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도박 중독자가 이번 한번만 더 자신의 운(또는 기술)을 시험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도박을 끊겠다고 가족이나 보호자(또는 상담자까지)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이번 한번만 하고 그만둔다는 핑계부터 버려라'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조건을 걸고 도박을 그만둘 것을 결정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당장 단도박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상담 현장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라포가 채 형성되지 않은 도박자가 간곡히 이야기를 할 때 상담자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실패할 것이 뻔한 도박자의 시도를 계속 방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어떤 도박자가 1년 동안 삶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용돈 범위 내에서 도박으로 돈을 딸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 보겠다고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죠.
이 때 1년 뒤에 점검했을 때 당연히 기대했던 수익을 낼 수 없을 것이니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다른 영역을 상담하면 되지 하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유예 기간이 끝난 뒤 결과만 평가하려고 하면 도박자는 당연히 자신이 원했던 대로 되지 않은 온갖 이유와 핑계를 합리화 기제를 통해 만들어내 유예 기간을 연장하거나 테스트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무력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상담자는 1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최대한 잘게 쪼개서 도박자가 중간 점검을 하도록 촉구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반기 보다는 분기, 분기 보다는 매 달 확인하는 것이 더 좋은데 삶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그만두려고 마음 먹을 때 그만둘 수 있는지, 수익이 얼마나 나고 있는지, 그 추세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수익이 나기는 커녕 계속 손실이 나고 있으니 헛된 노력 그만하고 이제 도박을 그만하라고 중간에 push하면 안 됩니다.
중간중간에 상담자가 도박자의 시험 과정을 확인하는 목적은 도박자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 위해서이니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것이며, 모든 과정을 당신이 통제하고 있으니 결과도 당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묵시적인 다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런다고 도박자의 합리화 기제가 작동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강도가 약해지고 논리의 틈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상담자에게는 반전의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그 포인트를 잡아 틈을 넓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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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년 전에 올린 포스팅 중에
'심리평가보고서 작성의 ABC'라는 글이 있습니다.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쓸 것인지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B(기술, description), A -> B(설명, explanation), B -> C(예측, prediction)를 염두에 두고 쓰면 좋다는 내용이었죠.
물론 A -> B -> C를 모두 담아낼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심리평가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검자의 현재 심리 상태 뿐 아니라 이러한 상태를 야기한 가장 신빙성 있는 원인을 찾아 설명하고, 게다가 향후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러한 상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한 후 어떠한 개입을 해야 하는지, 제언까지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평가자는 심리평가의 어떤 요소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인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둘 것인지, 가설을 검증해 원인을 밝혀내는 쪽에 집중할 것인지, 경과의 진행 여부를 추적하기 위해 최대한 가능성이 높은 예측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죠.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상담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심리평가에만 주력하는 임상가들과 달리 상담자는 주로 하는 업무가 상담이고 심리평가는 상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에서 실시하게 됩니다.
저는 상담자가 심리평가를 실시한 후 심리평가보고서를 쓸 때 A -> B 보다는 B -> C에 집중하라고 권하는 편입니다. 사람의 심리는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서 정확한 인과 관계를 밝히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설사 가능하더라도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원인 찾기에만 집착하다보면 검사 결과가 아닌 상담 내용이나 배경 정보 등의 비검사 결과를 갖고 소설을 쓰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A -> B가 아닌 B -> C에 집중한다는 건 수검자에게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고, 그러한 어려움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까지 진행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개입을 해야 하는지를 다루겠다는 것이니, 내담자를 도와 내담자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상담자의 마음 자세와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 수검자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예측하려면 변별 가설을 정확하게 세워야 하기 때문에 심리평가를 위한 가설 설정을 위한 공부에도 절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상담자는 심리평가보고서를 쓸 때 A -> B 보다는 B -> C를 좀 더 비중있게 다루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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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의 최종 결과는 심리평가보고서입니다.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심리평가를 실시한 것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심리평가보고서가 심리평가의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니만큼 심리평가를 실시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실시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의뢰 사유를 명확히 한 상태에서 심리평가를 실시했어야 합니다. 변별 진단을 위해서인지, 지적 장애 판정을 위한 지능 지수 산출이 필요해서인지, 현재 피검자가 경험하고 있는 우울감이 어느 정도로 심한 것인지 등등.
그런데 그냥 단순히 의뢰 사유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피검자를 괴롭힌(?) 댓가로는 뭔가 부족하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면서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면 좋습니다.
일명 ABC 모델에 맞춘 심리평가보고서 작성입니다. 인지 행동 치료의 ABC 모형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냥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 뿐입니다.
A -> B -> C
A: Explanation(설명)
B: Description(기술)
C: Prediction(예측)
가장 먼저 설명드릴 부분은 B입니다. 기술(description)하기 위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현재 피검자가 다양한 심리측정영역에서 어떤 상태인지를 기술하는 것이죠. 지능이 얼마이고, 정서 상태는 어떻고, 주의력은 어떻고 등등. 아무리 엉터리 보고서라도 B에 해당하는 기술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근거에 기반해야 합니다. 기술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걸 심리평가보고서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A입니다. 설명(Explanation)을 하기 위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단순히 피검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추론과 가설을 설정하고 심리검사 결과를 통해 검증해서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겁니다. 왜 이 피검자에게 발표 불안이 생겼는지, tic 증상이 왜 더 심해지는지 등에 대한 원인을 알려주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심리평가보고서는 최소한 B(기술)와 A(설명)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C입니다. 예측(Prediction)까지 하는 것이죠. 현재 피검자의 심리 상태 기술과 원인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어떠한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예상과 제언 부분까지 포함하는 것이 C에 해당합니다.
A, B, C 모두를 포함할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B, 가능하면 A -> B, 목표는 A -> B -> C를 모두 포함하게끔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토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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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YES24
책 디자인도 책을 구매하는 기준 중 하나로 당당히 거론될 만큼 요새는 디자인이 예쁜 책이 많이 나옵니다. 디자인만 보고 책을 사지는 않겠지만 책 내용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 예쁜 책이라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범우사의 범우사상신서 시리즈 중 하나로 출판된 이 책은 책 디자인이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필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예쁘지 않은 책 표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학생 때에도 많이 읽지 않은 종류의 책이지만 주로 딱딱하고 어려운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책이 많았지요. 아마 저도 추천을 받지 않았다면 선뜻 구매해서 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내용이 훌륭한 책은 디자인과 상관없이 감동을 주는 법인데 이 책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인 슈마허가 쓴 책을 몽땅 구입했으니까요.
이 책의 저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는 1911년 생으로 경제학 석학인 슘페터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으며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건너간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경제학의 태두인 케인스를 만나 교분을 나누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슈마허의 경제학은 숫자로 양화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폭넓은 동서 사상의 총화와 이를 소화한 깊은 내공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슈마허의 뜻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경제학 서적이 감동을 준다니 믿기 어렵지요?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의 목차를 보면,
1부. 현대 세계2부. 자원3부. 제3 세계4부. 조직과 소유권
처럼 딱딱하기 이를데 없는 소제목에다가 생산, 규모의 문제, 경제학의 역할, 토지 이용, 공업 자원, 기술, 개발, 실업, 소유권처럼 여느 경제학 서적에서도 당연히 다루고 있는 개념들을 다루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이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인 70년대 초에 슈마허는 일찌기 과학, 기술과 같은 힘의 발전에 열중한 나머지 인류가 남용하는 자원과 파괴되는 자원, 그로 인해 말살되는 인간성에 날카롭게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유물주의 철학이 곧 현실로부터 반격을 받게 될 것임을 너무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현대 사회의 우리가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이 냉혹한 현실이죠.
경제학자이지만 사상가이자 실천가에 더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훌륭한 저작, '작은 것이 아름답다'.
추천합니다.
덧.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제목만 보고 일본 전자 제품을 떠올리시면 골룸입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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