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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영국의 걸출한 정신분석가 앤서니 스토의 역작인 이 책은 고독의 미덕을 알려주는 고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맥이 곧 능력이며, 대인 관계 맺기는 사회 생활의 기본이고, 폭넓은 관계가 아니면 문제 있는 걸로 보는 요즈음의 사회에서 스토는 고독이야말로 창의성의 원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대했던 책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고독은 'A Return to the Self'의 필수 조건이며 외로움이라는 것이 모든 인간이 반드시 느끼게 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역설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스토는 수많은 정신분석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이 말년에 고독 속에서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몰입하면서 행복을 느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고독의 가치가 창의적 결과물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스토가 고독을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독은 자신과의 대화이고 그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통로인데 스토는 그런 시각으로 고독을 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초반부에서 다루었던 '지금 우리가 고독해야 하는 이유', '혼자 있는 능력',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충족감' 정도만 다루었으면 좋을 법한 책이어서 더욱 아쉽습니다.
기대와 많이 달라서 그런지 마음으로 추천드리기는 어렵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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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은 자기 분석 과정을 통해 청년의 임무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인 반면, 중년의 임무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만의 특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 위니캇은 아이가 처음에는 엄마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상태에서, 그 다음에는 엄마가 가까운 곳에 없는 상태에서도 혼자 있는 능력을 키울 때 자기 내면의 진짜 느낌과 접촉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엄마가 가까운 곳에 있을 때 그리고 나중에는 엄마가 없을 때도 스스럼없이 아이가 편안하게 혼자 있을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기대나 강요에 관계없이 자신이 정말로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능력은 자아 발견과 자아실현, 즉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와 느낌과 충동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다.
* 매슬로우는 창의적인 태도와 절정 경험을 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신경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어린 시절의 오랜 여파"로부터, 구속과 의무와 두려움과 희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나는 '치료의 개념'이라는 글에서 정신분석을 할 때 신경증 환자의 회복을 앞당길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요소는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사고 체계를 갖추는 것이며, 두 번째 요소는 환자가 다른 사람과 유익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두 가지 요소 모두 우리 삶의 일부이지만, 성향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주로 인간관계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흥미, 믿음, 사고의 형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 원시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의견이나 다양한 견해가 좀처럼 고려되지 않았다. 집단 연대 유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에서는 독창성이 질식당할 수 있다. 브루노 베델하임은 키부츠(이스라엘의 생활공동체)에서 자란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을 연구했고, 집단 감정의 공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환경이 창의성을 해친다는 결과를 얻었다.
* 융은 프로이트의 태도에 대해 주체가 객체를 찾고 객체를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인식하는 외향적 태도라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반면 아들러는 주체가 자율과 독립을 확립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주체는 객체에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내향적 태도를 취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과잉 적응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외향적인 사람은 고독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또한 어린 시절의 분리되고 고립된 경험 때문에 제대로 내면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위안을 얻는다는 얘기도 했다. 이제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창작 과정은 개인이 우울증에 짓눌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말하려 한다. 창작 과정은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지배한다는 느낌을 되찾게 해주며, 사별로 자아에 상처를 입거나 인간 관계에서 자신감을 잃고 우울증에 빠질 때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게 해준다.
* 다카우와 부헨발트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베텔하임은 그곳에서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삶을 포기하고 죽은 수용자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 사람들, 그들의 인간성을 박탈하고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이들의 목적에 굴복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애정 어린 유대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 뿐만 아니라 대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단순히 성 에너지와 목표의 파생물이나 부산물은 아니다. 관심사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을 인지하고 정서적인 고리를 형성하는 선천적인 성향의 표현이며 인간 발달의 중요하고 독립적인 면이다.
덧. 이 책은 e-book으로 읽었기 때문에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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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영화
트위터가 아니었다면 놓쳤을 영화이고 안 봤다면 분명 후회했을 영화(끝까지 몰랐으려나)입니다.
영화 포스터도 impact가 없고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라고 해서 별로 혹하는 것도 없었는데 다행히 트위터의 호평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일부러 아이맥스 3D로 보느라 용산 CGV까지 갔다 왔습니다.
시간이 안 맞아 밤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걸 봤는데 밤에는 5층 이후로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아 외부 통행로를 이용해 6층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걸 (당연히) 모르고 15분이나 헤매느라 자칫하면 영화 초반부를 놓칠 뻔 했습니다. 다행히 다른 영화 예고편을 상영하는 바람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죠. 이 날 에피소드로 용산 CGV에 개인적으로 마이너스 200점 줬습니다. 여담이고요.
이 영화를 제가 별 5개로 평가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주 공간에서의 사고라는 매우 참신한 주제를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에 펼쳐놓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예전에 한 때 깊은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재난을 다룬 영화들이 유행이었던 것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까 모르겠습니다. 행동의 제약이 극대화된 환경에서,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알아서 탈출해야 하고, 생존 확률은 극히 희박한 상황은 비슷합니다만 바닷속은 그랑블루 같은 영화나 디스커버리 채널과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닌 이상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둡고 춥고 무섭죠. 하지만 우주 공간은 그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구와 태양만 갖고도 말이죠.
관객이 볼 수 있도록 (살아서) 얼굴을 드러내는 배우는 산드라 블록과 조지 클루니 딱 두 명이고 그것도 중반 이후로는 산드라 블록의 원맨쇼입니다만 아무런 불만이 안 나올 정도의 영화입니다. 트위터에는 엄청난 몸 만들기를 감내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산드라 블록의 말벅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우주 공간의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극히 대조를 이루는, 살아남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를 숨죽이며 지켜보느라고 사실은 말벅지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정말임~).
자신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지구의 거대한 형체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시시각각으로 줄어드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자 처절히 싸우다 결국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우연히 연결된 채널을 통해 들려오는 지상에 있는 강아지의 울음소리를 산드라 블록이 따라할 때 저도 같이 울컥하더군요.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그녀가 느꼈을 극한의 공포와 외로움이 그 울음소리를 타고 제게도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영화 말미에서 그녀가 경험하게 되는 강렬한 체험(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 묘사하는 것이 참 조심스럽네요)도 제가 느낀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조지 클루니의 담담함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로 산드라 블록의 연기는 아주 현실적이었지요.
참 특이한 소재인데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영화, 그래비티
추천합니다. 꼭 보시고 가능하면 아이맥스처럼 큰 화면이나 4DX처럼 생생한 화면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덧. 산드라 블록이 우연히 연결된 채널에서 지구의 남자와 대화를 시도하나 서로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지만 아이와 강아지의 울음소리로 잠시동안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그냥 단순한 영화 속 장치가 아니랍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영화를 본 분만 참고하시라고
링크 걸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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