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하는 기관에서는 작년에 수억 원대의 대규모 연구 용역을 발주했습니다. 표본 수가 2만 명이 넘는,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국내 최초의 전국 실태 조사였습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본 연구 조사 설계를 위한 사전 연구, 본 연구, 본 연구에 대한 감리 연구의 3단계로 이루어진 국내 유일의 연구 프로젝트였죠.
본 연구비만 해도 4억 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SKY 심리학과 교수팀 중 하나에게 맡겼습니다.
얼마 전에 이 연구의 분석 결과물 파일을 CD로 받았습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합보고서(PDF파일), 요약보고서(PDF파일), SPSS원자료(SAV파일), 원자료엑셀파일(이건 열어봤더니 결과표를 편집한 파일을 잘못 보냈더군요. -_-;;;) 달랑 4개입니다. 그나마 연구 보고서 파일을 빼면 제대로 된 통계 분석 결과 자료는 SPSS 원자료 파일 하나가 답니다.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4억 원이 넘는 프로젝트의 통계 분석 결과 자료가 원자료 하나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 공동 연구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설명하고 SPSS로 분석을 했으면 output 파일과 syntax 파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박사 과정이 분석을 했기 때문에 잘 모른다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어차피 기본적인 분석 방법이 기술 통계이기 때문에 syntax 파일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나중에는 원자료만 주면 되지 왜 그런 것을 요구하냐, 연구자에 대한 지나친 간섭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정말 개가 웃을 일입니다.
syntax 파일 작성은 SPSS를 이용한 분석의 기본인데 명문대 박사 과정이 그런 것도 모른다는 것 자체가 한심하고 박사 과정생이 덜 떨어졌으면 공동 연구원이나 하다 못해 연구 책임자라도 최종 점검을 해야 하는 것인데 4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최종 확인도 안 하고 결과물 CD를 그냥 보낸다? 프로젝트가 애들 장난입니까?
기술 통계이기 때문에 syntax 파일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도 웃기는 것이 나중에 누가 replication을 해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syntax 파일인데 syntax 파일을 안 주면 나중에 확인하는 사람 엿 먹으라는 말 밖에 더 됩니까? 그걸 어떻게 일일이 확인하라는 말입니까? 게다가 이 연구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원자료를 완전 공개하고 검증을 받을 예정인데 하다 못해 사감위에서 결과 확인을 하겠다고 하면 대체 이 원자료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 누가 검증해 줄 겁니까? 잔금 다 치렀는데 그 때 가서 도와줄겁니까?
연구자에 대한 지나친 간섭 운운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석사 학위 논문 분석을 도와줄 때에도 저는 분석 flow를 하나하나 작성해 텍스트 파일로 만들고 모든 분석 결과는 일일이 syntax 파일(SPS파일)을 만들어서 원자료와 syntax 파일, output 파일을, 구분하기 좋도록 각각의 디렉토리를 만들어 저장한 다음, 혹시 SPSS 프로그램이 없을 지 모르기 때문에 각 결과와 histogram 등을 이미지 파일로 저장해서 일련 번호를 붙인 다음 압축해서 줬습니다. 의뢰자가 압축을 풀기만 하면 분석 순서대로 카테고리를 열어서 분석을 그대로 다시 재현해서 확인할 수 있도록 했지요.
20만 원짜리 개인 대 개인 통계분석도 그렇게 해 주는 것이 당연하거늘 수억 원짜리 프로젝트 결과로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연구자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고요?
그럼 원자료의 신뢰성을 확인하기 위해 최초 코딩된 엑셀 파일을 달라고 하니 리서치 회사에는 주지 말라고 했고 자기네들이 가진 것만 보내준 건 또 뭡니까? 구린 것이 없다면 왜 cross checking을 못하게 합니까? 이건 엑셀을 변환한 원자료에 뭔가 장난질을 쳤다는 의미 아닙니까. 아니면 그냥 기분 나쁘니 감정대로 처리하자는 건가요?
뭐 앞으로 그 학교 연구팀에게는 연구 용역을 맡기지도 않겠지만(그런 한심한 자세로 일하는 교수에게 뭘 믿고 연구를 맡기겠습니까. 제가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겁니다) 책임 연구원의 선배라는 분이 제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결과물을 요구하는 것은 평판과 신뢰를 깎아먹는 문제라는 말씀에 또 한번 기절했습니다. 이 분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고 평소 공명정대하다고 평가했던 분인데 무슨 이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요. 많이 실망했습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교수라서 교수편을 드시는 건가요?
연구를 제대로 했다면 '갑'(제가 볼 때 이 교수팀은 우리 기관을 갑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만)이 무슨 무리한 요구를 해도 떳떳하게 공개하면 되는거지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확실하게 분석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내서 하나하나 점검을 좀 해봐야 겠습니다. 불안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 수준이 이렇다면 심리학계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됩니다. 다른 대학은 안 그러길 간절히 빕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2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