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덴 3에서도 몇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 검사가 끝난 뒤 원자료를 늘어놓고 뒤적거리면서 퍼즐 맞추듯이 case formulation하는 것만큼 비효과적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임상가들이 여전히 이런 방식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한 5년 쯤 전에 의뢰 사유를 확인하고 가설을 설정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참조)이 있었죠.
그런데도 여전히
수검자가 호소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진단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생님들이 많더군요.
제가 볼 때 이 문제는
증상을 바탕으로 세운 '1차 가설'과 심리평가를 통해 검증해야 하는 '2차 가설(진단 가설)'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고,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밖에 나가는 것도 힘든 상태이며 어릴 때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고 최근에는 누군가 내 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호소하는 20대 여성을 평가한다고 해보죠
증상을 바탕으로 한 1차 가설(증상을 보았을 때 평가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가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Social Phobia :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면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고 피하게 된다(당황스럽다, 불안하다?).* Avoidant PD :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람들을 피해 왔다(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SPR, prodromal stage : 밖에 나가지 않고 최근에 누군가 내 욕을 하는 느낌이 든다(social withdrawal, idea of reference or auditory hallucination).* Adjustment Disorder, chronic state : 어릴 때부터 그런 증상이 시작되었다(identifiable stressor?). * Delayed PTSD : 시선 공포가 있다(비난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guilty feeling?)
등등
1차 가설은 수검자의 주 호소(chief complaint)를 통해 세우는 것으로 숫자가 많아도 상관 없고 틀려도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가설을 많이 세울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어차피 가설 검증 과정에서 배제될테니까요. 1차 가설 설정에서는 정확성보다는 가능한 한 많은 가설이 포함되는 것에 치중하세요.
그런데 심리검사 결과를 갖고 이 많은 1차 가설을 몽땅 검증하려고 하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뿐더러 검증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해서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단을 내리기 위한 2차 가설로 추려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변별 진단을 위한 추가 정보를 수집하는 겁니다.
위의 보기로 다시 돌아가서
* Social Phobia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그런지 낯선 사람들에게만 그런지(대상의 일반화 가능성 확인)* Avoidant PD의 경우 창피나 거절을 당한 과거 경험과 그런 경험의 반복 여부(지속성)* SPR, prodramal stage의 경우 persecutory ideation, auditory hallucination 여부(사고 장애 유무 확인)* Adjustment Disorder, chronic state의 경우 가정 및 학교 생활에서의 부적응 유무(malfunctioning)* Delayed PTSD의 경우 sexual history 및 eating problem 확인
등을 추가 면담, chart 및 clinical history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1차 가설 중 몇 개가 탈락하게 되고 좀 더 가능성이 큰 소수의 진단 가설(2차 가설)로 추려지게 되죠.
이제 추려진 몇 개의 진단 가설을 드디어 심리검사 결과를 통해 검증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1차 가설을 검증하지 말고 일단 2차 가설로 한번 더 추려낸 뒤 심리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2차 가설만을 검증하시면 좀 더 효과적인 case formulation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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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전문가 자격 취득을 위한 마지막 과정 중 하나로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레지던트들의 치료 사례 발표회가 연구회, 지회 별로, 또는 전체 학회 차원에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표할 치료 사례를 supervision하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포스팅합니다.
제가 수련을 받을 때에도 그랬지만 가져온 치료 사례를 보니 온갖 특이한 장애와 기법이 난무하더군요. Eating Disorder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고 Avoidant PD 정도는 되어야 하고 기법도 요새 유행하는 ACT, 마음챙김명상 등은 써 줘야 치료 좀 했다고 한답니다.
뭐 좋습니다. 평소에 워낙 심리치료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보니 이런 자리에서나마 특이한 장애와 치료 기법을 맛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지요.
그런데 말이죠.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레지던트를 위한 치료 사례 발표회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요? 그것부터 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전문가가 되어 현장에 나가서 치료를 하게 될 때 꼭 갖추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치료 기법과 지식이 제대로 숙련되어 있는지를 점검하는 자리 아닌가요? 그렇다면 가장 흔하면서도 현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점검하고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야지 왜 현장에서 보기도 힘든 특이한 장애와 기법을 시험하는 시험장으로 사용합니까?
토론자로 나온 전문가조차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특이한 사례를 갖고 토론하면 없던 전문성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답니까?
학회에서도 레지던트마다 특이한 사례를 발표하려고 하면 토론자 섭외하는데에도 곤란하지 않나요?
특이한 사례와 기법은 전문가 사례 회의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자면 전문가 사례 회의부터 부활시켜야 하겠지만요. 이 또한 참으로 요원한 일입니다.
임상심리전문가 수련과정의 치료 사례 발표회에서는 '왕따당해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여중생', '삶의 의욕과 목표를 잃은 기러기 아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해 진로를 고민하는 대학생'처럼 너무나 흔히 볼 수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한 문제 사례를 중심으로 어떻게 초기 면담을 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구조화하는지, 어떻게 라포를 형성하는지, 치료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목표 달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종결은 어떻게 하는지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치료의 맥을 제대로 짚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물론 치료 사례 발표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심리치료 교육에 대한 틀을 제대로 짜는 것이겠지만요.
치료 사례 발표회가 계속 특이 장애와 기법의 시험 발표장으로 유지된다면 실속은 하나도 없고 임상심리전문가 레지던트의 부담만 가중하는 요식 행위로 전락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덧. 그리고 아무리 수가 적더라도 토론자는 자신이 직접 상담과 치료를 하는 전문가만 섭외하세요. 병원에 있는 전문가라고 모두 상담과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레지던트들에게 등 떠밀고 심리평가마저 게을리하는 전문가가 얼마나 많은데요. 발표를 하는 레지던트보다 사례를 접한 경험이 더 적은 토론자가 떡하니 앉아있는 것을 보면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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