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말 많은 책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한데다 충분히 길지도 않아서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 다독가라고 해도 지금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 중 평생동안 만날 수 있는 수가 극히 한정적입니다. 그러니 정말 마음에 드는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아주 큰 행운이자 행복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의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Andrew Solomon)은 퓰리쳐상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한낮의 우울'로 더 잘 알려진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데 저는 이 책을 먼저 읽고 감명을 받아 한낮의 우울을 추가로 구매했죠.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기쁜 일인데 그것이 인생의 역작 수준의 책이라면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올 2월 초에 소개한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1985)' 포스팅에서 2018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 두 권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한 권이 읽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였고, 다른 한 권이 바로 이 책(정확하게는 두 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입니다.
무려 1,600페이지에 달하는 44,000 원짜리 하드커버 시리즈가 어떻게 제 책 구매 리스트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인생 책 중 한 권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무려 10년에 걸쳐 300가구가 넘는 가족을 대상으로 진행한 4만 페이지의 인터뷰 내용의 집대성입니다.
내용은 책 제목대로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자녀로 둔 부모와 당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름'의 범위가 '청각 장애', '소인증','다운증후군', '자폐증', '조현병', '장애',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에 이릅니다.
그 '다름'은 거의 대부분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당사자와 부모 상당수는 때로는 용기로, 때로는 체념으로, 때로는 운명으로, 때로는 신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고 나름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그 운명을 선택하고 용감하게 살아나갑니다.
제 전공과 관련하여 평소 익숙한 주제도 있었지만 상상도 못했던 내용이 많아서 읽으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예를 들어 청각 장애와 관련해서는 농문화를 지키기 위해 인공 와우 수술에 반대하는 청각 장애 커뮤니티의 입장이라든가, 자신과 같은 장애아를 갖기 위해 유전적 취약성을 가진 대리모를 일부러 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제가 얼마나 생각이 좁은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일의 특성 상 나름 '다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깨인사람이라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그런 오만함을 산산히 부숴주는 고마운 책이었네요.
도전하기 쉽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심리학 전공자 뿐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셨으면 하는 좋은 책입니다. 일단 읽어보시면 출판사가 띠지에 '인류에 대한 관점을 바꿀 21세기 심리학적 권리장전'이라고 인쇄해 놓은 것을 보고 코웃음을 치기 어려울 겁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닫기* 가족은 차이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의 시험대이며,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이런 과정이 강조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시급한 장소이다. *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부모와 다르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에 우울해한다.
* 이례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오히려 완벽하게 정상인 것이 드물고 고독한 상태다.
* 자녀가 행복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 불행하더라도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더 바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수평적 정체성을 증오한다.
* 가끔은 그 다양성 때문에 지치고 힘들기도 하지만 다양성이 감소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다. 특별히 누군가 게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게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나 자신이 그리워진다.
* 사회 경제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인지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더욱 힘들어한다.
* 고치려는 태도는 질병 모델이고, 수용하려는 태도는 정체성 모델이다.
* 나는 차이의 범주를 탐구하면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일이나 부족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느 면에서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 다양한 문제를 안고 태어난 아동들을 관찰한 연구에 의하면, 명백하게 ‘의미를 찾으려고 보다 열심히 노력했던 어머니의 아이들이 보다 나은 발달 결과를 보였다’
* 위계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조차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위계를 세우고자 하는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빛은 상처 난 곳을 통해 들어온다.
* 수화는 대개 좌뇌(언어를 관장하는 영역이며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영역에서 소리와 문자화된 정보를 처리한다)의 영향을 받는다. 우뇌(시각적인 정보와 몸짓의 감정적인 내용을 처리한다)의 영향력은 훨씬 미미한 수준이다.
* 청각 장애 아동은 건청인 아이가 제1언어를 습득할 때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수화를 배운다.
* 수화를 금지한다고 청각 장애 아동이 발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능력을 저하시킬 뿐이다.
-> 2장 '청각 장애'까지만 줄을 치면서 읽었고 줄을 쳐야 할 곳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이후에는 줄치며 읽는 걸 포기했습니다.
덧. 이 책은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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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인기있는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 시즌 1의 20화를 보면 청각 장애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CSI 요원들이 정황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피해자가 다녔던 청각 장애인 학교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요원들은 원활한 면담을 위해서 수화 통역자를 데려가는데, 여자 교장이 자신의 의사도 묻지 않고 수화 통역자를 데려왔다고 화를 벌컥 내면서 청각 장애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오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겠다면서 CSI 요원을 쫓아냅니다. 결국 수화를 할 수 있는 '그리썸' 반장이 교장에게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증거 수집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교장은 학생들을 변호하기에 급급하기만 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용의자(결국은 가해자로 밝혀집니다만)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조사실에 난입해 용의자에게 폭언을 퍼붓습니다.
물론 청각 장애인으로 살면서 겪었을 냉대와 무관심,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다고(당사자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수화 전문가를 데리고 간 CSI요원도 오버했다고는 생각합니다만) 내쫓는 편협한 태도는 청각 장애인 학교의 교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취해서는 안될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CSI요원이 교장을 독순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으로 착각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된 행동일까요?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죄로 판정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무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어디로 갔답니까? 결국 그 용의자는 가해자로 밝혀졌지만, 만약 가해자가 아니었다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난입해 저주의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손상된 그 사람의 자존심과 사회적 명예는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합니까? 정상인이니까 네가 그냥 이해하고 참아라?
중간에 그리썸 반장과 교장이 수화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교장이 "당신은 우리를 이해하는 것 같군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정말 고소를 금치 못하겠더군요. 수화를 할 수 있으면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는건가요? 그리썸 반장은 청각 장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수화를 배운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배웠을 뿐이었죠.
저는 이 모든 몰이해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사실 위의 일화에 나오는 교장은 오히려 청각 장애인과 정상인은 다르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해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청각 장애인은 정상인과 분명 다릅니다. 굳이 통계적인 개념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 이유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 없이 청각 장애인은 보통 사람들에 못미치는 청력을 가지고 있고 일상 생활에서든, 직업 생활에서든 현실적으로 분명 제한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 똑같은 인간인데 무엇이 다르냐며 주장하는 것은 얼핏 보면 평등의 기치를 높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을 조장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변화를 반기지 않는 습성이 있는데 다르지 않다는 주장은 변화가 필요없다는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악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도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소수가 적응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일축하게 마련입니다.
일단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나서 그 다름이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상인을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식의 피상적인 해결 방안은 앞으로도 대답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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