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임상에서 수련을 마치고 상담 영역으로 처음 넘어와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던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문장완성검사(SCT)의 내용을 일일이 타이핑해서 정리하는 거였습니다.
상담 내용을 녹음한 verbatim을 축어록으로 푸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임상 심리학 분야에서는 아무도 문장완성검사의 내용을 타이핑하지 않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도대체 저런 짓을 왜~'하는 당혹감이 들었죠.
어쨌든 저는 문장완성검사의 내용을 타이핑 해서 정리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정확도가 떨어진다
: 보통 문장완성검사의 내용은 '개인', '성', '가족', '대인 관계'의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해 정리하는데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각 범주 안에 적게는 2개에서 많게는 5~6개의 하위 범주가 더 있습니다. 문제는 이 범주에 따라 문항을 나누는 기준이 어떤 근거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죠. 센터마다, 기관마다, 학교마다 제각각입니다. 10년도 더 전부터 이 기준의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있지만 대충이라도 제게 알려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과거에 해 오던 관례대로 구분한다는 답만 들었습니다(혹시 근거를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이 참에 제보 부탁합니다). 만약 과거 누군가(일종의 선구자)가 주먹구구식으로 나눈 기준을 지금까지 검증도 하지 않고 적용해 사용하고 있다면 엉터리로 내용 분석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수많은 버젼이 존재하는 청소년용 문장완성검사는 말 할 것도 없고 어느 정도 50문항 버젼으로 통일된 성인용 문장완성검사도 가이던스에서 판매하는 것과 시중에서 흔히 복사해서 사용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문항의 내용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기준도 사람마다 제 각각, 사용하는 문장 완성 검사의 유형도 제 각각이므로 정확도가 높을 수가 없죠.
제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분들은 다른 기관에서 일하는 동기나 선배에게 연락해서 그 기관의 내용 분석 틀을 구해보세요. 동일한 종류의 문장 완성 검사 문항조차도 미묘하게 다른 범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2. 정성적 자료가 누락된다
: 문장완성검사는 내용 분석만 할 수 있는 심리검사 도구가 아닙니다. 필압, 필압의 변화, 맞춤법, 띄어쓰기 등의 질적 분석도 내용 분석만큼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울 장애, 불안 장애, 학습 장애, ADHD, 지적 장애, 강박 장애 등의 병리적 문제를 변별하기 위해서는 내용 분석보다 질적 분석이 더 유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타이핑을 하게 되면 질적 분석을 위한 정성적 자료가 몽땅 날아가게 됩니다. 꼼꼼한 평가자라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의 오류까지 그대로 옮길 수 있을테지만 아무래도 수검자가 직접 작성한 원자료의 정보가를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필압 같은 건 타이핑을 해서 옮길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3. 비효율적이다
: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 상담 분야에서 문장완성검사 내용의 타이핑은 업무량을 쓸데없이 가중시키는 일입니다. 축어록 풀랴, 가족력, 발달력 조사하랴, case formulation에 필요한 자료 모으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거기에다 심리검사 자료까지 타이핑 하는 건 불필요한 시간 낭비입니다. 처음 타이핑한 자료를 보고 저는 제가 학부 때 강의 내용을 한자 섞어서 손으로 노트 필기한 뒤 제출하라고 했던 구닥다리 교수들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더군요. Siri와 대화하고 말로 동작 명령을 수행하는 시대에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입니까. 그럴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문장완성검사지를 20번 차근차근 정독하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수검자의 입장에 서서 문장완성검사의 내용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수검자의 의도가 눈에 들어오고 내용의 흐름이 보이게 됩니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죠.
4. 기계적 분석이다
: 문장완성검사의 문항들은 각기 나름의 의도를 갖고 있고 당연히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문자완성검사에는 비슷한 내용의 문항이 반복되죠. 예를 들어 성인용 문장완성검사 50문항 version의 경우 2번 문항과 50번 문항에서 아버지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수검자가 2번 문항에 답할 때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과 문장완성검사를 거의 마친 마지막 문항에서 아버지에 대해 답할 때의 감정은 당연히 같을 수가 없습니다. 보통은 아버지에 대한 공감이나 측은지심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분노, 냉소, 거리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이럴 때 아버지에 대한 문항을 한 곳에 모아놓으면 수검자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미적지근한 물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문장완성검사는 수검자의 눈높이에 맞춰 펄펄 뛰는 감정선을 따라 이해해야 진가를 발휘하는 대표적인 심리검사도구인데 이런 식으로 기계적으로 분석하면 안 됩니다.
문장완성검사 내용이 타이핑 된 자료를 볼 때마다 저는 온전한 사람을 조각조각 분해한 뒤 얼기설기 재조립한 프랑켄슈타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모습을 대충 갖추고는 있지만 그건 진정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죠. 거기에는 수검자 본인의 생생한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문장 완성 검사의 내용을 타이핑하는 것에 대해 재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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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상담을 받은 적이 없는 저같은 상담자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과연 제대로 상담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래도 상담 관련 서적을 꽤나 읽고 공부했기 때문에 상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머리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대가들의 상담 시연을 담은 동영상도 열심히 복기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어느정도는 흉내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상담 동안에 내담자 뿐 아니라 상담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낱낱이 알 수는 없는 것이죠. 내담자에게 집중하는 상담자일수록 더 모르게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런데 이런 제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것만 같았던(과거형이라는데 주목~) 책을 찾았습니다. 제목부터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APA) 출판부에서 나온 이 책은 임상심리학 박사인 Paul, L. Wachtel이 썼습니다. Wachtel은 특이하게도 정신역동적 접근과 인지-행동적 접근의 양쪽 field 모두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치료자로 어찌 보면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은 이 두 가지 접근을 접목하여 활용하는 임상가입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심리치료의 원리와 가정들에 대한 이론적인 소개와 함께 이 책에 실린 심리치료 사례를 보는 관점인 two-person perspective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부부터 문제입니다. 1부가 너무 장황하고 산만해요. 비유하자면 양식 코스에서 전채인 샐러드를 계속 리필해주다보니 정작 스테이크를 음미할 식욕이 남지 않는거죠. 2부가 두 명의 내담자와 진행한 3 session의 심리치료를 two-person perspective에 따라 상담 중 상담자와 내담자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분석하는 main part인데 이걸 읽기도 전에 김이 확 빠져서 동기가 떨어집니다.
게다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2부는 그야말로 각 session의 vebatim을 낱낱이 풀면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을 보여줘야 하는데 서문의 거창한 발문과 달리 맥이 빠질 정도로 평범합니다. 일반적인 사례 분석집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정신역동적 접근과 인지-행동적 접근을 모두 취한다길래 얼마나 대단할까 기대가 컸는데 그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게다가 원서라는 걸 감안하면.... ㅠ.ㅠ
3부에서는 지난 회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는 부분인데 이 역시 2부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ㅡㅡ;;;;
번역서도 아니고 원서(현재 아마존에서 49.95$)라는 걸 감안하면 그 정도의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양가 있는 사례 관련 책을 찾기 위해 계속 try 해 볼 예정이니 찾으면 곧바로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북 크로싱을 할 예정이오니 직접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도저히 추천은 못 드립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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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나 상담 supervision을 받고자 할 때 정작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는 supervisee들이 많습니다.
한 회기의 verbatim을 몽땅 풀어 가야 하는지, 지금까지 상담한 내용을 회기 별로 묶어서 요약해야 하는지, 염두에 두고 있는 심리치료 기법에 대해 정리를 해야 하는지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 쉬운데 supervision을 받을 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몇 가지 guideline을 정리해 봤습니다.
아래의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을 하다 보면 뭘 준비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 A : 내담자의 현재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라
B : 이 회기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 회기에서 역동(내담자에 대한 당신의 반응과 당신과 내담자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라
* A : 배경 정보를 포함하여 회기 중 알게 된 다른 중요한 정보를 설명하라
B : 회기 중 논의된 주요 문제들을 요약하라
* 현재 문제(들)와 관련된 문화적 또는 발달 정보를 설명하라
* A : 내담자의 문제(들)에 대해 당신이 처음 했던 개념적인 해석은 무엇인가
B :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당신이 한 개념적 해석의 변화(또는 확장)를 설명하라
* DSM 체계를 고려할 때 당신의 진단적 인상을 나열하라
* A : 이 내담자에 대한 최초 치료(상담) 계획을 가능한 한 상세히 설명하라
B : 이 내담자에 대한 당신의 치료(상담) 계획의 변화(또는 확장)를 설명하라
* 당신의 치료(상담) 계획을 바탕으로, 다음 회기에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 이 회기에서 어느 정도까지 당신의 목적이 달성되었는가
* 이 사례의 어떤 양상이 당신에게 윤리적 염려를 불러일으키는가
* 회기에 대한 개인적인 성찰을 무엇이든 공유하라
* 당신의 supervisor에게 어떤 구체적인 질문이 있는가
A : 최초의 상담 회기
B : 현재 상담 회기
출처 : 'Fundamentals of Clinical Supervision, 3rd(by Janine M. Bernard & Rodney K. Goodyear, 2004) 중 일부 내용 발췌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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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본적으로 심리치료나 상담 supervision을 할 때 형식을 별로 따지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들마다 새로 상담을 시작하는데 어떻게 구조화 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위해 case를 들고 오기도 하고, 이미 어느 정도 상담이 진행되었는데 상담 목표를 중간 점검하기 위해서나 또는 종결 시점과 방법에 대해 궁금해서 오는 선생님도 있죠. 물론 자신이 상담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 회기의 상담 축어록을 풀어서 갖고 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상담 supervision을 받았던 선생님들의 경우 당연히 축어록(verbatim)을 풀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 분들일수록 한 줄 한 줄 분석하듯이 소위 '깨부수는' supervision에 익숙하고요.
그런 방식의 supervision이 전혀 필요없다고는 말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상담을 잘하는데 도움이 되는 supervision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의 supervision 방식이 교수들이 학위 논문을 지도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어떤 논문이든지 비판의 눈으로 보면 흠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능숙한 상담자라고 해도 한 회기를 녹음해서 통째로 풀어내면 흠결투성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개입했냐', '상담자가 내담자가 하는 말의 1/3이상을 말하면 어떻게 하냐', '이 시점에서는 pause를 더 주어야지', '직접적인 조언을 하면 어떡하냐' 등등
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적으로 supervision하는 상담자께서는 정말 그렇게나 완벽하게 상담을 하고 계십니까? 본인의 상담 축어록을 풀어서 이름 지우고 내놓으면 비판 하나 받지 않고 칭찬만 받을 자신이 있으신가요?
또 하나, 그렇게 지적을 당한 부분이 정말 다음 상담에서 개선이 되던가요? 상담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분석되고 적용될 수 있던가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던데요.
제가 경험한 상담은 무술과 같았습니다. 아무런 기술도 없지만 그저 내담자를 돕기 위한 일념 하나로 들어가서 내담자에게 얻어맞고, 깨지고, 그러면서 내담자에게 배우고, 내담자의 감정에 동화되고, 같이 호흡하고 생각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고, 함께 뒹굴다보니 내담자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길을 찾고 용기를 얻어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그런 성장의 무술이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초식은 익혀야겠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무술에 대한 열정과 연습이 고수를 만들듯이 상담은 스캇 펙이 그렇게 강조했던 내담자에 대한 사랑과 사명의식, 그리고 연습만이 진정한 상담자를 만들어낸다고 믿습니다.
'pause가 25초라도 상담자가 개입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식의 기계적인 분석은 상담자의 기술은 증진될 지 몰라도(별로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절대로 내담자와 함께 호흡할 수 없고, 내담자와 함께 호흡할 수 없는 상담자는 절대로 제대로 된 상담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supervisee가 원하는 상담 supervision 또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담 supervision은 축어록 교정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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