을 잘 조절하기 때문에 기질이 상극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굳이 왜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과 함께 있으려할까요? 기질 유형이 상극인 사람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과 같아서 서로에게 그야말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끌리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기질이 상극인데 성격이 미성숙하여 상대방을 오해한 나머지 지옥 속에서 살고 있는 커플을 무수히 봤지만 기질이 상극인데도 성격이 잘 발달되어 행복한 관계를 맺고 있는 커플은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5. 기질 유형이 비슷하면 성격이 상극이라도 상관없다
저는
'기질과 성격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포스팅에서 한 사람이 어떤 바탕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게 기질이고 정작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 지,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에 대해 알려주는 건 성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HMH 기질인 커플을 보죠. 만약 한 사람이 HML 성격 유형이고 다른 사람이 정반대 성격인 LMH 성격 유형이라면 어떨까요? HMH 기질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self-centeredness가 중요한 기질입니다. LMH 성격 유형이라면 이를 비논리적인 방범으로 충족하려 할 텐데 이와 반대인 HML 성격 유형은 LMH 성격인 사람이 잘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논리적 성격 유형이니) 같은 자기애성 기질이고 자기애성 기질의 특성 상 상대방이 자신의 자기애를 충족하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만의 방식이 있겠거니 하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길 소지가 별로 없습니다.
6. 기질에서는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같아야 한다. 사회적 민감성은 달라도 상관없다
이 원칙은 저와 반려인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지만 저는 LLL 기질이고 제 반려인은 LLH 기질입니다.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은 동일하고 사회적 민감성 기질은 반대입니다.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반대라면 같이 살기 힘듭니다. HH와 LL을 생각해보면 HH는 급정거-급출발을 하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하지만 LL은 승차감과 안전 운전이 중요한 자동차와 같아서 같이 갈 수 없습니다. HH는 LL이 답답해서 견디지 못하고 LL은 HH가 위험천만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민감성 기질은 어떨까요? 높은 사람은 관계 지향적이지만 낮은 사람은 과제 지향적이라서 반대라기보다는 지향점이 다른 쪽에 가깝습니다
저와 반려인은 모두 LL 기질이라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도, 미리 준비하는 것도,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것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을 하는 것도, 미래를 준비하는 경향도 비슷합니다. 흔히 말하는 척 하면 척 알아듣는 소울 메이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반려인은 사회적 민감성이 아주 높아서 사람을 좋아하고 관계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제가 사회적 민감성이 낮아서 내향적이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걸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저를 바꾸려 하는 건 LL 기질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계 욕구 충족이 필요하면 알아서 가까운 지인을 활용하고 저를 내버려 둡니다. 저도 LL 기질이기 때문에 제 사생활을 존중해주면 반려인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 굳이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대인 관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저와 다른 것 뿐이죠.
그렇다면 성격은 어떠냐 하면 저는 HMH 성격 유형이고 반려인은 LML 성격 유형으로 유형만 보면 상극입니다. 반려인은 자신이 창의적이지 않다며 불만스러워하지만 LML 성격 유형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좋은 점을 금방 벤치마킹하고 응용력이 뛰어납니다. 저는 HMH 유형이기 때문에 누구를 따라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LML 성격 유형인 반려인 때문에 득 보는 게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가서 길을 잃었을 때 저는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만 반려인은 넉살좋게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 봐서 저보다 빨리 옳은 길을 알아냅니다. 그래서 반려인이 LML 성격 유형인 게 싫지 않습니다. 제 고집스러운 독창성의 헛점을 채워 주거든요.
정리하자면, 기질은 비슷할수록, 최소한 자극추구, 위험회피 기질이 같으면 사회적 민감성 기질이 다르거나 성격이 상극이어도 괜찮은 궁합입니다. 반대로 기질이 상극이면 최악인데 그나마 둘 다 성격이 발달되어 있으면 참고(다른 조건을 맞춰) 살 수는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사실인지 궁금한 분들은 한번 이 원칙을 적용해서 궁합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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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도움을 받지 않고 모든 걸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게 마치 어른으로 인정받는 전제 조건인 것처럼 인식되곤 합니다. 때로는 모든 사람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필요할 땐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설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해도 효율적인 일처리를 위해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겁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것 모두 숨쉬듯 자연스러워야 하는 거지요.
중요하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건 내 주변 사람들의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구원자 환상) 만큼이나 정신 건강에 해롭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건 주로 두 가지 문제 중 하나 때문에 나타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EP(Effortless Perfection) 때문입니다. 이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완벽해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남들처럼 밤을 새우지 않아도 반에서 1등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며 운동도, 노는 것도, 연애도 동시에 잘 해야 한다는 거죠. 그야말로 엄친아여야 한다는 건데 이런 엄친아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안 될 말입니다. 남이 나에게 신경을 쓰게 한다는 건 완벽함이 깨지는 그야말로 가오 상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체력이든 지능이든, 하다 못해 시간의 제약이란 게 있습니다. 무한대의 자원이란 건 없거든요. 그래서 도움을 받는 걸 끝까지 거부하면 결국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치러야 할 댓가는 어마어마하지요.
둘째, 역의존(Counter-Dependence) 때문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역의존은 의존하고자 하는 개인적 욕구를 거부하는 걸 의미합니다. 역의존을 유발하는 심리적 기제의 뿌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이고 다른 하나는 치명적 결함(Fatal Flaw)입니다. 전자는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인데 어찌 열등한 다른 인간에게 의존한다는 말인가'에 가깝고, 후자는 반대로 '나는 뭔가 치명적인 하자가 있는 인간이라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테니 괜히 민폐끼치지 말자'에 가깝습니다.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EP와 역의존 모두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부모님, 형제, 친지, 베프, 연인 등)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절대로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빨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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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상담을 하다 보면 자녀에게 엄마 또는 아빠가 필요하다며 이혼을 꺼리는 내담자를 만나게 됩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믿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 알고 보면 이혼의 두려움을 감추려고 자녀 핑계를 대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그냥 아빠가 아니라 좋은 아빠가 필요하다' 포스팅에서 저는 그런 분들에게 자녀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냥 아빠, 엄마가 아니라 좋은 아빠, 엄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쁜 아빠, 엄마는 부모의 존재가 주는 안심보다 자녀에게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치기도 하니까요.
이와 비슷하게 이혼을 하게 되면 편부, 편모 가정에서 자라는 게 자녀에게 낙인처럼 안 좋게 작용할까봐 이혼을 꺼리는 내담자도 많습니다. 이 역시도 이혼부, 이혼모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감추려고 자녀 핑계를 대는 게 아닌지 먼저 따져봐야겠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혼이 나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혼보다 부부 갈등이 자녀에게 더 해롭기 때문입니다. 심하게는 부부 갈등의 불똥이 자녀에게 튀어 학대 등 가정 폭력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런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부모가 싸우는 모습이 자녀에게 주는 심리적 고통감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싸우는 모습 자체가 주는 시각적, 청각적 폭력도 만만치 않지만 때로는 미성숙한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거나 자녀를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모의 갈등 자체가 자녀에게는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 갈등이 심한 가정의 자녀들이 신체화, 불안, 틱, 주의 집중 곤란, 강박 행동, 중독 행동 뿐 아니라 등교 거부, 품행 문제, 자해 등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고통감을 호소하는 겁니다.
부모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생활을 연장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혼 후 안정감을 주는 편부, 편모 가정에서 사는 게 자녀의 심리적 안정에 더 좋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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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I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 기질이 상극인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여러 차례 했습니다.
서로 상극인 기질은 정상적이라면 절대로 서로에게 끌리지 않지만 성격 역동에 의해 상극인 기질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에 끌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강박성(LHL)과 연극성(HLH)은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에, 반사회성(HLL)과 의존성(LHH)은 힘에 대한 끌림을 공유하기 때문에, 자기애성(HMH)과 뱀파이어(LML)는 'Self-centeredness'를 공유하기 때문에, '고립된-겁많은 기질(MHL)'과 '잘속는-영웅적 기질(MLH)'은 위험에 대한 예민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끌리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끌림은 각자 건강하게 발달하지 못한 성격이 기질을 조절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외부에서 충족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병리적인 끌림입니다. 그래서 끝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결혼을 전제로 한 진지한 만남을 가지려 한다면 TCI, MMPI 정도는 해서 심리적으로 건강한지, 기질 궁합은 맞는지 확인해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부부 상담이나 커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남녀 중 기질이 상극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그런 이야기를 못하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내용과 관련해서는 꽤 진지한 편입니다. 사주 궁합도 보고, 별점도 보고, 타로 카드점도 보면서 TCI, MMPI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도저히 TCI, MMPI를 하자고는 못하겠다면 최소한 그동안 자신이 실패한 연애들을 분석하는 일 정도는 하는 게 좋습니다. 뭔가 동일한 스타일의 사람에게만 끌리고, 그 끝이 항상 안 좋았다면 상극인 기질에 끌리는 문제일 수 있으니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이 문제 해결 없인 앞으로의 연애는 볼 장 다봤다고 봐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겁니다.
덧. 둘 다 건강한 성격이라면 상극인 기질끼리도 잘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실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서로에게 끌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고래족이 원숭이족에게 끌릴 리가 없으니까요(
'당신은 원숭이족인가, 고래족인가' 포스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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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재테크에 넣어야 할 지, 도박 중독에 넣어야 할 지 고민하다가 심리학 일반 카테고리에 넣습니다(응?).
돈을 버는 것, 돈을 쓰는 것은 저보다 뛰어난 분들이 많겠지만 저보다 오랫동안 돈의 의미에 대해 고민을 해 본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돈 문제라면 신물나게 경험하는 도박 중독자들을 15년 동안 상담하면서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돈 생각, 돈 이야기를 해왔거든요. 그래서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걸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많이 벌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췄는데 요새는 얼마나 많이 버는가 보다 얼마나 빨리 벌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파이어족이라는 개념이 유행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하지만 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중요한 순서대로 이야기해 보자면,
1. 나에게 돈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 돈의 의미
: 당연히 돈은 가치 저장 및 교환 수단인데 중요한 건 자신에게 어떤 (주관적인) 가치가 있느냐입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방패의 가치인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인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나에게 돈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으면 다음 단계부터 무너지게 됩니다. 안 무너질 도리가 없어요. 자신에게 돈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아무리 빨리 모아도 자신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돈은 독이 됩니다. 이 건 제가 상담했던 도박 중독 내담자가 자신의 경험담으로 해 준 말인데 100% 동의합니다. 당신에게 돈은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요?
2. 돈을 버는 목표가 무엇인가
: 당연히 돈의 가치와 관련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안전판이라면 자신의 기대 수명과 씀씀이를 계산해 보면 목표가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기 위해 돈이 필요한 사람은 아무래도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겁니다. 도박 중독자들은 돈을 따기 위해 도박을 하지만 왜 돈을 따려는지 구체적인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박의 끝이 없죠. 이러한 무한루프에 갇히면 답이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만 돈을 벌지 마세요. 내가 돈을 버는 구체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3.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 : 돈을 버는 수단
: 나에게 돈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고 돈을 버는 목표가 구체적이라면 그 다음은 방법론입니다.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돈을 벌겠다면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방법을 택하지는 않겠지요. 당연히 돈의 가치에 대한 명확한 생각 없이 돈을 벌고자 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면 돈의 가치를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4. 돈을 얼마나 많이 벌 것인가 : 돈의 양
: 드디어 얼마나 많이 벌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제일 먼저 생각하는데 가장 나중에 생각해도 됩니다. 나에게 돈이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떤 목표를 갖고 돈을 벌 것인지 생각이 정리되었다면 어떻게 벌 것인지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고, 이제 얼마나 벌 것인지만 결정하면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그 크기를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벌어서 그릇이 넘치면 그 돈은 썩게 됩니다. 역시나 독이 되죠.
그럼 돈을 얼마나 빨리 버는가는 안 중요하냐 하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4단계까지 정리가 되었다면 돈을 빨리 벌든 천천히 벌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목표 단계에 맞춰 적당한 속도로 돈이 모일 거라서 생각보다 늦게 모인다고 조바심이 날 일이 없고 빨리 모인다고 들떠서 목표가 흔들리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됩니다.
저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이런 저런 생각과 시도를 많이 해 봤지만 이 순서가 뒤바뀌면 결국 쓰라린 댓가를 치르게 되더군요. 가치관 정립 -> 목표 설정 -> 수단 정하기 -> 양 정하기 순으로 진행해야 뒤탈이 없습니다.
이미 사회 생활을 한 지 오래 되었고 실수도 많이 해서 늦었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돈에 대한 고민에 빠르고 늦은 것 따위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하시는 게 건강하게 돈 버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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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과연 이기적인가'라는 글에서 sociotropy와 autonomy의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sociotropy는 대인 관계가 중요한 성격 특질이고 autonomy는 독립성이 중요한 성격 특질입니다.
이를 오늘의 주제인 원숭이족, 고래족과 연결하면 sociotropy 특질이 강한 사람들은 원숭이족이고 autonomy 특질이 강한 사람들은 고래족입니다.
온라인 세상에서 사람들이 흔히 '고양이'과, '개'과로 나누는 것과 비슷합니다.
원숭이족은 그야말로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같은 원숭이들과 뭉쳐 다닐 때 힘을 얻고 의지가 되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희노애락을 집단 속에서 경험하는 걸 선호합니다. 같이 노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거나 버림 받는 게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위계 질서를 싫어하지 않고 비교를 성취 동기로 삼기 때문에 위로 올라가려고 하며 권력과 집단 지성을 믿습니다. 책임감보다는 연대 의식이 더 중요합니다. 인맥이 힘이므로 관리해야 하며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관계를 맺을 때도 깊이보다는 넓이가 더 중요합니다.
당신이 원숭이족이라면 착한 원숭이, 착한 원숭이 집단을 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숭이 무리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고래족은 이와 반대입니다. 관계를 맺는데 관심이 별로 없으며 혼자 있는 걸 선호합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고 집단의 안전보다는 자유를 더 좋아합니다. 희노애락은 집단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 속에서 경험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돌림이나 버림 받는 것에 대한 타격이 크지 않으며 오히려 자율성을 침범당하고 억압당하는 상황에 놓이는 걸 두려워합니다. 위계 질서를 혐오하며 비교를 싫어하고 다른 동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집단 지성보다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신뢰하며 연대 의식보다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대인 관계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관계를 맺는다해도 넓이보다는 소수와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걸 선호합니다.
당신이 고래족이라면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과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고래는 원숭이에게 관심이 없지만 원숭이는 무리지어 고래를 사냥할 수 있으니 적절한 거리를 둬야 합니다. 깊은 바다에 머무르세요.
원숭이족과 고래족은 둘 다 포유류지만 식생이 완전히 다릅니다. 먹는 것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릅니다. 관심 분야도 다르고 가치관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 각자의 세상에서 자신의 특질에 맞게 사는 것이 서로에게 행복한 길입니다.
모든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건 과잉 일반화일 수 있지만 그래도 굳이 나눠본다면 본인이 고래족에 가까운지, 원숭이족에 가까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어떤 종족인지 알고 나면 어떤 상황에서 왜 스트레스를 받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좀 더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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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무수히 많은 문헌과 선구자들이 있습니다. 방법의 가짓수가 그만큼 많다는 건 왕도가 없다는 말일테니 저도 제가 아는 한 가지 방법을 더하고자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라면 상담이나 심리평가 서비스를 이용할 리가 없으니 반대로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토대로 역추론하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발견한 불행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기질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질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주 양육자가 아닌 부모의 기질을 물려받아 이러한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은 주 양육자가 기질 수용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주 양육자와 똑같은 기질을 물려받았으나 주 양육자가 자신의 기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역시나 자녀의 기질을 수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본인의 기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부모나 사회가 강요한 기질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질은 혈액형처럼 노력에 의해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질은 깨닫고, 수용하고, 그에 맞춰 살아야 합니다. 기질대로 살지 않는 삶은 옷에 몸을 맞춰 사는 삶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멋지다고 칭찬해도 잘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편한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질에 맞지 않는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아래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TCI의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위험회피기질이 높다는 건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하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당연히 신체적, 심리적 안전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고 모든 행동 동기의 저변에 안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아버지가 성격을 개조한답시고 억지로 무술을 배우게 하고, 군 복무는 해병대에 지원하도록 강요하고,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외국에 MBA 유학을 보내 경영자 수업을 시킵니다. 이 아들은 과연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을까요?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TCI의 기회주의적-자유주의적 기질 유형(HML)인 딸이 있습니다. 자신과 똑닮았지만 말괄량이에 자유분방한 딸이 불안불안한 어머니가 딸을 조신하게 만든답시고 엄격한 기숙 고등학교에 집어 넣고, 여대 사범대에 진학시켜 여중 선생님을 만들고, 신부 수업을 받게 합니다. 이 딸은 과연 어머니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을까요?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기질은 분열성(LLL)입니다. 분열성 기질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에게 통 관심이 없는 겁니다. 건강한 분열성 기질은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는 대표적인 기질이 분열성이죠. 하지만 세상은 분열성 기질에게 은둔형 외톨이니, 사회 부적응자니 하는 딱지를 제멋대로 붙이고 그렇게 살지 말라며 억압합니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라도 하라고 집 밖으로 내쫓고, 연애라도 하라고 기질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과 소개팅을 주선하고, 인맥을 관리해야 한다고 동호회에 가입시켜봤자 분열성 기질에게 고통만 주는 겁니다.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사람은 안전을 추구하는 행동을 마음껏 하면서 살 수 있을 때, 기회주의적-자유주의적 기질 유형인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분열성 기질 유형인 사람은 다른 사람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을 때 행복합니다. 기질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기질대로 사는 건 자신의 몸에 딱 맞는 맞춤 옷을 입었을 때의 편안함을 평생 느끼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제가 분열성 기질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분열성 기질을 수용하고 난 이후 세상의 부당한 비난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습니다(그런 평가에 일체 신경쓰지 않는 것도 분열성 기질에 맞는 모습이죠). 그래서 지금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요.
그렇다면 기질에 맞지 않는 삶을 살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무수히 많은 심리평가 사례와 내담자를 만나서 내린 결론은 불가능하다였습니다. 무엇보다 기질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게 경제적 비용이든, 시간이든, 심리적 자원이든 간에 행복해지기 위해 활용되어야 할 것들이니 얼마나 헛된 낭비입니까.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더 어렸을 때 제 기질을 알았다면, 기질을 수용하고 세상의 부당한 억압에 맞서 제 자신을 더 잘 보호했더라면 지금보다도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 지금보다도 얼마나 더 멋진 삶을 살았을까하고요.
그래서 기질에 맞지 않는 거짓 삶을 억지로 살라는 세상의 강요에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는 각오를 더욱 더 다지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자신의 기질을 빨리 찾아서 그 기질에 걸맞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듯이 여러분도 자신의 기질에 부합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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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은 '먹는 방송'의 줄임말로 이제는 'Mukbang or Meokbang'이라는 신조어로 등재될 만큼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한류의 대표 문화 상품입니다.
먹방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시작하여 유행의 흐름을 따라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이 대세입니다. 모두 집단주의 문화의 대표 국가들이죠. 유교주의가 되었든, 공산주의가 되었든, 천황체제가 되었든 간에 집단주의 문화의 기본적인 특징은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한다는 겁니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면 개인의 욕구는 당연히 억압되어야 하죠. 게다가 세 나라 모두 경쟁이 매우 심한 사회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하면 도태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모는 어릴 때부터 자녀를 몰아부쳐야 합니다. 자녀가 바라는 애정을 충족시켜 줄 물리적, 심적 여유 따위가 없죠.
제가 일하는 영역에는 구강기 공격성(oral aggress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엄마의 젖을 먹으며 충분히 접촉하고 교류해야 충족되는 구강기의 욕구가 반복적으로 좌절되면 그로 인한 분노와 공격성이 누적되었다가 구강기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외부(outward)로 표출되면 침을 뱉거나 욕을 하고 논쟁을 하거나, 말이 많아집니다. 반대로 이러한 공격성이 내부(inward)로 방향을 틀면 술, 담배 등에 중독되거나 폭식을 하게 됩니다. 쌓인 분노와 공격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임상, 상담 영역에서 일하는 심리학자들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구강기 공격성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게 먹방의 유행과 전혀 상관이 없을까요?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왜 내가 아닌 남이 먹는 걸 지켜보는 게 좋은가요? 왜 음식에 대한 정보를 주거나 새로운 음식을 찾아서 즐기는 형태가 아니라 무식하게 많은 양을 복스럽게(또는 우왁스럽게) 입속으로 집어넣는 형태의 먹방이 더 인기를 끄는 걸까요? 누군가 입 속에 가득 음식을 넣고 우걱우걱 먹어치우는 걸 보면 묘하게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면서 시원하죠. 자신의 구강기 공격성이 해소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되니까요.
혹자는 혼밥 문화가 퍼지면서 먹방을 보며 밥을 먹으면 덜 외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던데 그것도 역시나 정서적 허기감 때문입니다. 정서적 허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혼밥이 부담스럽지 않거든요(물론 기질적인 특성 차이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먹방 유행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슬픕니다. 자라면서 충분히 부모의 사랑을 받고 구강기 욕구가 충족되어 남이 먹는 것을 관음하며 대리만족 할 필요가 없는 사회. 자신의 욕구를 돌보는 것이 이기주의로 박해받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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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supervision을 할 때 사례 formulation이 끝나면 항상 "질문 없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실제로 궁금한 게 있으면 답변을 할 테니 질문을 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물음에는 조금은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심리평가 supervision을 제대로 받는 법'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 지 모르는 사람은 앎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무엇을 모르는 지 알려면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 없습니까?"라는 제 물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어봤냐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질문이 없습니다. 그건 단순히 수검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심리평가, 상담,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아예 심리학에 입문하지 않았을테고(권력과 재력을 목표로 심리학을 전공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정도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는 성공하기 힘들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결국은 호기심의 문제입니다.
저보고 심리학을 전공하고, 임상/상담을 전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단연코 가장 중요한 게 호기심이라고 답변할 겁니다. 과장을 조금 섞어서 말씀드리면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이 쪽 영역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호기심이 없다면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을 것이요,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니 아무리 우수한 지적 능력이 있다해도 실력을 쌓기 힘들 것이고, 실력이 없다면 내담자/수검자를 돕지 못할 것임은 물론 일하는 것 자체가 지옥 같을테니까요.
TCI의 자극추구기질 중 '탐색적 흥분' 하위차원이 높은 분이라면 타고난 호기심을 장착하고 있을테니 복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큰 문제 없습니다. 영장류의 DNA와 많은 부분이 겹치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장착된 호기심의 양만 해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문제는 그게 작동하는 분야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질, 적성과 잘 맞는 분야를 찾아야 하는 것이고요.
자기와 잘 맞는 분야를 찾기만 하면 그 호기심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당장 저만 해도 탐색적 흥분 하위차원이 -1 표준편차 이하로 낮은 편입니다. 그러니까 관습적 안정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래도 저는 심리학, 여행 관련해서는 무한 호기심이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누군가는 음식에, 누군가는 음악에, 누군가는 운동에, 누군가는 프라모델 분야에서 호기심이 남다를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호기심이 작동하는 영역을 잘 찾으신 뒤 그 호기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질문의 홍수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아무런 호기심도 생기지 않고 그래서 질문할 거리를 전혀 찾지 못한다면 안타깝지만 이 영역은 본인과 맞지 않는 것이니 빨리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버텨봤자 그 끝은 그리 신통치 않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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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포스팅과 연결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이야기인 것처럼 읽힐 수 있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싫어하는 것을 피하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좋아하는 걸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싫어하는 게 뭔지는 누구나 아는 것이니 싫어하는 것만 적극적으로 열심히 피하기만 해도 중간은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인생이 행복해지기는 어려워도 불행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일, 사람, 취미 등)을 모르는 상태에서 싫어하는 것만 열심히 피한다고 해서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싫어하는 걸 피하겠다고 마음 먹는 건 대개 어른이 된 후, 그러니까 소위 머리가 굵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이미 사회화에 의해 필터가 오염되어 있고, 필터가 오염되어 있으니 그 필터를 통해 들어온 내용물 자체가 이미 오염되어 있거든요.
물이 오염되어 있을 때 새로운 오염물이 들어오는 것도 막아야 하고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것도 해야 하지만 오염된 물을 퍼내기만 하면 수량 자체가 줄어들어 오염 농도가 그대로인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정수된 물을 유입시켜 농도를 묽게 만들어야 빨리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죠.
본인의 인생이 현재 그냥저냥, 고만고만한 수준이라면 싫어하는 걸 아무리 제거해도 남은 게 만족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싫어하는 걸 피하는 것(새로운 오염 물질의 유입을 최대한 막고 기존에 오염된 물을 퍼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걸 적극적으로 찾아서 인생의 pool을 최대한으로 늘려야(깨끗한 물을 유입시키는 것) 인생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좋아하는 걸 어떻게 찾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굉장히 많은 포스팅을 했으니
'진로 적성 코칭의 모든 것' 포스팅에 연결된 글들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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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이 넘은 포스팅이기는 합니다만 예전에
'H.A.L.T.는 도박 중독에도 해롭다' 라는 포스팅에서 H(Hunger), A(Anger), L(Loneliness), T(Tiredness) 상태에서는 도박 충동이 증가할 수 있으니 즉각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굳이 도박 중독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배고픔, 분노, 외로움, 피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신체적, 심리적 상태이므로 최우선해서 다루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여기에도 외로움이 등장할 만큼 현대인은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서러움보다 외로움이 더 뼈에 사무친다고 하는 사람도 있죠. 그러면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는 걸까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까요?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정 반대입니다. 외로움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외로움은 정서적 결핍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외로운데 어머니가 보고 싶고, 어머니의 품이 그립고, 어머니가 해 주시는 따뜻한 밥이 먹고 싶다면 그건 외로움이 아니라 향수병일 수 있습니다. 향수병은 그리움을 채우면 해결됩니다. 하지만 어떤 대상인지는 상관없고 누구든 만나야지만 외로움이 해결될 것 같다는 강한 갈증을 느낀다면 그건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든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이기 때문에 밑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이 외로움은 정서적 결핍을 해소해 밑빠진 독의 구멍을 메워야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그러니 왜 밑이 빠졌는지, 왜 이런 정서적 결핍이 생겼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오히려 그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혼자서 들어가기 무섭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고요.
정서적 결핍이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리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그리움의 대상을 만나면 곧바로 채워집니다. 하지만 정서적 결핍은 그렇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 관계라는 건 결국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주고 받는 게 금전이든, 관심이든, 우정이든 말이죠.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면 그 댓가로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줘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다 보면 결국은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 채워주지 못하게 됩니다. 균형이 맞지 않거든요. 그래서 항상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역기능적인 관계를 반복하게 되죠.
만약 외로울 때마다 만날 사람을 절박하게 찾았고, 그렇게 만난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게 어렵다면 외로움의 뿌리에 정서적 결핍이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정서적 결핍이 사라지고 나면 설명이 안 되는 외로움은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고 혼자 살아도 편안하고 즐겁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그 때가 사람을 만나도 되는 시기입니다. 나도 편안하고 상대방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런 상호호혜적인 우정,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시기요.
그래서 이 글의 제목처럼 외로울 때 만나지 말고 외롭지 않을 때 만나야 합니다. 외로울 땐 자신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왜 외롭다고 느끼는지 말이죠. 그건 외로움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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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이 포스팅을 '심리학 일반' 카테고리에 올리기는 하지만 주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기반한 것이고 심리학과는 거의 상관이 없으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읽으세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어지면 악한 사람들이 더 활개를 치기 때문에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끔찍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겁니다. 그래서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중요하죠. 제 생각에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경험을 많이 해 보는 방법
: 소위 몸으로 때우는 방법인데 경험을 많이 하면 그만큼 경험치가 쌓이고 그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연애를 잘 한다는 건 자신에게 맞는 좋은 사람과 사귀게 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연애를 많이 해 보면 자신과 맞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길러지게 되니까요.
하지만 이 방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경험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초보일 때 극악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거든요. 아무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암벽 등반에 도전할 때 장비부터 짊어지고 무턱대고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거나 최소한 동호회라도 가입하여 선배 고수를 눈동냥하죠.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람을 좋아하는 기질의 소유자라고 해도(그렇다면 더더욱) 사람 만나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열 명이 괜찮았어도 한 명이 psychopath라면 엄청난 trauma를 경험할 수 있고 심하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2.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당연히 좋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거든요. 사실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저절로 알게 되는 것에 가깝지만요. 정확하게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알게 되는 겁니다만. 이와 비슷한 의미로 포스팅했던
'화분이 쓰레기통과 어울릴 수 없는 이유'라는 글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쓰레기통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화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그 사람과 자동으로 친하게 되거나 사귀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건 또 다른 영역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최소한 나쁜 사람과 엮여서 사기 당하거나 마음 상하는 일은 없어집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거지요.
그렇다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데 바로 위 '화분이 쓰레기통과 어울릴 수 없는 이유'와 그 포스팅에 링크한
'쓰레기통을 비우지 말고 화분을 가꿔라'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변의 쓰레기통부터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자신을 철저히 외롭게 만들고 남는 시간에 자신과 최대한 많이 대화해야 합니다. 산책을 하든, 명상을 하든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야 하는 거죠. 혼자 하기 어렵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어쨌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목표와 가치관, 태도가 정립되게 될텐데 그런 실존적인 영역이 정리되면 더 이상 쓰레기통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정리해 보자면, 주변의 쓰레기통을 최대한 치워라(이 때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마음이 불편한 건 무조건 멀리해야 함), 철저히 혼자가 되어 외로움과 익숙해져야 한다,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야 한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그 다음은 모든 게 자동으로 정리가 될 겁니다. 자신이 꽃이 되고 나면 절대로 똥파리가 꼬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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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는 것 만큼이나 사람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한다고 믿었던 그것이 정말 원하는 것이 맞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걸 알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 매진할 수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과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생각으로? 마음으로? 분석을 통해서?
예를 들어,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해 보죠. 그런데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인지, 공부가 힘들어서 그림으로 도망가고 싶은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좋아서 그림에 매진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까요? 혹은 부모님이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니 파괴적 관심 끌기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더욱 그림 그리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또 어떻고요. 정말 구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심리학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심리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은 왜 심리학 공부를 그렇게나 하고 싶을까요? 사람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끌려서? 심리학 분야가 유망하다고 해서? 심리학 지식을 많이 알면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으니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어서 심리학으로 치유하려고? 역시 쉽지 않습니다.
대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진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 따져 볼 것'
이건 제가 도박 중독과 관련하여
'도박을 그만둘 수 있다면 무엇까지 버릴 수 있는가 : 상담자용'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린 내용의 변형입니다. 위의 글에서 저는 '이 고통스러운 도박 중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까지 버리실 수 있나요? 혹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통해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 측정하는 건 쉽지 않지만 그걸 위해서 무엇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면 의외로 그 간절함의 정도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예로 돌아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은 청소년이 그 꿈을 위해서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할 때와 그 꿈을 위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좋다고 할 때를 비교해 보면 대번에 그 간절함의 정도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꿈을 위해서 평생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감수하겠다거나, 평생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외롭게 살게 되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건 어떤가요. 그 절절함이 느껴지시죠?
원래 인간은 손해를 싫어합니다. 손해를 피하려는 동기가 가장 강력하죠. 그러니 어디까지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간절함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본인이 추구하는 목표, 꿈, 물질, 사람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걸 위해서 어디까지 포기하고 희생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어렵지 않게 알게 되실 겁니다. 저는 이 방법을 통해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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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동안 심리학을 공부하고 내담자를 상담하면서 배운 것들과 그것을 제 삶에 접목해 변화된 내용을 바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 의미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느낀 내용을 여러 차례 포스팅 해 왔습니다.
순서는 포스팅한 순서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바로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을 경계하고 피하라는 겁니다.
익숙한 건 편안합니다.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고 실패할 확률도 적으며 주변을 봐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선택을 하니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익숙함을(다른 말로는 매너리즘을) 피하고 낯선 것을 일부러 시도해야 합니다.
이건 제가 늘 말씀드리는 '기질대로 살아야 행복하다'는 모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사람이라면 안전을 위해 모험을 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기질에 부합하는 것 같으니까요. 사회적민감성 기질이 낮은 사람이라면 사람을 피하는 삶을 사는 게,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는 삶을 사는 게 행복한 삶이 아닐런지요.
그럼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사람은 모든 도전 과제를 피하고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만 하면서 무능하게 살아야 하고 사회적민감성 기질이 낮은 사람은 모든 대인 관계를 피하고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자극추구기질이 높은 사람은 무조건 남들이 피하는 위험하고 자극적인 것에 도전하면서 살아야 행복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입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TCI 기질 유형은 LLL입니다. 분열성(Schizoid) 기질이죠. 분열성 기질은 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민감성 기질이 모두 낮기 때문에 모험과 불확실한 것과 대인 관계를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제게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은 그야말로 모범생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 열심히 공부했고, 다행히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가 나쁘지는 않아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싫어도 인간의 심리를 공부하는 건 재미있어서 심리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대학원을 나와 수련을 받으면서도 소수의 인간만 (피상적으로) 상대하면 되었기에 제게 맞는 삶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2003년에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고, 그 비행기를 타고 생애 최초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 여행이 제 첫 해외 여행이었습니다. 지금은 반려자가 된 당시 여친의 강권에 의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시작된 뉴질랜드 여행이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후 자극추구기질이 낮아도 제가 좋아하는 영역에서는 열정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여행은 코로나로 세상이 멈춘 2020년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2004년부터 지금까지 17년 째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 8월 4일 현재 포스트의 갯수는 5,000개를 넘어 5,042개에 이릅니다. 이 열정이 언제 사그러들지 저도 모릅니다. 진행형이니까요.
또한 위험회피기질이 낮아서 매사가 귀찮아도 때로는 모험을 감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40년의 잡식 생활을 청산하고 비건이 되었으며 15년 동안 다녔던 직장을 그만두고 독립을 했습니다.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사람 만큼이나 낮은 사람도 안전을 중요시하는데도(목적은 다르지만 극과 극은 통하니까요)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수 있더군요.
사회적민감성 기질이 낮아서 사람을 싫어하지만 거리만 적절히 유지할 수 있다면 접촉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사람들이 강제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지금 저는 오히려 미니 강의와 supervision을 비대면으로 확대하여 코로나 이전보다 더 바쁘게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에는 부정적인 것을 영속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 '튀지 마라', '남들 하는 만큼만 해라', '남에게 밉보이지 마라' 등등등. 이런 생각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타인이 부여한 제도, 관습, 전통, 학습의 결과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면 역설적으로 자신의 기질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익숙함을 피하고 낯선 것을 일부러 시도해야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요. 김밥 천국에 갈 때마다 원조 김밥을 먹었다면 샐러드 김밥이나 누드 김밥을 먹어보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매일 '아아'를 마셨다면 아이스 라떼나 아이스 모카를 마셔보는 것도 좋겠지요. 물론 새로운 시도는 별로일 확률이 더 큽니다. 원조 김밥을 먹고 아아를 마셨다면 최소한 안전한 선택이니 기본은 할테니까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런 익숙한 선택은 그만큼의 행복만 보장합니다. 우리는 그런 뻔한 행복만 누리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닙니다.
여행을 가서도 한국 식당만 찾아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잘못된 건 전혀 아니지만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안타깝게 놓치는 겁니다. 새로움에는 당연히 잦은 실패가 따르지만 딱 한번의 대박 경험이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한번에 날려버릴 충격적인 행복감을 제공합니다.
제게는 2003년 뉴질랜드 여행이 그랬고, 2011년 비건이 된 것이 그랬고, 2018년 직장을 나와 독립을 하게 된 것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제 50년의 익숙한 도시 아파트 생활을 접고 전원 주택 짓기를 시작합니다. 제 인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을 따르지 않고 세상이 제게 주는 기회와 즐거움을 잡겠습니다. 그게 행복의 길이라는 걸 아니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타인이 부여하는' 익숙함을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과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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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받으려는 많은 내담자들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별 일도 아닌 이런 정도의 일로 상담 씩이나 받아도 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담자일수록 보고하는 내용을 들었을 때 상담자가 느끼는 건 '대체 이렇게 힘든 데 어떻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대체 이런 gap은 어떻게 생기는걸까요.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도움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도움을 주는 것은 능력과 이타성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도움을 받는 건 역의존성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상담자가 내담자를 돕는 건 공부와 수련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문성과 조금의 소명 의식만 있으면 되지만 상담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생판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을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담을 받는 내담자들은 정말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뭔 용기까지 필요하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그건 지금 받은 도움을 당연히 언젠가 돌려줄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과 내가 도움을 청하면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형성한 건강한 분들(물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이기주의자들은 예외입니다만)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내담자들이 역의존성(conter-dependence)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역의존성은 간단히 말해서 남에게 아주 간단한 것도 의존하고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형편없는 자아상과 바닥을 친 자존감이 깔려 있습니다. 역의존성은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핵심 신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기대했던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생기기 쉽구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지만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받은 상처 때문에 역의존성이 생기고, 상처를 치유해야 하지만 역의존성 때문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그래서 상처가 덧나서 더 심해지는 악순환을 겪게 됩니다.
그러니 상담자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자신의 역의존성을 넘어설 용기를 냈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겁니다. 그 상담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런 용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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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먼저 들겠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사례 두 가지를 보시죠.
1. 아버지가 무능한데다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합니다.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할 어머니가 없어 자녀들은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2. 아버지가 무능한데다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합니다.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할 어머니가 없어 그 역할을 조모가 대신합니다. 조모는 며느리 보기 민망하고 아이들이 안쓰러워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허용하게 됩니다. 일하느라 집에 늦게 돌아온 어머니는 생활 습관이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보고 잔소리를 하다 나중에는 큰소리도 내고 체벌도 하게 됩니다.
1번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우느라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그 역할을 어머니가 대신 하게 되어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죠. 동일시 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실 상 부재한 상태이니 상담자 입장에서는 방임의 부정적 영향만 다루면 됩니다(그게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가 명료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2번의 경우는 조모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 하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고(조모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려고 하니 역할 혼란이 생기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장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조모가 망쳐놓은 걸 바로잡기 위해 아버지의 훈육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역시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하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집은 조모가 수행하는 good mother role과 어머니가 수행하는 bad father role이 충돌하게 되어 자녀에게 혼란을 주고 이 때 대부분 무조건 오냐오냐 하는 할머니에게 밀착되어(자신들에게 득이 된다고 믿으니까요) 가장의 역할을 감당한 죄(?) 밖에 없는 어머니와 갈등이 격화됩니다.
굳이 불안정 애착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1번 상황은 회피형 애착 유형에, 2번 상황은 혼란형 애착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당연히 혼란형 애착 유형이 자녀가 경험하는 주관적 고통감도 크고 개입도 어렵습니다.
1번과 2번 모두 자녀에게 좋지 않은 환경인 것은 분명하나 굳이 문제의 심각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의 용이성 관점에서 보면 1번 상황보다 2번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바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을 어설프게 떠맡는 게 훨씬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역할을 어설프게 수행할 바에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건 굳이 부모 뿐 아니라 모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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