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원자료를 raw material이라고 쓰거나 제목의 reading을 다른 용어로 바꾸거나 해야 하는데 적절한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네요. 너무 습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업계 용어는 막상 바꿔쓰고 싶어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다 보면 선생님들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심리검사의 원자료를 잘 엮어서 핵심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물론 각 검사들의 sign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당연히 필요한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문제죠.
특히 빠지기 쉬운 함정은 각 검사 sign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부분만 찾으려고 애쓰는 것인데 그렇게 딱딱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전형적인 profile보다는 반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원자료 리딩을 잘 하기 위해 제가 추천드리는 방법 중 하나는 '의외성'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한 검사에서 발견되는 의외성을 눈여겨 보고 그 검사 sign으로부터 가설을 설정한 뒤 그 의외성을 다른 검사의 sign들과 교차 검증해 보면 그때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역동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등교 거부를 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이 할머니와 함께 심리평가를 받으러 왔고 부모가 바빠서 동행하지 못해 발달력 등의 개인 정보가 거의 없는데다 할머니가 손주와 함께 살지 않아 자기보고형 평가 도구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한번 보죠. 문장 완성 검사에서도 아이가 부모나 가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기술로만 일관하고 지능 검사 결과도 평이해서 별로 연결된 고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KFD에서 모든 가족 구성원을 그렸는데 자신만 안 그렸다면 밖에 나가서 놀고 있어 안 그렸다는 아동의 보고만 믿고 넘어가지 말고 그 의외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자아중심성이 강하고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나이인데 가족화에서 자신만 안 그렸다면 가족 내 갈등이 있거나 소외감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등교 거부도 학교에서 또래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파괴적인 관심끌기나 알 수 없는 이차 이득이 있을 수도 있죠. 이런 의외성을 염두에 두고 다른 투사법 검사의 sign들을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보고형 검사 등 구조화된 검사 결과와 궤를 달리하는 투사법 검사 결과가 새로운 가설을 입증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러니 원자료 리딩을 할 때에는 공통된 부분을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뜻밖의 모습을 보이는 검사 sign을 눈여겨 보고 새로운 가설을 설정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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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임상 심리학회 회원 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임상심리전문가가 심리검사 원자료를 치료적 목적으로 병원 전산망에 등재했는데 환자가 의무기록복사를 신청하자 주치의가 이를 승인해서 심리평가보고서와 함께 원자료도 복사해 주었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다른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단 이러한 논란이 벌어진 이유는
심리검사 자료 관리에 대한 제반 기준과 관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임상 심리학회에서 심층 논의를 거쳐 학회 차원의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이미 현장에서는 이와 관련해 판단하기 곤란한 문제들이 속속 불거져나오고 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심리검사 원자료는 의무기록에 준해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의 전문적인 지식에 의해 산출되는 진단서, 진료 기록과 마찬가지로 심리검사 원자료는 임상심리전문가의 전문성과 결합하여 심리평가 보고서라는 결과물로 나타납니다. 이는 모두 의료법의 적용을 받는 임상 현장에서 환자의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발생하며 환자는 검사비 지불을 통해 기록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다음은 의료법 21조와 의료법 시행규칙 제18조에 규정된 진료 기록의 보존 연한 규정입니다.
* 환자 명부 5년
* 진료기록부 10년
* 처방전 5년
* 수술기록 10년
* 검사소견기록 5년
* 방사선 사진과 그 소견서 5년
* 간호기록부 5년
* 조산기록부 5년
* 진단서 등 부본 3년
여기에 심리검사 원자료와 심리평가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방사선 사진과 그 소견서'가 가장 흡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을 보고 '구색을 맞추기 위한 억지 끼워넣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정말 심리검사 원자료는 방사선 사진과 질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뭐가 그렇게 다른 걸까요? 방사선 사진은 단순하게 기계에 의해 촬영되는 것이고 심리검사 원자료는 숙련된 전문가가 전문성을 발휘해서 산출한 것이니 다르다는 건가요? 저는 그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검사 원자료가 누출되었을 때의 악용에 대한 우려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리어 무슨 악용이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심리검사 원자료는 하나의 검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피검자의 특성이 제한되어 있으며 전문가가 아닌 이상 검사 자료가 의미하는 바를 종합적으로 해석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의무기록복사 요청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애 판정이나 산재 보험 등을 관할하는 기관에서는 원자료를 요구하지 않으며 심리평가 보고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심리검사 원자료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재평가를 담당하는 다른 기관의 전문가들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다른 기관에서 재평가가 의뢰된 환자를 심리평가 보고서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 기존의 평가 기관에 원자료 사본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저는 심리평가 보고서 뿐 아니라 심리검사 원자료도 의무기록에 준해 관리해야 하고 환자의 정당한 요구가 있는 경우 당연히 사본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통해 현장의 전문가들이 심리평가에 대해 한층 더 한 책임감을 배양하고 오만한 전문성의 아성을 깨는 계기가 된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저는 심리검사 원자료가 의무기록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보다 관리 기준을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라고 봅니다. 3차 진료기관인 일부 대형병원을 제외하고는 심리검사 원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의료 기관이 전무한 실정입니다. 특히 임상심리 전문가가 정직원이 아닌 비상근직으로 심리평가를 하는 local NP의 경우는 환자의 소중한 원자료를 외부 인력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상태에서 분실, 누락, 유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내용을 말씀드리면 현재 저는 전문가 자격을 취득한 이후 개인적으로 평가한 환자/피검자의 모든 보고서와 검사 원자료를 보관하고 있고 별도의 관리 규정이 정해질 때까지 최소 5년을 보관한 후 완전 폐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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