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다 읽느라고 몇 달이 걸렸습니다만 사실 앤드루 솔로몬의 대표작은 오늘 소개하는 '한낮의 우울(2001)'입니다.
저는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해도 보통 인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한 책을 쓰려면 최소 10년은 걸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책을 만나면 그 작가의 다음 책은 10년이 지난 뒤에 나오는 걸 읽는 편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지나서야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나왔네요. 나온 순서와는 역순으로 읽었지만 두 권 다 읽었네요. 사실 내용이 완전히 달라서 읽는 순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이 책의 제목은 원래 '한낮의 악마'인데 제목이 너무 섬뜩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울을 다룬 책인지 모를 위험성이 있어서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한낮의 우울'로 바꾼 것 같네요.
앤드루 솔로몬이 워낙 달변가라서 TED를 비롯한 대중 강연으로 유명하지만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고 퓰리쳐상 최종심에 오른 이 책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 시작이었죠.
'부모와 다른 아이들'만큼 엄청나지는 않지만 이 책도 방대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그야말로 우울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룬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책입니다. 그러니 우울증을 이해하려면 일단 이 책부터 읽고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각 챕터의 제목만 봐도
1. 슬픔과 우울
2. 정신의 몰락
3. 치료
4. 또 다른 접근
5. 환자들
6. 중독
7. 자살
8. 역사
9. 가난
10. 정치
11. 진화
12. 희망
처럼 의학적, 생물학적,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서 우울증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다루고 있고 이를 본인이 투병했던 직접 경험과 수많은 인터뷰, 문헌조사 등을 통해 생동감있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앤드루 솔로몬이 달필이기는 해도 그의 책이 다 그렇듯이 난도가 좀 있는 편이고 무엇보다 분량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게다가 내용이 우울이니만큼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읽는 게 좋겠죠. 저도 그래서 구매한 지 좀 된 이 책을 손에 잡고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도 우울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 뿐 아니라 현장 전문가들은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명저라고 생각되어 추천합니다.
올해 그의 세 번째 책인 'Far and Away'가 '경험 수집가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 무려 25년 동안 7대륙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경험을 풀어놓은 책이랍니다. 이것도 760쪽에 달한다니 분량만큼은 앤드루 솔로몬의 저서답네요. 확 끌리는 내용은 아닙니다만 믿고 읽는 앤드루 솔로몬의 책이니 구매를 적극 고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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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공감이며, 두 번째 목적은 질서이다. 되는 대로 모아 놓은 일화들에서 끌어낸 일반화에 의거한 질서가 아닌 최대한 경험론에 기초한 질서.
* 슬픔은 상황에 걸맞은 우울함이지만 우울함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슬픔이다.
* 우울증에서 벗어난 뒤 재건하기 위해서는 사랑, 통찰력, 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
* 거의 항상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쁘다면 우울증이다. 거의 항상 어떤 이유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면 그것도 우울증이다. (이 경우 상황은 그대로 두고 우울증만 공격하는 것보다는 그 이유를 해결하는 것이 더 나은 접근법이다.)
* 중국 음식점에서 주는 행운의 과자에 들어 있는 점괘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우울증을 싫어하고 우울증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 우울증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체의 추진력으로 발병하는' 임의적이고 내인적인 형태가 되며 생활사건과 분리된다.
* 스트레스가 우울증 발병률을 높이는 건 분명하다. 스트레스 중에서 으뜸은 굴욕감이고 두 번째는 상실감이다.
* 세로토닌 수치가 낮은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에게 잔인한 짓을 하며 불필요하고 불합리한 모험을 걸고 이유 없이 적대적이다.
* 프로작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SSRI 계열에 대한 인기가 높은 것은 효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부작용이 적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 SSRI 계열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환자들 가운데 일부는 위장 장애를 겪게 되며 두통, 피로감, 불면증, 졸음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부작용은 성적인 것이다.
* 삼환계 항우울제는 아세틸콜린,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을 포함한 몇 가지 신경전달물질에 작용한다. 삼환계는 심한 우울증이나 망상적 우울증에 특히 효과적이다.
* MAOI 계열은 통증, 활력 감퇴, 불안정한 수면 등의 격심한 신체적 증세들을 수반하는 우울증에 특히 효과적이다. MAIO 계열의 항우울제는 효능은 뛰어나지만 부작용이 많은 것이 흠이다. 이 계열의 약을 먹는 환자는 약과 해로운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식품군을 피해야 한다.
* 이 약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주로 약물 남용 전력을 가진 이들이다. 벤조디아제핀의 중독 위험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 있다.
* 기분장애는 단일한 유전자의 단일한 계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전자들이 조금씩 위험성을 보태다가 외적인 상황에 의해 그 총합적인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 ECT는 단기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며 장기 기억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장애는 대개 일시적이지만 일부 환자들의 경우 영구적일 수도 있다.
* "어떤 병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라면 그 병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안톤 체홉의 말이다.
* 나는 우울증의 최고 치료법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음 그 자체가 믿음의 대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 EMDR은 강력한 처치이다. 나는 이 치료법을 추천한다.
* 마이클 테이스는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보이는 우울증 환자에게는 심리치료가 더 효과적이고 수면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에게는 약물치료가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 스트레스가 세로토닌을 고갈시키고 세로토닌 수치가 낮으면 공격성이 증가하고 공격성이 높으면 자살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스트레스성 우울증 환자들이 가장 자살에 이르기 쉽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릴케는 '진혼가'란 시에 이렇게 썼다.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한 가지만을 연습하면 된다. 서로를 보내 주는 것. 매달리기는 쉬우므로 연습이 필요하지 않다".
* 프로이트는 이렇게 썼다. "슬픔에 빠지면 세상이 초라하고 공허해지지만, 멜랑콜리아에 빠지면 자신이 초라하고 공허해진다"
* 가난한 사람들은 정신 질환의 용어들을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므로 그들의 우울증은 대개 인지적인 형태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중산층의 경우처럼 강한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신이 실패자라는 분명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들의 우울증은 주로 불면증, 극도의 피로감, 앓음, 공포, 타인과의 교류 불능 등의 신체적인 증상들로 나타난다.
덧. 이 책은 국민 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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