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 라스베가스 시즌 2의 23화는 외모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으로 인해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신체형 장애의 일종인 신체 변형 장애에 걸린 모델이 등장하죠.
신체 변형 장애의 필수 증상은 '외모의 결함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결함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상의 것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체 변형 장애 환자들은 거울이나 반사하는 표면에 자신의 '결함'을 비쳐보는 행동을 하면서 하루의 상당한 시간을 보냅니다. CSI 드라마의 '애슐리'는 하루에 3시간 이상씩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쳐보면서 지낸 것으로 나옵니다.
이 장애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강렬한 심리적 고통을 경험하는데 대개 신체적 결함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결함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느라고 삶의 대부분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에는 심한 사회적 고립을 초래하게 됩니다.
CSI 드라마의 모델은 자신의 결함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자신의 얼굴을 잡아뜯어 훼손함으로써 영원한 집착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신체 변형 장애 환자들은 끊임없이 가상의 결함을 교정하기 위해 성형 수술을 비롯해 다양한 의학 기술에 끊임없이 의존하지만 결함에 대한 집착은 점점 강해지고 거기에 수반되는 정신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신체 변형 장애는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인간 세상에 울리는 경종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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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인기있는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 시즌 1의 20화를 보면 청각 장애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CSI 요원들이 정황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피해자가 다녔던 청각 장애인 학교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요원들은 원활한 면담을 위해서 수화 통역자를 데려가는데, 여자 교장이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수화 통역자를 데려왔다고 화를 벌컥 내면서 청각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겠다면서 CSI 요원을 쫓아냅니다. 결국 수화를 할 수 있는 '그리썸' 반장이 교장에게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증거 수집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교장은 학생들을 변호하기에 급급하기만 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용의자(결국은 가해자로 밝혀집니다만)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조사실에 난입해 용의자에게 폭언을 퍼붓습니다.
물론 청각 장애인으로 살면서 겪었을 냉대와 무관심,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다고(당사자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수화 전문가를 데리고 간 CSI요원도 오버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내쫓는 편협한 태도는 청각 장애인 학교의 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취해서는 안될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CSI요원이 교장을 독순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으로 착각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된 행동일까요?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죄로 판정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어디로 갔답니까? 결국 그 용의자는 가해자로 밝혀졌지만, 만약 가해자가 아니었다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난입해 저주의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손상된 그 사람의 자존심과 사회적 명예는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합니까? 정상인이니까 네가 그냥 이해하고 참아라?
중간에 그리썸 반장과 교장이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교장이 "당신은 우리를 이해하는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정말 고소를 금치 못하겠더군요. 수화를 할 수 있으면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는건가요? 그리썸 반장은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수화를 배운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배웠을 뿐이었죠.
저는 이 모든 몰이해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사실 위의 일화에 나오는 교장은 오히려 청각 장애인과 정상인은 다르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청각 장애인은 정상인과 분명 다릅니다. 굳이 통계적인 개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 이유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 없이 청각 장애인은 보통 사람들에 못미치는 청력을 가지고 있고 일상 생활에서든, 직업 생활에서든 현실적으로 분명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 똑같은 인간인데 무엇이 다르냐며 주장하는 것은 얼핏 보면 평등의 기치를 높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을 조장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변화를 반기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다르지 않다는 주장은 변화가 필요없다는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악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도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소수가 적응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일축하게 마련입니다.
일단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나서 그 다름이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상인을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식의 피상적인 해결 방안은 앞으로도 대답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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