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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고전인 '천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1979)'를 읽은 뒤 앨리스 밀러에게 꽤나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책을 다시 읽게 된 계기는 '천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가 1979년에 출판된 책이라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할 수 밖에 없을테니 그 이후에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거나 최소한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2004년에 출판된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천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 이후로 별로 바뀌지 않았더군요. ㅠ.ㅠ
앨리스 밀러는 모든 폭력의 뿌리가 부모의 학대와 체벌에 있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의 대표 주자인데요. 이 책에서도 논조가 그대로 유지됩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 그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면 몸이 대신 아프게 되고 이를 피하려면 자신의 자녀에게 똑같은 고통을 줘야한다. 이런 악순환이 일어나는 이유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네 번째 계명'을 따르기 때문이며 용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용서하면 언젠가 사랑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버려야만 치유가 될 수 있다.
다행히 이 책에서 앨리스 밀러는 모든 병리적 문제의 뿌리가 부모의 학대 때문이라는 무리한 주장을 더 이상 펼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천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 소개 포스팅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애착 외상은 다양한 병리적 증상을 야기하니까요. 그리고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는 정언 명령이 이러한 병리적 증상을 유지하는 강한 족쇄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니체,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프리드리히 쉴러, 아르튀르 랭보, 미시마 유키오 등 시대를 넘나드는 문장가, 예술가, 사상가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이 모두 부모의 학대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우를 범합니다. 물론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되는 모든 위인들이 모두 그랬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또한 앨리스 밀러는 굉장히 단호한 어조로 용서는 절대로 치유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단언하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대신 저는 순서가 중요하다고 보는 편인데 우선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부적절한 죄책감을 내려놓고, 자신을 학대하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자신부터 용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학대의 가해자인 부모를 용서해야 하는데 이는 과거를 잊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가해자인 부모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의 기술(2006)'에 나오는 것처럼 과거에 받은 분노와 상처에 새로운 틀을 씌우는 작업이죠.
앨리스 밀러는 아마도 가해자인 부모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과거를 잊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용서로 간주하는 모양입니다만 실제로 용서는 미래로 향하기 위해 과거를 내려놓는 작업에 가깝죠. 그래서 절대로 용서가 치유를 가져올 수 없다는 그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재가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보다는 읽기에 한결 낫지만 그래도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2002)'보다는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앨리스 밀러의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앨리스 밀러의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 중에서 '사랑의 매는 없다'만 아직 못 읽었는데 안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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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가 치료를 낳은 적은 결코 없다.
* '네 번째 계명'은 말한다. "오래 살고 싶거든, 자격이 없더라도 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너는 분명히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서 파괴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내면화된 부모와 헤어져야 한다. 그래야 삶을 긍정하고 자신을 존중할 수 있다.
* 필요한 것은 부모가 어린 시절에 베풀어주지 않았던 것을 언젠가는 베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다.
* 나는 과거에 학대받던 아이에게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나서 곁에서 도와주겠다고 베안하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 내면화된 부모에 대한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과정의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과 죄책감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또한 꼭 거쳐야 할 과정들도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부모에게 바랐던 것, 요컨대 솔직하게 감정을 주고받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오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 용서하면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용서는 미움을 은폐하는 데만, 그리하여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심화하는 데만 도움을 줄 뿐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더 너그러워진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 충동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 진실, 그 진실 전체를 남김없이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부모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되도록 정확하게 알게 되면, 우리가 부모의 잘못을 되풀이할 위험은 사라진다.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 부모에 대한 총체적인 비난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을 받으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관점을 찾아내고, 애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애착을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애착은 감사, 연민, 부정, 동경, 미화 그리고 수많은 기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기대는 늘 충족되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 또 충족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성인이 되는 길은 자기가 받은 잔인한 대우를 용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인식하고 매 맞던 아이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는 데 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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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명 대중 철학자인 앤서니 그레일링이 쓴 책입니다. 저자가 제목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그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철학적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선택에 따라 살고 이를 통해 좋은 것(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도 역시 철학)을 이루도록 자극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철학은 사실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어떤 질문에는 답이 없고, 어떤 질문에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과학적, 미학적, 심리학적 영역에 속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적 주제와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철학적인 주제가 되면 안 되는 이유란게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면,
* 우리가 행복하면 선해질까? 그리고 우리가 선하면 행복해질까?
* 어떤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행동이 완벽해야 그 문제에 대해 윤리적 관심을 표명할 수 있을까?
* 윤리도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 과정에서 나왔을까?
*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일까?
*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불행을 겪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가능할까?
* 칭찬이 상보다 큰 보상일까?
* 무엇이 뉘우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다위니즘이 종교적 믿음과 양립할 수 있을까?
*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 사실을 아는 것과 방법을 아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 개인을 삶의 어느 시점에서나 과거의 그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 성형수술의 가치를 의심하는 것이 정당할 때는 언제일까?
* 나쁜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용인될까?
*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을까?
*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
* 시민의 자유는 왜 중요할까?
* 범죄자와 불량배에 맞서 '나서는 것'이 현명할까? 그러는 것이 도덕적 의무일까?
* 스포츠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쁠까?
보시는 것처럼 굉장히 다양한 영역에서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을 종횡무진하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저기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은데,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주제에 대해서도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는 지적 자극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 보다는 저자 개인의 종교관, 도덕관, 사회관, 가치관을 강요하는 듯 강한 어조로 밀어부치는 글이 많아서 읽으면서 썩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강요받는 느낌을 주는 글을 아주 싫어라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 있으니 직접 읽으면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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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는 진실을 말해 나를 도울 때와 거짓말을 해 나를 도울 때를 아는 사람이다.
* '도덕적(moral)'이라는 말과 '윤리적(ethical)'이라는 말은 각각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윤리'는 어떤 도덕 체계에 들어 있는 개념과 원리를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개인이나 조직이 삶과 행동의 규범으로 채택한 일련의 원칙과 태도, 목적, 기준이다. 이에 비해 '도덕'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의무와 책임, 결과와 의도 같은 본질적 문제를 다루며 옳거나 좋은 행동과 의도에 관한 것이다. 윤리가 도덕보다 범위가 넓다.
* 분명 사람들이 좋은 방향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 역사에서 언제나 열렬한 도덕주의자들은 최선이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선에 방해가 되었다.
* 니체는 부당한 비난보다 과분한 칭찬이 우리를 더 곤란하게 한다고 했다.
* 일단 윤리적 테두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되도록 빨리 형상화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험담하지 마라.
* 아이자이어 벌린은 소극적 자유를 선호했는데 적극적 자유는 국가가 시민에게 가장 이익이 될 거라고 믿는 행동을- 따라서 모든 시민이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도, 시민들 각자가 실제로 그것을 욕망하든 욕망하지 않든 -처방하고 심지어는 강요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극적 자유는 사람들이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선호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영역을 규정한다. 그것은 존 스튜어트 밀이 깊이 숙고해서 제시한 자유의 고전적 개념이다.
* 개인의 부를 그 사람이 쓰는 것으로 평가해야지 그가 가진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 짧은 인생에서-인간의 평균수명이 1000개월도 안 된다는 것을 지칠 줄 모르고 지적해야 한다-부는 경험이고 노력이고 즐거움이고 에너지다.
* 부자의 정의가 돈이 아니라 사고 싶은 것을 '충분히 가진 것'임을 아는 사람이 너무도 적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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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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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은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미셸 푸코의 대표 저작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 미셸 푸코는 이 책에 대해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책'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책을 내놓기 이전 저작과 이후 저작을 구분하는 하나의 전기적 작품으로 명명하고 있죠.
이 책에서 푸코는 국가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감옥의 문제를 다루면서 권력의 정체를 폭로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푸코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으면서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로 쓴 이 책에서 이전에 썼던 고고학적인 방법론과 달리 계보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계보학이란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법과 달리 역사에 있어 고정된 법칙이나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 있다는 논리를 부정하고 그러한 가치관과 의미 속에 감추어진 권력과 억압, 굴종의 관계를 파헤치는 접근법을 택합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사건들의 뿌리는 추적하되 결정론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접근법을 이 책 '감시와 처벌'에 적용하면 감옥이라는 권력의 처벌 수단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감옥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과 신체에 대한 통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죠.
이는 목차만 봐도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제 1부. 신체형
제 1장. 수형자의 신체
제 2장. 신체형의 호화로움
제 2부. 처벌
제 1장. 일반화한 처벌
제 2장. 유순해진 형벌
제 3부. 규율
제 1장. 순종적인 신체
- 분할의 기술
- 활동의 통제
- 발생의 구조
- 힘의 조립
제 2장. 효과적인 훈육방법
- 위계질서적 감시
- 규범화한 제재
- 시험
제 3장. 일망 감시방법
제 4부. 감옥
제 1장. 완전하고 준엄한 제도
제 2장. 위법행위와 비행
제 3장. 감옥체계
그래서 푸코는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설명하면서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를 두고 있고,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고, 영향을 넓혀가면서 그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이고 사법적인 복합실체의 계보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판옵티콘이라는 장치에 흥미를 가지는 바람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형벌과 구속, 규율과 훈육방법까지 넘나드는 폭넓은 독서를 하게 되었네요. 꽤 지적 자극이 강한 책입니다. 물론 다양한 신체형과 고문 방법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도 강한 자극을 받게 됩니다만..... ㅡㅡ;;;;
취향을 좀 타는 책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추천은 못 드리지만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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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의 인지, 책임 주체의 인지, 법률의 인지, 이 세 가지 인지는 재판 행위의 참다운 확립을 가능하게 만든 세 가지 조건이었다.
* 형벌로서의 신체형은 신체에 대한 마구잡이식 처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분화한 고통을 창출해내는 일이며, 형벌의 희생자들을 낙인찍고 처벌하는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직된 의식이지,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잊고 무절제하게 표현되는 사법 권력의 분노는 아닌 것이다. 신체형의 '극단성'에는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모든 논리가 담겨 있다.
* 재판관 측에서도 고문을 부과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 된다(그런데 이것은 용의자가 죽는 사태에 이를 수 있다는 위험만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수집한 몇 가지 증거의 요소들을 위해서 내기에 거는 싸움에 뛰어드는 셈인데, 그 이유는 피고인인 '강한 인내심으로 저항하고' 자백하지 않는 경우에 재판관은 부득이 직책을 사퇴해야 하는 규정 때문이다. 아무리 고문에 저항하더라도 용의자는 그것으로 결백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문에 이긴 이상, 그에게 적어도 사형이 선고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용의자가 고문에 저항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재판관은 더 이상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리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형사 사항에서의 논증은 진실인가 허위인가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따르지 않고, 연속적인 점증법의 원칙을 따랐다. 예를 들면, 논증에서 어떤 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유죄성의 단계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것은 처벌의 한 단계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 처형 의식의 목적은 균형을 회복하려는 것보다 감히 법을 위반하려고 했던 신하와 자기의 힘을 강조하는 전능한 군주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최대한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다.
* 신체형은 사법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 19세기의 형벌은 진실을 추구하는 '평온한' 조사와 처벌에 있어 완전히 없앨 수 없는 폭력과의 사이에 가능한 한 최대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제재를 가해야 할 범죄와 공권력에 의해서 내려지는 징벌과의 차이성을 강조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신체형에 대한 이러한 항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형수에 대한 통치자의, 신체를 둘러싼 대결의 상황을 제거해야 하고, 군주에 의한 보복과 민중의 억눌렸던 분노 사이에서, 사형수와 사형집행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격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 법제의 형벌 완화보다 선행하여 범죄의 내용이 완화된 것이다.
* 우리는 신체형에 대한 비판이 형벌의 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신체형이야말로 군주의 무제한적 권력과, 항상 발생하기 마련인 민중의 위법행위가 뚜렷이 결합되어 있는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 형벌제도라는 것이 모든 위법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법행위를 그 차이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기 위한 장치로서 만들어진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강제권, 신체, 독방, 비밀을 중심으로 한 처벌 권력의 모형이 어떻게 하여 표상, 무대, 기호, 공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모형으로 교체되었는가?
* 규율을 통제하는 신체로부터 네 가지 형태의 개체성,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네 가지 성격이 구비된 개체성을 만들어 낸다. 즉, 그것은 (공간배분의 작용에 의해서) 독방 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는) 생성적이며, (여러 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 감옥은 무엇보다 먼저 교정이라는 기술적 기능이 나중에 추가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정이라는 보조적인 역할을 떠맡은 '법률상의 구류' 또는 자유의 박탈로 인하여 법률체계 안에서 수행될 수 있는 개인들의 변화를 노린 기획이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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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가마타 히로키 교토대 교수가 쓴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14권의 과학 고전을 선별하고 뒷 이야기를 통해 각 책의 내용을 재미나게 풀어내면서 매 장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양서까지 추천하는 좋은 책이었죠.
오늘 소개하는 강신주 선생의 이 책이 이와 흡사한 형식으로 쓰여졌습니다. 내용이 철학이고 시를 통해 풀어낸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목차를 보시죠.
1. 기쁨의 연대 - 네그리와 박노해
2. 언어의 뼈 -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3.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4. 삶의 우발성 - 알튀세르와 강은교
5. 너무나 인간적인 에로티시즘 - 바타이유와 박정대
6. 소비사회의 유혹 - 벤야민과 유하
7.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와 원재훈
8. 망각의 지혜 - 니체와 황동규
9. 미시정치학 - 푸코와 김수영
10. 대화의 재발견 - 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11. 밝음의 존재론 - 하이데거와 김춘수
12. 주름과 리좀의 사유 - 들뢰즈와 최두석
13. 애무의 비밀 - 사르트르와 최영미
14.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 - 아도르노와 최명란
15. 해탈을 위한 해체론 - 데리다와 오규원
16. 미래 정치철학의 화두 - 아감벤과 한하운
17. 육화된 마음 - 메를로 퐁티와 정현종
18. 포스트모던의 모던함 - 리오타르와 이상
19. 사랑의 존재론적 숙명 - 바디우와 황지우
20. 인정에 목마른 인간 - 호네트와 박찬일
21. 한국 사유의 논리 - 박동환과 김준태
보시는 것처럼 굉장히 다양한 철학 사상가와 시인을 짝지었습니다. 총 21명의 철학자와 21명의 시인이 등장합니다. 그 연결의 적절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저자가 시집도 꽤나 읽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책을 쓰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거든요.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에서처럼 나중에 읽기 위해 찜해 놓을 책들을 여러 권 건졌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저처럼 철학을 곁눈질만 하는 문외한들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썼다는 겁니다. 강신주 선생도 글을 쉽게 쓰는 재주가 있어서 참 고맙더군요. 모쪼록 남모를 고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돌직구를 날리는 건 이제 그만두고(그들을 돕는 일은 저 같은 상담자들에게 맡겨두고), 본업인 철학 분야에서 좋은 책을 많이 써 주기를 바랍니다.
철학에 대한 입문서로 훌륭한 책이고 훌륭한 시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그야말로 마당쓸고 돈 줍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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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너무 어려워서 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시집과 철학책을 멀리 하는 진정한 이유는 시나 철학에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네그리와 박노해'를 통해 민중 아닌 다중의 논리가,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를 통해 언어에는 뼈가 있다는 사실이, '아렌트와 김남주'를 통해 사유는 곧 의무라는 판단이, '알튀세르와 강은교'를 통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바타이유와 박정대'를 통해 너무나 인간적인 에로티즘의 비밀이, '벤야민과 유하'를 통해 자본주의의 소비 논리가, '레비나스와 원재훈'을 통해 기다림의 신비가, '니체와 황동규'를 통해 망각의 지혜가, '푸코와 김수영'을 통해 자발적 복종의 무서움이, '고진과 도종환'을 통해 타자로의 비약이 지닌 신비가, '하이데거와 김춘수'를 통해 존재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들뢰즈와 최두석'을 통해 마주침과 주름의 논리가, '사르트르와 최영미'를 통해 애무와 섹스의 비밀이, '아도르노와 최명란'을 통해 교환 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데리다와 오규원'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가, '아감벤과 한하운'을 통해 생명 정치의 무서움이, '메를로-퐁티와 정현종'을 통해 사랑과 고독의 진실이, '리오타르와 이상'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가, '바디우와 황지우'를 통해 사랑의 내적 구조가, '호네트와 박찬일'을 통해 인정투쟁의 심리학이, '박동환과 김준태'를 통해 한국 사유의 가능성이 펼쳐집니다.
* 촛불 집회에 반복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참가자들은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공통되기(becoming common)'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힘을 주면서 참가자들은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분리시키고 단절시켰던 간극을 극복하고 공통적인 연대의 가능성을 처음 맛보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 개발은 자본가 계층을 양성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농지를 정리하고 기계화함으로써 농촌에서 남아도는 인력을 양산해 내야 했던 것이지요.
*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 우발성과 마주침의 철학을 주장한 루이 알튀세르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집요하게 마주침의 문제와 그것의 효과에 대해 숙고했던 인물이었지요.
*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인간의 성적인 욕망에 일종의 역사성과 사회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바타이유 이후에 에로티즘을 사유할 때 우리는 매번 금기라는 문제에 주목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레비나스는 그다지도 집요하게 타자라는 문제에 집착했지요.
* 과거는 우리에게 기억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미래도 기대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물론 현재도 기억과 기대에 물들어 있는 지각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지요.
* 푸코는 우리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압하려는 권력이 청와대나 국회 같은 거시적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의 개인들이 의식하기 힘든 미시적인 차원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ㅁ을 밝혀 냅니다. 이 때문에 흔히 푸코의 정치철학을 미시정치학이라고도 부르지요.
* 대화의 본질에 대한 성찰로부터 고진은 다음과 같은 타자론을 전개합니다. "타자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런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다".
* 고진은 철학, 언어학, 경제학 등도 모두 예외 없이 타자에 대한 비약, 혹은 도약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사랑이란 감정이 이러한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사르트르의 철학 전체는 '존재와 무'라는 제목으로 훌륭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무(nothingness)'는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현재의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해체주의자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는 데리다입니다. 그는 '차이'가 모든 것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통찰했던 철학자였지요.
* 이탈리아의 현대 철학자 아감벤이라면 문둥이들을 호모 사케르라고 불렀을 겁니다.
*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적대 관계가 공동체 외부의 벌거벗은 생명(조에)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존재(비오스) 사이에 그어졌다면, 이제 근대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한 개체 내부에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를 함께 각인시키는 식으로 이행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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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그리 사상의 진화(2008, 갈무리, 마이클 하트, 박서현/정남영 옮김)
* 다중(2008, 세종서적,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서창현 외 옮김)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천재의 의무(2000, 문화과학사, 레이 몽크, 남기창 옮김)
* 기형도 전집(1999, 문학과지성사, 기형도)
* 철학적 탐구(2006, 책세상,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006, 한길사, 한나 아렌트, 김선욱 옮김)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2008, 이매진, 알튀세르, 권은미 옮김)
* 에로티즘의 역사(1998, 민음사, 바타이유, 조한경 옮김)
* 시간과 타자(1996, 문예출판사, 레비나스, 강영안 옮김)
* 들뢰즈의 니체(2007, 철학과현실사, 들뢰즈, 박찬국 옮김)
* 들뢰즈 커넥션(2005, 현실문화연구, 존 라이크만, 김재인 옮김)
* 천 개의 고원(2001, 새물결,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 차이와 반복(2004, 민음사)
* 존재와 무(2009, 동서문화사, 사르트르, 정소성 옮김)
* 해체론 시대의 철학(1996, 문학과지성사, 김상환)
* 목소리와 현상(2004, 인간사랑, 데리다, 김상록 옮김)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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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치인류학자 중 한 명인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1974년에 쓴 정치인류학 책입니다. 정치인류학 고전 중 한 권으로 꼽히는 저서죠.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남아메리카 민족학 전공학자로 1960년대 대부분을 남미 파라과이와 베네수엘라의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연구한 내용을 이 책으로 엮어냈는데 안타깝게도 3년 뒤인 1977년에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맑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기한 것으로 유명한데 바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원시사회를 문자도, 역사도, 국가도 없는 사회이며 하루하루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생계 경제 사회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정복하러 다녔던 근대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죠. 원시 사회라는 말 자체가 인류의 최초 단계에 고착되어 머물러 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이는 서구적 사고의 자민족 중심주의에 의해 비서구 사회를 이국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견해 때문에 나타난 편견이라고 주장하죠. 많은 원시사회에서 권력이 폭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위계질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실증 사례를 들면서 모든 사회는 고대적 사회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논박의 결과로 원시사회야말로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불평등을 야기하는 국가 자체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건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있어 추장의 권력이라는 것이 전쟁에서의 지휘권(전쟁이 끝나면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전쟁 중에도 언제든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박탈당할 수 있는), 그리고 제한된 일부다처제의 아내 선택권에 국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에 당연히 따를 것으로 기대되는 소유의 집중과 힘의 강제는 전혀 허용되지 않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족민에게 절대적으로 봉사하는 자리라는 건데 대체 이렇게 의무만 있고 권리와 권력은 전혀 없는 무력한 추장으로 선출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궁금하더라고요.
저처럼 원시사회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분들이라면 꽤나 충격을 받으실 수 있는 인류학 서적입니다. 다만 인류학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기에 자신있게 추천은 못 드리겠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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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문화에 우리 문화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정치권력이 없다고 해서 그 문화에 정치권력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개념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 정치권력은 인간 본성, 즉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 니체의 생각은 틀렸다)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다. 폭력 없는 정치는 상정할 수 있지만 정치 없는 사회는 생각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 사회는 무엇보다도 재화, 여성, 말이라는 세 가지의 기본적 차원에 의해 규정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유형의 '기호'를 직접적인 준거 틀로 하여 인디언 사회의 정치영역이 구성된다.
* 지역 외혼은 근친혼 금기를 강화하는 소극적 기능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 밖에서 혼인 관계를 맺도록 강제하는 적극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지역 외혼제의 의미는 정치적 연대의 수단이라는 기능 속에서 발견된다.
* 말하기와 권력의 결합 속에서 매우 명료한 동시에 매우 심오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즉 국가를 형성한 사회에서는 말하기가 권력이 지닌 권리인 데 반해 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거꾸로 말하기가 권력의 의무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디언 사회는 추장에게 그가 추장이기 때문에 말하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추장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 말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한다.
*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라고.
* 사실 우리들의 생각 속에는 신앙을 가진 자의 믿음과 같이 내면화된, 즉 사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는 확신이 들어 있다.
* 우리는 생계 경제가 전혀 비참한 생활 속에 놓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시사회의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나 식량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동물적인 상태에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만 일하고서도 생존-아니 그 이상-을 확보하였다. 인간이 자기의 필요 이상으로 노동하는 것은 언제나 강제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그러한 강제가 원시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외부적인 힘이 없다는 것이 원시사회의 본질을 규정한다.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도끼가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탐낸 이유는 같은 시간에 10배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10분의 1의 시간에 끝마치기 위한 것이었다.
* 수렵, 어로, 채집이 반드시 이동 생활 방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나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 농경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정주 생활을 하는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생태학적으로 농업에 적합하지만 농경 생활을 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 사회가 무능하고 기술적으로 뒤떨어지며 문화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그들이 농경 생활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정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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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서평 블로그로 유명한 인문학자 이현우 선생의 책입니다. KBS <책 읽는 밤> 2009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을 수상한 꽤 유명한 책입니다만 저는 좀 별로였습니다.
이 책은 이현우 선생이 이야기한대로 블룩(Blook)입니다. 블룩은 블로그(Blog)와 책(Book)의 합성어로 블로그에 올려둔 포스트를 골라서 편집하고 교정을 봐서 만든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작년에 제가 낸 책도 블룩이었는데요 뭐. 하지만 호흡이 짧은 블로그의 포스트를 모아 만드는 책이라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거나 없다면 흐름이 매끄러워야 독자들이 읽기 편한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서재입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책이 막 꽂혀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재미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테지만 제가 좋아하는 방식의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를 찌질이, 곁다리 등으로 선전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정진을 위한 동력으로 삼는거야 상관없지만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 역시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보거든요. 그래서 제목부터 좀 거슬렸습니다. 나중에 다 읽고난 느낌 역시 블로그 글쓰기는 블로그 글쓰기일 뿐이라는 것. 책으로 묶을 때는 거의 다시 쓰는 정도의 수고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도 반성이 되는 책이었네요.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서재로 나뉘어 있습니다.
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 러시아 문학 읽기
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 영화에 대한 이야기
3. 아, 겸손한 느릅나무들 : 니체, 데리다, 벤야민 읽기
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 : 지젝 읽기
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 번역에 대한 로쟈의 생각
첫 번째 서재의 글들은 유난히 호흡이 짧습니다. 블로그의 글들을 그동안 계속 읽었던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뭐랄까 핑거 푸드만 잔뜩 집어먹은 느낌이어서 입맛만 다시다 끝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처럼 뒷머리를 후려 갈기는 좋은 글도 있습니다. 김규항의 칼럼 '희망을 위하여'를 읽고 쓴 논평,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도 좋았구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더군요. 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전 여전히 김규항 선생의 사상을 지지합니다.
두 번째 서재의 글들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내용이 재미없었다기보다는 선택한 영화들이 재미없었기 때문(솔직히는 못 본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이었죠. 게다가 저는 기본적으로 예술에 평가와 비평의 잣대를 들이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휘휘 넘어갔습니다.
세 번째 서재의 글은 두 번째 서재의 글에 질린 상태에서 봐서 그런지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니체와 데리다, 벤야민의 저작에 익숙한 독자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니체만 조금 읽어보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습니다.
네 번째 서재인 '지젝 읽기'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였습니다. 속된 말로 지젝을 너무 빨더군요. 제가 얄롬을 숭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뭐 지젝의 정치적 입장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입니다만...
다섯 번째 서재인 '번역에 대한 로쟈의 생각'은 대체 왜 포함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번역 시장의 왜곡과 일반인들의 편견 등에 대한 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왜 이 책에 수록되었는지는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말하고 싶어서 넣은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김우열 번역가의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를 추천하겠습니다.
지적 충격을 주는 글꼭지도 많고 생각해 볼 거리도 많이 던져주지만 전반적으로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의 책이라서 읽고나서도 영 정리가 되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의 글이 좋은 분들에게만 추천드릴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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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
*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 자유를 잘 다룬다는 건 원자력 에너지를 다루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 국가란 인간이 동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
* 전제주의나 독재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자본의 '합리적인' 독재보다 더 나쁜 것일까? 이 질문은 "과연 후세인이 부시보다 더 나쁜 놈일까?"란 질문과 같은 것이다.
*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는바, '장사꾼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가 그것이며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 '중산층 페미니즘', 즉 "계급과 사회 구조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페미니즘은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다른 여성, 빈민, 식민지인)'를 착취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
*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을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
*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 - 카뮈
*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다.
*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 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삼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난센스(무의미)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난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난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 언어는 의미의 질병을 낳는 산파다.
*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
*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 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다.
* 지젝이 기대하는 것은 미국(초자아)과 제3세계(이드) 사이의 합작이라는 현재의 '억압적 탈승화'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럽이라는 자아의 역량을 회복/확장하는 것이다.
*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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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고 이 블로그에도 소개한 책들,
'일의 기쁨과 슬픔(2009)',
'여행의 기술(2002)'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제게 이번 책은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먼저 살펴보면,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 소크라테스
2장.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 에피쿠로스
3장.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 세네카
4장.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 : 몽테뉴
5장.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 쇼펜하우어
6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 니체
보시는 것처럼 각 영역에서 좌절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위로를 하려고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이전에 보통이 썼던 책들처럼 자신의 말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각 철학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설득력있게 묘사되지도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색하게 따로 놉니다.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만 보더라도 대체 왜 소크라테스가 이 장에 등장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원래 목표처럼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라리 보통 스스로 녹여낸 말이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서 많이 아쉬운 책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보통의 책 중 개인적인 평가가 가장 낮습니다.
덧. 게다가 하드커버로 된 책인데도 제본이 엉망이라서 읽으면서도 책장이 떨어질까봐 영 조마조마한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덧2. 그래도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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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전문가인 고병권 선생이 쓴 니체 입문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2003)'를 북 크로싱합니다.
니체에 대해 궁금하면서도 저처럼 엄두도 못 냈던 분들에게 단비와 같은 책입니다. 충실한 내용이면 내용, 쉽고 읽히는 깔끔한 문체면 문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는 책입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는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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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고 하면 보통 '신은 죽었다'라는 철학적 선언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기 어려운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일반적인 선입견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니체는 어둡고 딱딱하고, 왠지 가까이 하면 내 인생까지 눅눅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대부분의 인문 고전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저도 니체의 저작은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책은 '수유+너머'를 접하게 되면서 알게 된 고미숙, 고병권 선생의 여러 책들 중 유독 호기심을 끌던 몇 권을 구입할 때 함께 챙겨두었던 것을 무려 2년이나 지나 드디어 읽게 되었는데 고병권 선생의 전작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2007)'를 격찬해놓고 그동안 이 책을 방치했던 것을 보면 니체가 부담스럽기는 했나 봅니다.
이 책은 어찌보면 니체 입문서이기도 하고 다른 면으로 보면 니체 저작에 대한 해제집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니체 입문서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만 그건 제가 니체 무지렁라서 그럴 수도 있으니 그건 읽는 분들이 각자 판단하셔야 할 것 같고요.
제가 어느 정도 니체에 대해 문외한이었냐 하면 차라투스트라가 본래 페르시아 예언자로 조로아스터교(차라투스트라의 영어식 표기)의 창시자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았을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니체의 권위자라고 불러도 될 만한(저는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낼 수 없으면 진정한 권위자로 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병권 선생은 니체의 권위자라고 할 만 하지요) 고병권 선생이 친절하게 풀어 쓴 이 책은 니체의 진면목을 모두 경험할 수는 없어도 핵심은 확실히 관통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병권 선생만큼 이 책의 내용을 쉽게 소개하기는 어려우니 소 제목 몇개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어떤 내용이 다루어질 지 감질맛만 보여드리겠습니다.
* 신은 죽었다* 너희는 너희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사랑을 가르친다, 벗을 가르친다* 삶을 사랑하라*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노동이 아니라 전쟁을 원한다* 새로운 우상인 국가를 조심하라* 춤추고 웃는 법을 배워라*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 월덴지기가 인상깊게 읽은 구절들"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아주 수치스러워 하면서도 사실상 '임금노예'인 자신의 모습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찬미하는 일에 쉽게 동의한다. 우리가 고대 노예보다 더 가지고 있는 건 바로 '허영심'이다. "무겁고 진지한 사고만이 사태를 깊이 인식하는 것이라 믿는 자들은 무게와 깊이를 혼동하고 있다"
'고추장, 책으로 말하다(2007)'에 이은 연타석 홈런이네요. 꼭 읽어보시기를 권하는 좋은 책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니체 문외한들께 추천합니다.
덧. 그린비 출판사에서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야심찬 고전 시리즈를 내놓고 있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좀 더 관심을 갖고 선택적으로 읽어볼 생각입니다. 기대가 되네요.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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