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종합심리평가에 포함된 6가지 검사 도구만으로는 성격장애를 진단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로샤와 TAT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함)하기에 대안 중 하나로 TCI를 추천하곤 합니다.
Cloninger가 애시당초 자극 추구, 위험 회피,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의 조합을 통해 전통적인 성격장애 진단 가능성을 타진했죠. 이 중에는 DSM 체계에 속하는 성격 장애가 5개(
반사회성, 연극성, 경계선, 분열성, 강박성)나 포함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TCI와 MMPI-2의 조합으로 진단하고, 또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TCI에서
반사회성 성격장애 기질 유형은 HLL 유형입니다.
자극추구 : High
위험회피 : Low
사회적민감성: Low
물론 HLL 기질은 모험가 타입도 포함하기 때문에 각 기질의 점수가 극단적으로 높을 때에 한해 반사회성 성격장애로 진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 경험 상으로는 반사회성 성격장애이면서 점수가 높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대개 극단적인 백분위값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극단값을 갖는 HLL 기질 유형은 모두 반사회성 성격장애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 경험 상으로는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TCI 성격 유형은 다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유형에 따라 나타나는 양상이 조금씩 다릅니다. 성격 차원도 자율성은 극단적으로 높고, 연대감은 극단적으로 낮은 것은 공통적이며 자기초월 차원의 차이에 따라 양상이 달리 나타납니다.
1. HLH 성격 유형 : 편집성(paranoid)
자율성 : High
연대감 : Low
자기초월 : High
HLH 성격 유형은 얼핏 보면 편집성 성격장애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처음 볼 때는 살짝 헷갈립니다. 상담을 요청하는 이유도 대부분은 관계사고나 피해의식 때문이며 심한 경우는 박해망상의 수준을 보이기도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관계사고의 대상인 사람에게 모든 원인을 귀인하고 책임을 돌려 탓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민원 제기, 법적 소송 등으로 물의를 일으킵니다. 특정 인물들이 나름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박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 이유는 자신이 너무 공정하고 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 HLM 성격 유형 : 괴롭히는
자율성 : High
연대감 : Low
자기초월 : Medium
자기초월 차원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어 겉보기에는 별로 문제없는 듯 보이지만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아랫사람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일의 성공을 위해서라고 둘러대지만 정작 성공하고 나면 자신의 공헌만을 뻥튀기하고 다른 사람의 노력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승부욕이 매우 강해서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동료, 후배, 부하 직원 할 것 없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타일입니다. 그래도 아래의 HLL 유형처럼 노골적으로 거만하지는 않습니다.
3. HLL 성격 유형 : 독재적인(Autocratic)
자율성 : High
연대감 : Low
자기초월 : Low
말 그대로 독재자의 면모를 보이는 유형입니다. 자기초월 차원이 극단적으로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지극히 속물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특성을 많이 보입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하고 목표 지향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일이 잘 돌아갈 때는 자신의 행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굉장히 능력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단 문제가 발생하면 관대함이나 참을성이 거의 없고 실수를 잘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독히 처벌하는(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화이트 컬러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바로 이런 사람이죠.
그래서 상담 장면에서 만날 수 있는 경우 중에서는
HLL 기질 유형과 HLL 성격 유형 조합이 전형적인 반사회성 성격장애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MMPI-2에서는 어떨까요? 미안하지만 범죄자가 아닌 사회 적응이 어느 정도 가능한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경우 흔히 예상하듯이 Pd2(권위불화) 임상 소척도, ASP1(반사회적 태도), ASP2(반사회적 행동) 내용 소척도가 상승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척도들이 노골적으로 상승한 사람들은 이미 범죄 경력이 있거나 아예 교도소에 있거나 하겠죠. 당연히 상담을 받으러 오지도 않을 겁니다.
오히려 예상 밖으로 상승하는 척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격병리척도 중 AGGR 척도가 상승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고 특히 HLH 성격 유형인 경우 실제 행동화 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신체적인 위협이나 협박을 흔히 사용합니다.
DISC 성격병리척도가 동반상승하면 더욱 위험.
HLL 성격 유형의 남성인 경우
GM, ES 보충척도가 동시 상승(70T 이상)한 경우 마초적 기질이 농후하고 굉장히 완고하며 고집 또한 세기 때문에 상담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겉으로는 순응적으로 보이지만(특히 S척도 상승 시), insight가 없기 때문에 상담 진행에 애로가 많습니다.
함께 살펴본 것처럼 MMPI-2만 갖고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진단하려고 한다면 굉장히 좌절스러운 결과를 맞게 됩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반사회성 관련 척도가 상승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단은 TCI의 반사회성 기질과 HLH, HLM, HLL 성격 유형 조합으로 하고 MMPI-2를 통해서는 일상 생활에서 이들이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일지에 초점을 맞추어 formulation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737
도박중독치료 초기에 저는 중독자에게 '정직'과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정직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은 도박중독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가 '거짓말'과 '회피'이고 또한 도박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지표도 바로 거짓말과 회피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치료를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치료자에게만큼은 앞으로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거짓말을 하게 되면 도와줄 수가 없게 된다고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물론 강하게 이야기를 한다고 치료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rapport가 형성되고 신뢰가 쌓일 때까지의 기간을 버틸 힘은 되거든요.
그런데 사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책임감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것이 도박중독자의 특징이므로 일상 생활에서 책임감을 갖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거의 항상 치료 초반에 채무 변제 계획을 세우기 위한 채권자 목록을 작성하는 과제를 주는데 금융권 채무와 지인들의 사적인 채무를 구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인들을 직접 만나서 자신이 도박중독에 걸렸음을 고백하고 빚 갚기를 유예해 달라는 부탁을 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담배를 끊을 때 몰래 혼자서 고민하고 끊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소문을 냄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듯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는 것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물어보면 많은 도박중독자들이 이 과제를 죽기보다 싫은 과제였다고, 가장 힘든 과제였다고 회상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할까', '나를 비난하거나 소문을 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킬거야'와 같이 부정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도박자를 괴롭히거든요. 자신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문제를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내는 것만큼 힘든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과제의 효과는 실로 대단해서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그야말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근거없는 불안의 늪에서 빠져나올 뿐 아니라 지인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절친하다고 믿었던 친구에게서 빨리 빚을 갚으라고, 공증한 차용증을 쓰라는 다그침을 당하거나 이와 반대로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빌린 돈에 신경쓰지말고 어서 빨리 도박에서 벗어나는데 집중하라고, 내가 도와줄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격려에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 과제를 완수한 도박중독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자세로 치료에 임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은밀한 중독'인 도박중독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자신의 문제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될수록 치유의 그 날은 더 빨리 옵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