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주를 중요시하는 DSM 체계 같은 정신병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울과 불안은 확연히 구분되는 별개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울 장애냐 불안 장애냐의 변별 진단을 위한 이분법을 사용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우울 장애는 항우울제를 투여하고 불안 장애는 항불안제를 투여하는 식으로 접근하게 되죠.
하지만 상담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죠. 저는 MMPI-2/A를 활용할 때 code pattern 분석을 거의 하지 않고 권하지도 않지만(사실은 code pattern 분석을 적용할 수 있는 내담자가 거의 없다는 게 정확한 워딩이지만요) 다음과 같은 code pattern을 보이는 내담자가 있다고 해 보죠.
2-7 or 2-7-0
흔히 병원 장면에서는 주요 우울 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 내지는 우울 장애(Depressive Disorder) 진단을 받게 되는 code pattern입니다. 그런데 왜 2번 단독 상승 또는 2-0 code pattern이 아닌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대체 7번 척도는 왜 상승하는거야? 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게 저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7번 척도는 특성 불안이고 이건 TCI의 위험회피기질과 상관이 높은데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 중 상당수가 위험회피기질이 높으니 그런 게 아닐까요?"라고 설명하실 수 있습니다. 정확한 현상 파악과 지적이죠. 하지만 그게 말이 되려면 7, RC7, NEGE 척도처럼 특성 불안을 반영하는 척도만 상승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런 경우 ANX, A처럼 상태 불안을 평가하는 척도도 함께 상승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7, 2-7-0 code pattern이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수검자에게 우울 장애가 발병했을 때를 시사하는 게 아니라는거지요.
서론이 길었는데 상담에서는 우울과 불안이 확연히 구분되는 전혀 다른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spectrum처럼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불안 ----------> 우울
이런 식으로 불안이 먼저 나타나고(또는 특성 불안이 원래 존재하고), 이러한 불안이 조절되지 않으면(성격 미발달 문제 등으로 인해) 점차 우울로 이환되는 것이죠. 여기에 인지삼제(cognitive triad)가 우울로 이환되는 속도에 영향을 미치고 우울에 취약한 성격 병리(INTR, 위험회피기질 중 '예기불안' 하위차원이 높음)까지 있다면 더더욱 우울로 이환되는 확률이 증가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보는 2-7, 2-7-0 code pattern은 정확하게는 7번 단독 상승이나 7-0 code pattern으로부터 시작해서 ANX, A 상태 불안 척도들이 상승하고 거기에 OBS 척도 상승으로 인해 escalation 되다가 최종적으로 2, RC2 척도가 상승해 2-7, 2-7-0 code pattern에 이르는 경로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2-7, 2-7-0 code pattern은 항우울제만 처방해서는 증상 완화가 잘 안 되고 항불안제나 신경안정제를 복합 처방해야 어느 정도 증상 관리가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럼 왜 7번 단독 상승이나 7-0 code pattern을 보이는 내담자가 없냐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7번 척도는 특성 불안이라 위험회피기질과 상관이 높고, 0번 척도는 그야말로 성격 척도라서 사회적 민감성이 낮은 기질들, 예를 들어 LHL, MHL과 같은 기질 유형들에서 상승하기 때문에 증상이라기보다는 기질 차원에서 이해가 되니 내담자 스스로도 크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아서 상담을 받으러 나오지 않아서 보기가 힘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2-7, 2-7-0 code pattern을 보시면 순수한 우울(?)보다는 우울과 불안이 혼재하는 Mixed Anxiety & Depressive Disorder 진단에 부합하는 내담자라고 가정하시는 게 안전한 접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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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MMPI-2/A 실전 해석' 미니 강의에서는 다른 임상 척도와 달리 7번 척도가 단독 상승한 경우(특히 RC7 척도도 함께 상승했을 때)에도 강박성 성격 장애를 가장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있죠.
여기까지 보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3번 척도가 단독 상승해도 강박성 성격 장애를 의심해야 하고 7번 척도가 단독 상승해도 강박성 성격 장애를 의심해야 한다면 대체 두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
3번 척도가 단독 상승했을 때와 7번 척도가 단독 상승했을 때 모두 강박성 기질 또는 강박성 성격 장애를 의심해야 하지만 두 강박성 기질(또는 강박성 성격 장애)은 특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3번 척도와 7번 척도의 속성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다음처럼 말이죠.
3번 척도 : 관심을 요구함
7번 척도 : 타고난 불안
다음으로 TCI에서 강박성 기질은 LHL 유형입니다. 대부분의 강박성 기질군이 그렇듯이 위험회피기질이 높은 것이 특징적이죠.
3번 척도의 상승에 반응하는 강박성 기질은 관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지자를 확보했다면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사회적 민감성이 낮기 때문에 안전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관심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관심을 받는데 유리한 성격 유형, 예를 들어 LHL(의존성), LHM(복종적인), LML(모방하는) 유형으로 발달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이마저도 실패하여 LLL(침울한), LLM(미성숙한) 유형에 머무르는 경우는 다양한 관심 끌기 전략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신체화 관련 척도(1, RC1, HEA, A-hea 등)들이 상승하지 않는 지 확인해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이와 달리 7번 척도의 상승에 반응하는 강박성 기질은 불안을 야기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무엇이냐는 위험회피기질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낯선 사람에 대한 수줍음' 등의 하위차원을 살펴봐야겠죠. 상담이나 심리평가를 받으러 오는 시점은 이러한 불안 야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으므로 ANX(A-anx), A 등 상태 불안 척도들이 함께 상승하여 불안 척도군이 모두 유의미한 모습을 보이기 쉽습니다.
정리해보자면,
3번 척도 상승의 강박성 기질은 관심을 받아서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 유리한 성격 유형으로 발달하거나 신체화 기제 등을 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음.
7번 척도 상승의 강박성 기질은 특히 불안 수준이 높은 것이 특징적이므로 불안을 야기하는 상황을 탐색하고 상태 불안이 높다면 이를 낮추는 방향(환경 재구성 또는 완화 전략)으로 초기 개입을 하는 것이 유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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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PI-2/A가 현존하는 자기보고형 검사 중 의식적인 수준에서 다양한 심리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심리검사 도구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특히 심리 상태의 다양성과 반응 신뢰도까지 측정한다는 면에서 비교 불허의 검사도구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MMPI-2/A에도 단점은 있는데 현장 임상가들이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건 불안 관련 척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MMPI-2를 기준으로 불안 관련 척도는 7(Pt), RC7, NEGE, ANX, A, 이렇게 5개입니다(MMPI-A는 RC7이 빠져서 4개). 이 중 7, RC7, NEGE는 기질/특성 불안을 측정하고 ANX, A척도는 상태 불안을 측정하죠.
문제는 임상 척도인 Pt척도도 그렇고, 내용 척도인 ANX도 그렇고 소척도가 없어서 연결 분석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Pt, ANX 척도가 상승했을 때 상승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소척도 내용을 살펴볼 수가 없는거지요.
전체 정신장애군 중 불안장애 spectrum이 가장 넓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상당히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검자의 불안 수준이 높다는 건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에 의해, 어떤 증상을 경험하는지 알려면 예상되는 장애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불안 관련 자기보고형검사를 추가 실시해야 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늘은 상태 불안을 측정하는 ANX(A-anx) 내용 척도와 A 보충 척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불안(ANX, A-anx)
: 걱정, 근심, 주의집중 곤란, 수면 곤란, 의사결정의 어려움, 강박 증상, 신체 증상, 불안정감 호소
* 불안(A)
: 마음이 편치 않음. 전반적인 심리적 부적응, 불행, 비관, 자신감 결여 호소
명칭이 동일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척도 공히 '불안' 관련 내용을 측정합니다. 하지만 두 척도가 측정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안(ANX, A-anx) 내용 척도는 주의 집중 및 수면 곤란 등 신체적 증상이 주를 이루는 불안 증상을 측정합니다. 높은 점수는 'stressed out' 상태를 평가하기 때문에 'panic state'와 가장 가까운 척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척도가 높게 상승하면 소위 '멘붕' 상태에 빠진 건 아닌지 고려해야 합니다. ANX(A-anx) 척도가 높게 상승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얼어붙게(freezing) 됩니다.
불안(A) 보충 척도는 'situational distress'와 'maladjustment' 상태를 반영하기는 하지만 외부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불안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스트레서 요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할 때에 느끼는 불안을 측정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A 척도가 높게 상승하는 사람은 수동적인 자세로 뒤로 숨고, 피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위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ANX(A-anx) 내용 척도 : 신체적 불안 증상 측정, panic 관련(멘붕 상태), freezing
* A 보충 척도 : 자신의 대처 무능력을 감지 했을 때 느끼는 불안 측정, 뒤로 물러나 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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