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를 할 때 가설 검증 방식을 사용하면 무엇보다 시간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순차적으로 원자료를 검토함으로 인해 판단 착오의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가장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사가 끝난 뒤 검사 원자료를 주욱 늘어놓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거리면서 답답한 한숨만 푹푹 쉬는 평가자라면 한번쯤 가설 검증 방식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죠.
하지만 아무리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해도 모든 사례에 가설 검증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는데 가설 검증 방식을 적용하기 어려운 몇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아동을 심리평가 할 때 부모의 보고 신뢰도가 현저히 의심되는 경우입니다. 아동이 너무 어리면 MMPI-A와 같은 자기 보고형 검사 도구를 사용할 수가 없어 KPRC나 K-CBCL처럼 부모가 아동의 문제를 평정하는 척도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부모가 아동의 문제를 잘 몰라서 제대로 평가할 수 없거나(차라리 그러면 다행인데),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을 염려해 문제를 축소 보고하거나 반대로 상대방 배우자나 그의 부모를 원망하기 위해 문제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우, 또는 정작 자신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어 문제를 왜곡해서 지각할 수 있는 경우에는 부모의 주관적 관찰 보고에 의해 가설을 설정하게 되면 오히려 더 헤맬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가설 없이 blinded evaluation을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또한 부모의 평정 신뢰도를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는 MMPI-2와 SCT 정도의 자기 보고형 검사는 screening 차원에서 반드시 실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성인을 심리평가 할 때 이차 이득(secondary gain)이 두드러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자면 군 복무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정신과 진단서를 받기 위해 심리평가를 받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죠. 이 경우는 자신이 군 복무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지도 않은 다양한 증상들을 과장해서 보고하기 때문에 그런 호소(complaints)를 바탕으로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가설만 잔뜩 만들었다가 정작 원자료와 충돌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이 역시도 blinded evaluation을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셋째. 배경 정보로 추정한 1차 가설들이 서로 배타적으로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내 욕을 하는 환청이 들린 지 10년이 넘었다는 문제와 기분 변화가 너무 심해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는다는 증상을 동시에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첫 번째 문제는 SPR계열 장애의 1차 진단 가설이 가능할테고 두 번째 문제는 기분 장애군에 속하는 1차 진단 가설이 가능할텐데 두 가설의 접점은 Schizoaffective Disorder 정도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환청이 10년이나 들릴 정도로 만성화되었다면 그 가설은 별로 신빙성이 없죠. 이런 경우 억지로 여러가지 문제를 공통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설정하는 건 무리한 시도입니다. 그러니 가설을 설정하지 말고 원자료를 순차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이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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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에도 적용됩니다.
물론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심정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내려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점검하고 헷갈리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을 따로 list up해 supervision 때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마다 supervision point를 물어봅니다. 이 케이스를 왜 supervision 받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요. 이 질문을 자꾸 던지는 이유는 supervision을 준비할 때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고 싶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case formulation이 어렵기 때문에 supervision을 받으려고 하지만 point를 잡기 위해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자신의 취약점을 찾아낼 수 있고 이 취약점을 보강해야 supervision을 통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평가 supervision을 받을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supervision point를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진단의 문제인가
:
진단이 헷갈리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가설 검증 방식에 의한 case formulation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진단을 위해 필요한 정신병리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검사는 그런대로 하겠는데 진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막막함을 느끼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정신병리에 대한 지식을 더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검사 결과를 대충 꿰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단명을 붙여 제출하게 됩니다.
2. 검사 sign 통합의 문제인가
: 검사 sign이 통합되지 않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역시 가설 검증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보다 중요한 검사 sign을 선별하지 못함)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검사 sign이 어떠한 심리적 상태, 증상, 문제와 연결되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과도한 정보에 압도되어 보고서 작성 시점에서 수많은 정보를 늘어놓고 골라내는데 어려움을 겪게되고 후자의 경우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가설 검증 방식으로 접근하는 체계적인 연습을 통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각 검사 sign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사 별 manual과 해석서를 보다 심층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3. 검사 sign과 배경 정보의 불일치 문제인가
: 심리검사의 실시 및 채점, 해석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도 겪게 되는 이 문제는
대부분 배경 정보의 신뢰도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해(자녀를 방임한 어머니의 주관적 보고를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등)
screening에 실패하거나 꼭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해(병력이 있는 정신분열병 환자가 복용하던 약물 미확인 등)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심리검사 실시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나머지 검사 실시, 채점, 해석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죠. 이 경우는
부족한 정보를 수집하는 노하우를 익히게 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4. 검사 실시 및 채점, 해석의 문제인가
: 수련 과정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중요시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맹점이 많은 부분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종합병원 급 수련 기관에서도 검사의 실시, 채점은 대학원에서 충분히 익히고 왔다고 가정하며 1년차 때 윗년차가 몇 번 관리 감독하는 것으로 마스터했다고 여기는데 실제로 전문가가 된 이후에도 잘못된 검사 실시 방법을 본인도 모르는 채 고집하는 경우가 많으며 검사 도구 자체에 대한 지식마저도 부족(예를 들어 K-WAIS의 언어성-동작성 지능의 유의미한 차이 점수가 연령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모름)한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세부적인 지식을 supervision을 통해 교정해야 합니다.
5.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의 문제인가
: 이건
임상심리학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데 현재 어느 수련 기관에서도 어떻게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지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수련 레지던트의 자질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심리평가보고서 작성법에 대한 참고 서적이 한 권도 없으며 Clinician's Thesaurus와 같은 외국 서적을 참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supervision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표준화된 보고서 작성법보다는 적절한 용어 사용, 군더더기 없는 기술, 논리적인 연결법 등입니다.
6. 심리평가 보고서 활용의 문제인가
:
심리평가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술 방법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지체 판정을 위한 보고서이냐, 심리치료를 위한 평가이냐, 학교 제출용이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고 제언(recommendation)도 달라지게 됩니다. supervision에서는 이러한 각각의 활용도에 따라 심리평가 보고서를 어떻게 달리 작성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점검 point가 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정리를 했으니 심리평가 supervision을 받는 선생님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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