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할 때 상담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내담자의 측면을 크게 생각, 감정, 행동으로 나누어 본다면 한 회기가 끝나갈 때 특히 주의해야 하는 부분은 단연코 내담자의 감정입니다.
회기 중에 다루었던 생각과 행동은 다음 상담 때까지 내담자가 곰씹어 보고, 연습해 보고,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연결 고리같은 부분이지만 감정만큼은 어떤 감정으로 상담을 끝냈느냐에 따라 치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상담을 하던 도중 내담자가 자신에게 심한 말로 상처를 준 부모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노에 사로잡혀 손발을 부들부들 떨다가 급기야는 오열을 한다고 해보죠.
그런데 상담자가 시계를 곁눈질로 슬쩍 보니 이번 회기가 곧 끝날 시간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급수습, 급정색을 하고 서둘러 마무리를 해야 할까요?
회기는 그렇게 마무리가 될 수 있을 지 몰라도 내면에 침잠해 있던 분노와 고통감, 슬픔 등의 부정적 감정이 올라와 내담자를 온통 사로잡고 있는데 회기가 끝난다고 그런 감정까지 쉽게 정리가 될까요?
상담 시간을 최대한 정확하게 지키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내담자의 부정적 정서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는데도 부랴부랴 회기를 끝내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설사 내담자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감정에 대해 상담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해도 부정적인 정서 상태로 상담을 마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담에 대한 거리낌이 생길 수 있고 무엇보다도 상담을 마친 이후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부정적 정서 때문에 연이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 회기에 상담자를 만날 때까지 최소 일주일의 시간 동안 온전히 혼자서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내담자가 부정적인 정서에 휩싸여 있을 때는 그대로 회기를 마치지 않습니다. 충분히 ventilation을 해서 다루고 난 뒤 내담자가 평온한 마음을 느낄 정도로 가라앉은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다음 회기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집니다.
절대로 내담자가 상담을 마치고 부정적인 기분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가도록 할 필요까지는 없어도 그 부정적인 감정이 충분히 해소된 다음에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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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현장에서 많이 쓰는 말로 ventilati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정확한 용어는 emotional ventilation이 될텐데 이를 줄여서 그냥 ventilation이라고들 많이 사용하죠.
환기라고 번역하면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지만 발산의 의미로 많이 씁니다.
부정적인 정서를 계속 억압하면 좋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방법으로 적절히 ventilation을 시켜야 한다고 하죠. 그래서 흔히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서 남편 흉보고, '시월드' 욕하면서 발산을 해야 건강에 좋다고 생각합니다(비하의 의도 아니며 이해를 돕기 위한 단순 예임).
그런데 그렇게 발산을 하면 정말 정서적으로 건강해질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위에서 이야기한 ventilation을 '쓰레기통 비우기'에 비유합니다.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꽉 차면 냄새도 나고 지저분하기 때문에 쓰레기통을 비워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 쓰레기통을 들고 나와 한 자리 모여 비웁니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나면 잠시동안 후련하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래봤자 쓰레기통은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쓰레기가 가득차게 되고 또 모여서 비워야 합니다. 이런 과정의 무한반복이죠.
언제부터인가 주기적으로 만나서 수다떠는 친구들이 부담스럽고 맨날 똑같은 레퍼토리로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소모적이고 지겹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으십니까?
그런 분이 있다면 그것이 쓰레기통 비우기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느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통 비우기는 해결책이 아닐 뿐더러 장기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효과도 전혀 없습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쓰레기통 비우기를 하러 나오는 친구 중에 행복한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행복한 사람은 쓰레기통 비우기를 하지 않습니다. 혹시 있다면 친구들이 쓰레기통을 비우는 동안 별 말 없이 묵묵히 듣고 있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일겁니다.
무의미한 쓰레기통 비우기를 그만두려면 쓰레기통을 화분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심었는지, 뭘 심어보니 좋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서로 자신의 화분을 자랑하고 상대방이 가꾼 식물을 칭찬하고, 그렇게 가꾸는 노하우를 배우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만나자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화분을 가꾸는 사람들을 가까이에 두세요.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는 걸 비난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세요. 그 사람은 평생 화분을 가꾸는 즐거움을 모를 사람입니다.
우리는 쓰레기통을 비우려고 사는게 아닙니다. 화분에 예쁜 꽃을 가꾸기 위해서, 그게 행복해서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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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에는 별 문제 없다가(사실은 주 양육자인 부모가 체벌 등으로 충분히 manage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별 문제 아니라고 생각했던) 초등학교 고학년 내지는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에게 대들거나 반항하는 정도가 심해지고 학교에서도 또래와 싸우거나 선생님에게 대드는 문제로 심리평가를 받으러 오는 아동이 꽤 많습니다.
대개는 과잉 행동 경향도 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ADHD를 의심하다가 심리평가를 해 보면 주의력 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없고 그렇다고 소아 우울증 같은 정서적 문제가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빈약한 로샤 검사에 근거해 내재된 공격성으로 결론(원인도 모른 채)내고 routine하게 놀이치료, 표현예술치료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내재된 공격성을 외부로 건강하게 ventilation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생각했던대로 잘 될까요? 나중에 재검을 받으러 온 아동의 치료력을 점검하다보면 이러한 접근법이 효과가 거의 없다는 보고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볼 때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결정적 시기(2~3세)에 부모가 적절한 관심과 양육을 제공하지 못해 불안정 애착이 되는 바람에 애정 욕구가 반복적으로 좌절되고 이로 인한 aggression이 내재된 것일 가능성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발달력에 대한 충분한 자료 수집과 면담을 하지 않기 때문에 놓치는 것인데 제가 볼 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는 상당 수의 아이들이 애착 문제를 갖고 있더군요. 이런 아동은 불안정 애착 상태를 해소하고 부모 및 주변 환경과 신뢰를 재형성 할 수 있도록 도와야지 공격성만 ventilation시킨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습니다.
둘째, 첫 번째 경우만큼 많지는 않지만
언어성 영역에서 어휘력이나 표현력의 부족이 두드러지는 아동의 경우에도 행동화 경향성이 강화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적절히 표현하기 위한 언어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월한 방법으로 직접적인 행동 표현을 선호하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적절한 표현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공격적인 행동이 한결 줄어듭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말로 자신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다면 굳이 체벌을 부르는 행동을 고집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선 인지 기능 검사에서 언어적 표현력과 어휘력의 부족이 두드러지는지 점검해 보고 내재된 공격성이 검사 sign으로 관찰되더라도 그 원인이 분명하지 않으면 애착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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