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은 어디까지나 수다나 단순한 감정 발산이 아닌 심리 치료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체적 목표를 설정합니다. 접근 방법에 따라 구체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상담은 상담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상담 목표를 세우지 않고(혹은 모호하게만 세우고) 상담을 하는 상담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상담 목표 설정의 시작은 상담자가 '이 내담자가 상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겁니다. 그 궁금증에서부터 질문이 시작되니까요.
상담자가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담자가 호소하는 내용과 배경 정보 및 심리평가 결과가 일치하는지를 꼼꼼히 맞춰봐야 하고요.
자, 이제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가 상담 목표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들었다면 이제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회기 제한이 있는 단기 상담은 말할 것도 없고 장기 상담이라고 해도 내담자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효율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려면 순서를 정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의 수가 적고 구체적이며 계량화할 수 있다면 가장 좋지만 대개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는 수도 많고 모호하게 마련입니다.
내담자가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을 호소할 때 우선 순위를 정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원인'과 '결과'로 나누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가족 내 불화를 해소하고 싶다, 불면과 우울감이 심하다, 별 일 아닌 일로 남자 친구와 계속 갈등이 있다는 호소를 하는 성인 여성 내담자가 있다고 해 보죠.
* 원인이 여전히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원인에 해당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목표
: 위의 예에서 아버지의 폭력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면 불면, 우울감, 남자 친구와 갈등은 후순위입니다.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제거 또는 감소시키는 것이 최우선 목표가 됩니다. 아버지를 분리하거나 내담자 본인의 심신 안정을 위해 독립 또는 도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 원인이 더 이상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면 결과를 다루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
: 더 이상 아버지의 폭력을 당할 위험이 없다면 불면, 우울감, 남자 친구와 갈등을 먼저 다뤄도 됩니다. 물론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온 가족이 받은 상처도 다뤄야 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됩니다. 다시 불면과 우울감, 남자 친구와 갈등 중 어느 것이 더 원인에 해당되느냐를 따져서 남자 친구와 갈등이 심할 때 불면과 우울감이 심해지면 갈등이 원인, 불면과 우울감이 결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자 친구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불면이나 우울감보다 갈등을 해결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가 항상 매끄럽게 나눠지지는 않지만 내담자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두서없이 이야기할 때 결국은 그 안에서 원인과 결과에 해당하는 내용들로 어느 정도 나눠지게 마련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분류해서 접근하면 상담 목표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데 어느 정도 기준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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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교육을 하다보면 칭찬과 격려의 차이를 모르는 부모가 너무 많다는 것에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부터 칭찬과 격려가 다르지는 않았겠지만 이제는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사용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달리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에 정리를 해 봤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둘 다 정적 강화물로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실생활에서 부모나 선생님 등 윗사람이 자녀나 학생에게 사용할 때 뚜렷한 지각 차이가 존재합니다.
격려가 주로 과정 중에 있는 행동이나 상태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아주 잘하고 있는데?")인데 비해 칭찬은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 결과물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렇게까지 해 내다니 대단하구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격려가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비해 칭찬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죠. 당연히 성장 가능성과 지속성의 측면에서 격려가 칭찬보다 더 나은 피드백입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나 하더라도 칭찬보다는 격려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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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Ellis의 A-B-C 모형을 간단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 B -> C
각 구성 요소는 각각
A(Antecedents or Activating events) : 선행 사건 또는 촉발 사건
B(Beliefs) : 신념
C(Consequences) : 결과
입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해 우울증에 걸린 부인을 치료한다고 해보죠. 문제는 남편이 술에 진탕 취해 들어와서 시비거리를 찾아내면 그걸 빌미로 마구잡이로 자신을 때릴 때 이 부인이 남편이 아닌 자신을 비난한다는 겁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으니 남편이 때리겠지, 내가 내조를 조금만 잘 했어도 남편이 그러지는 않았을텐데 맨날 술 마시고 때리는 걸 보면 나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 보다' 하면서 자기를 비하함으로써 점점 더 무기력과 우울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죠.
위의 예를 아주 단순하게 A-B-C 모형에 대입하면
A :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부인을 때림
B : 자신이 남편에게 맞아도 싸다고 믿음
C : 매사에 우울하고 무기력해짐
처럼 분석할 수 있습니다.
Ellis의 A-B-C 모형을 활용하는 치료자는 대개 B에 해당하는 내담자의 부정적 신념이나 자동적 사고 등을 교정하는 것에 치료의 중점을 두지만 사실 현장에서는 A, B, C 모두에 치료적 초점을 맞추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각 요소의 비중과 접근 방법의 난도 차이가 있을 뿐이죠. 변화 시 효과성은 A가 제일 크고 그 다음이 B, C의 순서지만 어려움의 정도도 A, B, C 순이기 때문에 쉽지 않기는 합니다.
남편이 알코올 중독이고 하루가 멀다않고 술에 취해 들어와 폭력을 휘두르는데 인지 오류만 교정해서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실제로 이런 상황에서는 인지 오류마저도 교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결된 것처럼 보여도 재발하기 쉽죠.
선행 사건(A)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 남편의 알코올 중독과 구타, 이 두 가지가 개선이 필요한 선행 사건이죠. 이 두 가지 요소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모두 개선해야 합니다. 남편의 폭력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법의 도움을 받는다든가(경찰, 변호사, 여성의 전화 등의 지원 필요), 시댁 또는 친정 친지의 도움을 받아 알코올 중독에 대한 치료를 위한 직면 계획을 세운다든가 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또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일시적인 별거를 할 수도 있고 유사시 아이들을 데리고 쉼터로 대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상담자와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신념(B)을 바꾸기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키거나 좀 더 효과적인 자기 대화법을 배우거나 사고의 오류를 탐색해서 수정하거나 비합리적인 신념을 찾아서 교정하는
전통적인 인지 치료 기법들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결과(C)를 바꾸는 것은 현장에서 흔히 accomodation이라고 부릅니다.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해도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구하거나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기술을 배우는 것, 독립을 위한 경제적 자립 연습을 하는 것,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지지적인 사람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상담도 포함). 이완이나 명상 등의 방법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법 등이 포함됩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땜질'이나 증상 완화적인 처방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A와 B의 변화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Albert Ellis의 A-B-C 모형을 활용할 때 B만이 아닌 A, B, C 모두에 대해 동시에 치료적 접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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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중독되면 결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든, 얼마나 많은 재정적인 피해를 입혔든 간에 한 번만 크게 따면 지금까지의 피해를 몽땅 보상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도박 중독 치료에서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불법 하우스에서 불법 포커를 하는 도박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죠.
만약 가족이 "불법 도박을 하게 되면 범법자가 될 수 있는데 어쩌려고 그러느냐, 법에 걸리니까 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도박자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가족이 법에 걸리는 걸 염려하니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박을 그만둔다는 생각따윈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과가 중요한 것이니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전에
'도박이 싫다고 이야기하라'라는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나는 당신이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는게 싫어. 아이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아빠가 되는 것도 싫고. 그래서 당신이 도박으로 얼마를 벌어오든 간에 땀 흘리지 않고 쉽게 돈 벌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 배어 있는 그 돈이 싫고 단 한 푼도 받지 않을거야. 그래도 당신이 끝까지 도박을 하겠다면 그 돈은 오로지 당신을 위해 쓰도록 해"
상담자 뿐 아니라 가족들도 과정이 나쁘면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결국은 나쁜 것이라는 관점에서 도박 중독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관점을 가져야 도박자도 다른 시각으로 도박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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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삼성 그룹의 이건희씨가 고려대에서 당한 수모(?)에 대해 고려대 게시판과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에 제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고려대의 올해 삼성 취업률을 떨어뜨린 총학은 자폭하라' 뭐 이런 류의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먹여 살리는 세계적 기업인 삼성에 XX같은 넘들이 감히...' 이런 류의 글이었습니다.
우선 명색이 초일류 기업인 삼성이 그룹 수장의 체면이 좀 깎였기로서니 기업의 이익 창출에 도움이 될 인재를 마다할 거라고 생각하는 무모함이 대단하군요. 솔직히 삼성이 만약 그런 예상이 들어맞을 정도 수준의 기업이라면 그다지 오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주제의 내면에 깔린 핵심은 '결과가 좋으면 좋은 거다'입니다.
총학에서 극구 반대한 기부금을 학교 당국에서 냉큼 받건, 학생들도 바라지 않는 편의시설을 짓건, 마음대로 삼성의 이름을 붙이건, 철학과를 비롯한 학내 구성원의 일체 의견 수렴 없이 학위를 팔건, 교수들에게 무조건 참석해서 자리를 채우라는 통보를 보내건, 그저 고대 출신을 많이 뽑아주었으면 좋겠고, 나를 뽑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사카린 밀수를 했건, 단가를 낮추기 위해 하청 업체에 무리한 부담을 전가하건, 분식 회계를 하건,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면서 증여세를 포탈하건, 직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인권 침해를 하건, 노조가입원을 쫓아내기 위해 불법으로 회유를 하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 설립을 방해하건, 국가기관의 조사행위를 방해하건, 20만 명 이상의 고용 창출에, 10조 원 이상의 순이익을 발생시키고, 세계의 대기업들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유일무이한 대기업이니까, 내가 배부르고 등따습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기업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 나만 배부를 수 있다면 절차든 과정이든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결과론적인 생각.
참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 무서운 생각의 결과로 우리는 몇 차례의 전쟁과 몇 차례의 인재를 통해서 수많은 아까운 목숨을 잃고, 피눈물을 뿌렸는데, 그 무서운 생각의 결과로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결과가 좋으면 상관이 없다라...
그 칼날이 자신의 목에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는지요. 자신은 영원히 달콤한 결과의 열매만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아주 심하게 극단적인 과정론자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면 그것이 제 아무리 멋져보이는 결과를 산출한다고 할지라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론적으로 보아도 시간의 차이일 뿐 과정과 절차가 무시된 결과의 달콤함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잠깐의 달콤함에 대한 댓가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의 피눈물이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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