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는 인권 운동의 내공으로 다져진 류은숙 활동가가 쓴 인권 역사서 '인권을 외치다 : 가장 낮은, 가장 약한 사람들의 열망으로 바꿔온 인권의 역사(2009)'를 북 크로싱합니다.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부터 2006년 유엔의 '장애인 권리 협약'에 이르기까지 야만의 시대에 맞서 싸운 인류의 인권 투쟁사가 빼곡히 적힌 책입니다.
많은 내용을 소개하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다소 딱딱해졌고 그래서 그다지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닙니다만 인권을 공부하거나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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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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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인권은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권은 인간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누구나 차별없이 누려야 할 필수적인 권리이다'
이 말은 인권이 어떤 권리라는 것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말임과 동시에 이런 필수적인 권리가 현실 세계에서는 얼마나 쉽게 유린되고 핍박받을 수 있는가를 쉽게 상상케 하는 말입니다.
인권은 너무나 쉽게 무시될 수 있기 때문에, 또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굴욕과 고난에서 자유롭다 말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권리입니다.
류은숙 선생이 1992년부터 무려 20년 동안의 인권 활동으로 다져진 내공으로 쓴 이 책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차별없이 누리기 위해 투쟁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권 역사서입니다.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부터 2006년 유엔의 '장애인 권리 협약'에 이르기까지 야만의 시대에서 사람의 권리를 개척하기 위해 싸운 인류의 인권 투쟁사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교육권과 관련된 '교육의 차별 금지 협약',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 '네 가지 자유에 관한 일반 교서'. 성적 지향성에 대한 차별을 다룬 '요그야카르타 원칙', 장애인의 독립을 말한 '장애인 권리 협약',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를 지향하는 '노인을 위한 유엔 원칙', 아동을 자비의 대상이 아닌 권리 주체로 천명한 '아동 권리 선언', 다문화 시대의 권리와 의무를 말하는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 협약'까지 그야말로 이런 것도 인권에 속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무지를 탓하게 만드는 다양한 인권들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국제 협약과 권리 선언 중 우리나라가 비준한 게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어 한없이 부끄럽고 창피한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낯뜨겁더군요.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로 따졌을 때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인권 후진국입니다.
굉장히 좋은 책이고 꼭 필요한 책입니다만 모든 인권 문헌이 매 장마다 원문 그대로 실려 있어 읽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인권을 공부하는 분들에게는 필독서 반열의 책입니다만 저같은 일반인 독자가 읽기에는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책이라서 별 3개로 평가했습니다.
그래도 월덴 3를 들르는 열독가들께서는 알아서 챙겨 읽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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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Lynn Hunt는 '선언'을 '주권의 전환'으로 풀이한다. 그래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이제 권력이 왕에서 인민에게 옮겨졌음을 선포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침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권리를 빼앗기거나 침범당하는 것이라면, '배제'는 처음부터 권리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이다. * 바뵈프의 구상과 시도는 '사적 소유제 폐지'라는 사회주의 운동의 선례를 보인 것이다. * 파리 코뮌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 운동이 부르주아 운동을 제쳐놓고 스스로의 권력을 주장한 사건이다. * 천부인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미국 '독립 선언서'이다. * '네 가지 자유에 관한 일반 교서' : 의사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장애인 권리 협약'에는 '보편적 설계(universal design)'라는 말이 있다. 변형이나 조정, 또는 특수설계를 할 필요없이 최대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품, 환경, 프로그램 및 서비스를 말한다. * 우리나라는 2004년 9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아동 매매, 아동 성매매 및 아동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선택 의정서'를 비준해 가입국이 되었다. *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겨라. - 헨리 데이비드 소로(시민의 불복종)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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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영화
섹스 자원봉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함께 자리하면 안 되는 두 단어가 기묘하게 결합된 느낌인가요? 아니면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 주문을 말해버린 느낌인가요?
이 영화의 초반에 섹스 자원봉사에 대해 거리 인터뷰를 한 내용(물론 각본에 의해 조작된 것이겠지만)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엉덩이에 벌침이라도 맞은 양 화들짝 놀라며 게거품을 물더군요.
우리가 어느날 갑자기 사고를 당해 팔과 다리만 마비되는 영구 장애를 입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먹고 싸고 움직이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치고 성욕은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은 장애인이 되면 성욕도 사라져야 한다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장애인은 말 그대로 특정 영역의 기능에만 장애가 있는 것이지 나머지는 비장애인과 똑같습니다. 사지를 사용할 수 없다고 있던 성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은 당연히 성욕도 사라져야 한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하지만 비장애인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민감한 부분을 비춥니다. 사실 방법을 고민하지는 않았을 뿐 장애인도 당연히 성의 권리를 누려야한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제게 이 영화는 그다지 불편한 진실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의 차원으로 들어가니 이야기가 좀 다르더군요. 성 기구를 사다주는 것도, 사랑을 나눌 때 체위를 바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직접 자신이 상대가 되어 주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더군요.
제가 머리속에서 갖고 있는 자원 봉사의 개념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대체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스스로 얼마나 편협한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그 바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고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뭔가 왜곡된 성애를 자극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을지 호기심을 가졌을텐데 정사씬에서 코끝이 찡해보기도 정말 오랜만인 영화입니다.
페이크 다큐이고 연출도 아주 치밀하지는 않지만 영화를 통해 전하는 울림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되는 좋은 영화입니다.
추천합니다.
덧. 이 영화는 현재 곰TV, 맥스무비, 벅스뮤직, 유씨네 등의 사이트에서 무료 상영되고 있습니다. 많이들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덧2. 이 영화의 후반부에 황천길씨가 힘겹게 써내려간 "배는 안 고파요. 사람이 고파요" 이 말은 장애, 비장애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 체온의 따뜻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되새겨 주는 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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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 소위 말하는 운동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회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것들이 노동해방이니, 민중이니 하고 몰려다니는 것이 꼴같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까지 폄하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도 초심을 유지하는 일관성에 있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제 주위에서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들 중 지금도 그 당시의 초심을 지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 뿐입니다. 나머지는 제 기준으로 볼 때 형편없이 타락해서 거의 자본주의의 노예나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거부감과 선입견때문에 그래도 지금보다 순수했던 그 때가 아니면 읽기 힘든 책들을 멀리했던 것이죠. 제게는 참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30살이 넘어서야 읽었고, 전태일 평전은 부끄럽게도 오늘에야 읽게 되었습니다.
과거 어두웠던 그 시절에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탄압을 받을 수 있었던 전태일 평전은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조영래 변호사(꼭 이런 빛과 소금과 같은 분들은 일찍 타계하고 '29만 원' 같은 인간 쓰레기는 호위호식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신이 이 세상을 시험대에서 내려놓을 생각이 별로 없나 봅니다)가 수배 생활 도중 혼신의 힘을 다해 집필한 책입니다. 1983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그 당시는 저자의 이름조차도 밝힐 수 없을 정도로 엄혹한 시절이라 1991년에 1차 개정이 된 후에나 알려지게 됩니다. 이 책은 2001년에 개정된 2차 개정판입니다.
그 당시 치열했던 삶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예리한 어투이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전태일 열사가 걸었던 행적은 물질자본주의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라면 한번쯤은 되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책, '전태일 평전'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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