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모 카페에 A군 성격 장애와 Bipolar Disorder의 공병율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는데(하필 A군 성격 장애라는 것도 뜬금없기는 합니다) 달린 댓글들을 보고 복장이 터져서입니다.
관련 문헌을 보면 성격 장애(특히 B군)와 Bipolar Disorder의 공병율이 높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부 좀 했다 하는 임상가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도 수련을 받을 때는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reference에 근거해 심리평가보고서에 공존 진단을 내린 적도 많습니다. 당연히 의사도 그런 문헌에 의거해 변별 진단을 해 달라고 의뢰했으니 의사의 의중에 맞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상담을 하게 되면서 문헌에 있다고, 연구 결과가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뼈저린 경험을 많이 하게 된 이후로 저는 항상 모든 결과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실제로 그런지 제가 직접 보고, 만지고, 씹고, 뜯어 맛보고, 확인한, 그런 것들만 믿게 되었습니다.
제 경험 상 Bipolar Disorder와 성격 장애의 공병율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걸 병원 장면에서 확인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격 장애와 Bipolar Disorder 모두 횡단적인 심리평가로는 진단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종단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장애인데 병원에서는 그러기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과거력을 바탕으로 성격 역동이나 Bipolarity를 retrospective한 방식으로 추정해야 하는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당연히 확증 편향이 생기기 쉽습니다. 게다가
'과연 심리평가로 성격 장애를 진단할 수 있는가'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평가로 성격 장애를 진단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Bipolar Disorder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환자의 경우에도 Bipolar Disorder인지, Acute Stress Disorder인지, Brief Psychotic Disorder인지, Schizoaffective Disorder인지, 약물 남용에 의한 급성 정신증 증상인지 변별 진단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런 환자는 증상이 완화되어 퇴원을 한 후 외래로 올 수 있기 때문에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도 의사들이나 가능하지 임상심리학자가 그 경과를 끝까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그랬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 뿐이죠. 사실 의사도 별 차이 없는 게 이미 진단을 받은 환자를 외래에서 치료할 때 정신 역동 치료를 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거에 내려진 진단에 맞는 약물 치료만 follow up할 뿐입니다. 진단이 틀렸을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병원에서 Bipolar Disorder와 성격 장애의 공존 진단을 받고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들을 재평가하고 추적 관찰하다 보면 진단이 맞는 경우가 하나도 없습니다. 가끔 틀리는 경우도 있다 정도가 아니라 진단이 맞은 적이 없을 정도로 죄다 틀립니다. 종합병원 급의 큰 병원일수록 진단 정확도가 더 떨어집니다.
그럼 이런 사례는 어떤 양상으로 많이 나타나느냐 하면,
성격 장애로 볼 수 있는 사례는 많습니다. TCI를 보면 기질 상의 취약성이 존재하고 성격 미발달로 인해 기질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그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가지 문제, 즉, 자살 시도나 자해로 나타나는 PTSD 증상, 중독으로 나타나는 파괴적 관심 끌기, 내면 아이 미성숙으로 야기되는 수면 장해 등의 문제를 과도하게 Bipolar Disorder의 진단 기준에 끼워맞춰 진단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성격 장애를 제대로 진단할 수 없기 때문에 익숙한 Bipolar Disorder 진단을 먼저 내리고(증상 완화적 접근을 해야 하는 병원의 특성 때문에 그렇겠지요) 그걸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을 성격 장애 범주에 꿰맞춥니다. 그러니 엉뚱한 공존 진단이 붙을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성격 장애와 Bipolar Disorder의 공병율이 높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1. 문헌과 연구 결과를 아무런 비판적 태도없이 현장에서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맹신하는 매우 순진한 분들
2. 수련 중이라서 뭔가 미심쩍더라도 supervisor나 선배 레지던트의 말이 옳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분들
3. 전문가지만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장기로 진행해 본 경험이 거의 없이 심리평가만 주로 하는 분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성격 장애와 Bipolar Disorder의 공병율이 높다는 주장을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만약 본인이 심리치료나 장기 상담을 많이 해 봤는데 성격 장애와 Bipolar Disorder의 공병율이 실제로 높은 걸 확인한 선생님은 제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그런 사례가 있다면 저도 제 선입견을 깰 소중한 기회로 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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