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종합심리평가로는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TCI 사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
'과연 심리평가로 성격 장애를 진단할 수 있는가' 참조)
TCI라고 해서 성격 장애를 무조건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은 아닌 게
1) 기질 상의 취약성 존재, 2) 성격의 기질 조절 기능 약화 라는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성격 장애 진단을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TCI를 갖고도 성격 장애 진단은 쉽지 않은 겁니다.
기질의 취약성이야 타고 나는 것이고 일부 유전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성격의 기질 조절 기능 약화는 상담에서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상담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TCI 성격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 LLL 유형 : 침울한
주관적인 고통감도 심하고 객관적인 심리평가 결과도 이를 지지하는 성격 유형입니다. 내담자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고, 우울 장애나 기타 신경증적 문제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성적인 무기력, 자신감 부족, 에너지 저하 등의 증상이 공통적이고 매사에 성공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를 뿐 아니라 상담이 도움이 될거라는 기대조차도 부족해서 예후가 그리 좋지 않은 편입니다. 어떤 공존 장애를 고려하든 만성화된 상태에서 방문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탐색하는 게 좋습니다.
* LLM 유형 : 미성숙한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정신적으로 덜 자란 느낌을 주는 내담자로 순진한 것과는 다른 미숙함이 특징적입니다. 기질 상의 취약성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성장 과정에서 이러한 기질이 온전히 수용되지 못함으로써 자기 회의, 자기 비하 성향이 강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볼 때 그다지 성취라고 할 만한 걸 이룬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LLM 유형으로 분류되는 내담자는 성장 과정에서 방임이나 학대 등의 애착 외상을 입은 적이 있는지,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통제 지향적 부모에게서 양육된 것은 아닌지 부모-자녀 관계 문제 가능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 LML 유형 : 모방하는
성인의 경우 이 유형으로 분류되는 내담자가 꽤 많습니다. 흔히 말하는 남 따라하기 유형인데 목적 의식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삶의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고자 살아온 게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 삶의 만족도가 낮은 것이 특징적입니다. 이 유형의 내담자도 LLM 유형처럼 지나치게 통제적인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큰데 진정한 어른이 되는데 꼭 필요한 선택과 책임 중 어느 것도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결과에 대한 집착이 강하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비난할 대상(주로 부모 등 significant others)을 찾아 외부 귀인하면서 자신의 약한 멘탈을 지키려고 합니다. HHH기질 유형(수동-공격적 유형)과의 조합이 가장 예후가 좋지 않으며 이럴 경우 조기 종결 가능성도 큽니다.
말씀드린 세 유형의 공통점은 자율성 차원이 매우 낮다는 겁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의 특징 중 하나는 자율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죠. 거기에 연대감까지 낮으면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LLL, LLM 유형이 대표적인 경우이죠. 자율성이 낮아도 연대감 수준이 어느 정도 높다면(Meduim level 이상이라면) 상담자와 rapport를 형성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성격 유형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만날 수 있는 성격 유형으로 LLH(비조직화된), LHM(복종적인), LHL(의존적인) 유형도 있습니다. 이 유형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 두시는 게 좋은데 이들 유형은 LLH 유형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연대감 수준이 높은 장점이 있어서 상담자가 본격적인 개입을 할 때까지 시간을 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상호 의존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전이-역전이 분석이 필요한 내담자가 많습니다.
유형에 대한 숙지 이외에도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1. 상담을 받으러 오는 내담자들은 대부분 TCI의 자율성 차원이 낮기 때문에 자율성의 하위 차원 분석을 통해 어떻게 자율성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함.
2. 연대감 차원까지 낮다면 조기 종결 가능성이 커지며 내담자가 호소하는 증상의 심각도도 비례해서 올라가는 경향이 있으므로 각오를 단단히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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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심리평가를 할 때
평가자가 빠지는 함정 중 하나는 불안한 마음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빠지는 바람에 오히려 길을 잃는 것입니다.
정보가 많으면 어떻게든 수검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정보는 case formulation을 방해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핵심적인 정보를 골라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는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해야만 가설을 정확하게 세울 수 있게 되고, 가설을 정확하게 세울 수 있어야만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또 다른 방법은 정확한 근거가 없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료력을 조사하던 중 과거에 다른 병원에서 특정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았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해보죠. 이 때 평가자가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건 그 진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려졌느냐는 겁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문진에 의한 것인지, 약식으로 실시된 자기보고형검사 결과에 기초한 것인지, 종합심리평가를 실시한 것인지, 실시했다면 심리평가보고서를 구할 수 있는지, 어떤 자격을 갖춘 전문가가 실시한 것인지 등등을 확인해봐야 하는 거죠. 진단 근거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를 구할 수 없다면 이런 정보는 아예 처음부터 없는 셈치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배경 정보의 유효 시한(?)인데
배경 정보는 가설을 세울 때 사용한 뒤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 방식을 따르자면
대면 검사를 실시하기 전에 없애는 것이죠. 검사 결과를 해석할 때까지 배경 정보를 남겨두면 검사 결과가 제대로 해석되지 않거나 자료가 불충분한 경우 배경 정보를 동원해 그 간극을 메우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소설 쓰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배경 정보는 사실 굉장히 불완전한 정보입니다. 심리적 고통이 큰 경우 수검자의 주관적 보고는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보호자가 수검자에 대해 잘 아는 signicificant others가 아닌 경우 불완전하거나 편향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정보는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의 오랜 과거 자료로 정확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배경 정보는 심리검사 의뢰를 받고 chart 확인 후, 혹은 심리검사를 위한 면접 후 가설을 설정할 때 사용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정확한 case formulation을 위해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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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담은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과정에 신경을 써야 하는 심리적 서비스입니다.
이 포스팅의 오버스러운 제목은 종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였다고 이해해 주세요.
상담자가 'here & now'의 기조를 잘 유지한다면 내담자는 상담을 하면서 상담자에게 다양한 감정을 투사하게 됩니다. significant others에 대한 감정 뿐 아니라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대인 관계 문제를 상담 장면으로 가져와서 실현(actualization)하기 때문에 상담이 길어질수록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투사한 감정, 상담자와 함께 다룬 감정의 무게와 크기가 커지기 마련입니다.
내담자가 인지적으로는 상담 종결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많은 상담자들이 종결 회기에서 애초에 세웠던 상담 목표를 달성했는지의 여부와 상담 종결 후 일상 생활에 적응할 때 예상되는 어려움을 점검하는 인지적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담자의 감정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히 상담자에 대한 의존을 다루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상담을 종결하는 것은 잠수를 마치고 수면으로 부상하는 것과 같아서 서서히 감압을 하고 올라가야 잠수병이 생기지 않듯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내담자의 감정을 다뤄야 합니다. 상담에 들어가는 속도보다 상담에서 나오는 속도를 훨씬 더 천천히 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상담을 종결하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종결하는 속도가 더 할 나위없이 중요합니다.
장기 상담의 경우에는 더욱 천천히 종결해야 하는데 Shulman(1994)은 장기 상담의 경우 전체 회기의 1/6을 종결 회기에 할애하라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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