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를 할 때 수검자를 가장 덜 괴롭히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심리검사 도구를 선택하는 것도 임상가의 능력입니다만 반복 사용에 제한이 있는 심리검사의 특성 상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은 도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대면 검사가 끝나고 실시한 검사 sign을 정리하다보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 선택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심리검사 sign들을 선별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단계. 절약성이 가장 중요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소한의 검사로 최대한의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가장 좋죠. 그러니 검사 도구 선정 단계에서부터 꼭 필요한 검사가 아니면 가능한 한 추가, 실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검사 수가 때문에 이미 검사들이 battery로 묶여서 처방되는 병원 장면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2단계. Key word를 중심으로 정리
인간의 심리 현상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 다단한 것이라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죠. 다만 일종의 Key word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불안정 애착이라든가, 이분법적 사고라든가, 반복적인 욕구 좌절로 인해 내재화된 분노라든가... 그런 Key word를 방사형 원의 중심에 놓을 수 있도록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의뢰 사유를 꼼꼼히 확인해서 진단 가설, 역동 가설, 관계 가설 등을 세우는 것이 유용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수 차례 포스팅을 한 바 있죠(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진단 가설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수검자가 호소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진단 가설' 세우기'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단계. Key word 및 Key word와 1단계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만 선택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검자를 설명하는 Key word로 반복적인 성피해 트라우마를 찾았다고 가정해보죠. 당연히 트라우마랑 연결된 몇 가지 개념들이 더 있을 겁니다. 통제 불능의 자기 파괴적 행동이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정서적 지지 세력의 부재가 다른 하나의 연결 개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찾아낸 개념을 중심으로 이제 트라우마와 연결된 개념들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찾아서 모으는 겁니다.
그렇다면 Key word를 지지하는 검사 sign과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제외한 나머지 검사 결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과감하게 버립니다. 물론 넓은 맥락에서 보면 그 검사 sign들도 수검자의 특정 측면을 설명하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건 핵심적이지도 않고 의뢰 사유와 맞지도 않습니다(2단계에서 이미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위와 같은 과정을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면 어느 순간 자동적으로 최적의 검사를 선택해 실시하고,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하면서 Key word를 찾고, 그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핵심 개념을 찾아서 그걸 지지하는 검사 sign들을 자연스럽게 선별하게 됩니다.
그러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한결 손쉽죠. 정보의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허우적대는 일이 현저히 줄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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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는 심리검사 + 행동 관찰 + 면담 + 전문 지식에 의한 해석 등으로 이루어지는 매우 복합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심리검사의 비중이 크다 보니 많은 평가자들이 심리검사의 검사 sign에만 치중해서 case formulation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형적인 검사 profile만 찾으려고 애를 쓰거나 눈에 띄는 일부 검사 sign에만 치중하게 되어 잘못된 formulation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심리검사 전에 의뢰 사유를 확인하고 그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뢰 사유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적절한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많아서 의뢰 사유를 통해 가설을 설정하기 위해 확인해야 하는 아주 핵심적인 점검 사항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일단 정확한 용어는 아닙니다만 심리평가를 피검자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과정이라고 전제하고 문제라고 통칭해서 사용하겠습니다.
1. 문제의 진행 과정 : 수직적 접근
: 피검자의 문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어 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시간 순서에 따라 확인하는 것이죠. 정신과 병원의 경우 chart를 확인해 일종의 퍼즐 맞추기를 하고 모자라는 조각을 면담을 통해 채울 수 있습니다.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지, 아니면 과거와 다른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는지, 새로운 문제는 이전의 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이는지, 문제를 야기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episode가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겁니다.
2. 문제의 일반화 가능성 : 수평적 접근
: 현재를 기준으로 이 문제가 특정 상황에만 국한되는 지(예; 선택적 함구증처럼 학교에서만 말을 하지 않는지, 남편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만 울화가 치미는지 등), 아니면 모든 상황에서 일관되게 관찰되는 문제인지(예; ADHD 아동이 집과 학교 모두에서 산만한 행동을 보이는 것 등)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일반화 가능성에 대해 알아야 이 문제가 상황 특정적인지, 성격 문제에 기반한 것인지, 특정 인물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인지 등등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초 자료가 생깁니다.
3. 문제에 대한 피검자의 주관적 해석
: 문제를 피검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중요합니다. 이는 특히 진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피검자가 문제를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편안하게 받아들이느냐(ego-syntonic), 아니면 고통스러우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생각하느냐(ego-dystonic)에 따라 진단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4. 문제로 인한 일상 기능의 피해 여부
: DSM-IV-TR 기준에 따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이 피검자가 일상 생활에서 이 문제로 인해 장해를 경험하는지의 여부입니다. 성추행에 대한 trauma로 인해 엘리베이터를 탈 수가 없거나 왕따를 당한 뒤로 등교를 거부하는 등의 문제가 이에 속합니다.
5. 문제에 대한 과거의 대처 방법 : 치료력
: 이 부분은 치료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문제에 잘 대처했다면 치료의 결과 확인을 위해 재평가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리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겠지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고 심리평가를 받는 것이죠. 그러니 이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다른 치료 기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향후 치료 계획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심리평가에서 가설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글에 기술된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필요 조건일 뿐 충분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니 피검자를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나름대로 추가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구축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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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를 하는데 있어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전 포스팅(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때는 의뢰 사유 파악을 하는 것이 가설 설정을 위해 중요하다는 식으로 말씀드리고 말았는데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임상심리학자들이 심리평가에서 중요한 것이 심리검사라고 알고 있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오히려 심리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설 설정일 수 있다고 봅니다.
심리평가 supervision을 진행하다 보면 선생님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함정 중 하나가 가설을 설정하지 않고 검사에만 치중하다보니 불필요한 검사를 실시하거나 정보를 모으기 위해 무리하게 면담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보가 과연 가치있는 것이냐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건 피검자를 괴롭히는 거죠. 피검자를 위해 실시하는 심리평가에서 피검자를 괴롭히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설을 설정하지 않은 관계로 모아들인 심리검사, 면담 결과가 정리되지 않고 중구난방이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고 case formulation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러니 supervision 때 엄청 많은 자료를 들고 오지만 핵심을 꿰뚫는 supervisor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자신이 놓친 부분만 안타까워합니다.
문제는 정보 부족이 아니라 쓸데없는 정보 과잉입니다. 피검자를 괴롭히는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심리평가를 하려면 가설을 설정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하겠지만 익숙해지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심리평가를 수행할 수 있고 시간도 많이 절약됩니다.
그러니 심리평가를 실시할 때에는 먼저 꼭 가설을 설정하세요.
학교에서는 그렇게 가설 설정을 포함한 과학적 검증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으면서 임상 현장에만 나오면 싹 잊어버리는 것이 저는 더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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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호소하는 문제 중 하나가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입니다. 심리검사도 꼼꼼하게 했고, 면담에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피검자에 대해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막상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들을 펼쳐 놓고 보면 피검자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고, 검사 시 또는 면담 시 피검자가 보인 행동, 말과 검사자의 주관적인 느낌만 막연하게 맴돌고, 이런 느낌이 검사 자료와 일치하지 않으니 힘들여 작성한 보고서가 한 편의 소설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리 읽어보아도 자신이 검사한 피검자같지 않다는 생경한 느낌...
많은 평가자들이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심리 검사의 sign을 해석하기 위한 제반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없이 (막무가내로) 심리평가를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심리 평가를 의뢰(refer)받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의뢰 사유 확인(이 사람은 왜 심리평가를 받으려고 하는가?)을 해야 합니다. 군 면제를 위한 병사용 진단서 발급을 위해서인지, 정신장애판정을 위한 보고서 제출인지, 교통 사고 이후 정신장애 추가 진단을 통해 보상금을 받기 위한 것인지 등등. 그 밖에도 의뢰한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려워 도움을 요청한 것인지, 진단은 명확하나 성격적인 역동이나 심리 상태가 궁금해서 요청한 것인지, 또는 자살 위험성을 평가하거나 치료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피검자의 심리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인지 등 의뢰 사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은 검사 도구의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통 사고 후 뇌손상에 의한 인지 기능의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라면 Full Battery보다 신경심리평가를 실시해야 할 테니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의뢰 사유 파악이 가설 설정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뢰 사유가 정신 분열병으로 인한 정신장애판정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 피검자는 Axis I. Schizophrenia로 진단할 수 있는가?' 가 하나의 가설이 됩니다. 의뢰 사유에 의하면 반드시 이 가설을 검증해야 합니다. 따라서 평가자는 이 사람이 정신 분열병으로 진단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행동 관찰 시에도 사고 장애 양상이 나타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면담 시에도 증상의 발병과 경과, 현재 상태, 직업 기능, 대인 관계 등을 확인하는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심리 검사 및 보고서 작성은 두 말 할 것도 없죠.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은 넉넉하지 않은 심리 평가 시간을 절약해주고 평가자가 효율적으로 정보를 다룰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평가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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