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출처 :
YES24
얼마전에 소개드린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5)'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새로운 시각을 다루고 있다면 철학자인 줄스 에반스의 이 책은 표지에 있는 것처럼 삶을 사랑하는 기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이라는 어찌보면 양 극단에 놓여 있는 두 운명이 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는 걸 보면서 이상한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일부러 이 순서로 읽은 건 아닌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다음 책으로 이 책을 고른 걸 보면 사람의 무의식이란 게 참 무서워요.
줄스 에반스는 고대 철학자의 고전을 현대 생활에 접목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리스, 디오게네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뿐 아니라 에픽테투스, 에피쿠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다소 낯선 철학자들까지 총 출동합니다. 거기에 스토아 학파, 이오니아 학파, 쾌락주의, 회의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 사조들도 소개됩니다.
이 책의 특이점은 철학 관련 책인데도 유독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앨버트 엘리스와 아론 벡, 대니얼 카네만, 마틴 셀리그만 등이 등장하고 그 밖에도 심리학 전공자라면 아주 익숙한 다양한 심리치료와 심리학 이론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가 대학 졸업 후 우울증과 PTSD를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유하면서 심리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있는 건 제가 예전에 비판적으로 포스팅했던 랜드마크 포럼(관련 포스팅 :
'랜드마크 포럼을 조심하세요')도 소개하고 있더군요. 제목만 보고 당연히 철학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심리학과 접목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심리학의 접목이 살짝 어색한 부분도 있고 저자의 지나친 심리학적 해석 편향이 거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철학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고 피하고 싶은 분들이 조금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이어서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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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철학은 모두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가치와 믿음, 판단과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듯,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이런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답을 선택하는 일은 그 자체로 좋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이런 과정을 억압하거나 소위 '전문가들'이 고안한 행복의 조립식 모델 속에 국민의 행복을 끼워 맞추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자율성과 추론능력과 선택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조건인데 말이다.
* 에픽테토스는 '회복탄력성'의 철학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상처투성이 삶을 이용했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능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어떻게 불확실성과 억압을 극복하고 평정심과 강한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상기하라고 대답한다.
*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을지 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 누구도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항하는 방법만 안다면 아무도 우리를 세뇌시킬 수 없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다.
* 세네카는 화로 이어지는 가장 큰 오류는 아마도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일거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면 그 치유법은, 기대를 낮추고 기대를 좀 더 현실에 맞추도록 노력해서 이 세상에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 우리가 삶의 목표라고 말하는 쾌락은 일부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편견 탓에,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해서 이해하는 것처럼 방탕한 쾌락이나 관능적인 쾌락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쾌락이란 신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문제가 없는 상태다. 즐거운 삶이란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든 회피하든 그 근거를 찾고, 영혼을 잠식하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데서 얻을 수 있다.
* 견유주의자로 살려면 남들이 비웃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에 둔감해져야 한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여길지 지나치게 걱정하고, 남들이 인정하지 않을까봐 너무 두려워한다. 그 결과 불안해지고 불행해지며 진짜가 아닌 삶 속에 갇힌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숨기지 말고 남들이 비웃거나 조롱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도록 단련함으로써 독립적인 개체로 서야 한다.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 마틴 셀리그먼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들은 '객관적 과학'을 정립하면서도 도덕적 가부장주의라는 비난을 피하려는 열망을 담아 '도덕적 판단', '윤리적 논쟁', '자유로운 선택'은 쏙 빼버린 채 좋은 삶의 모델을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 세 요소는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측면들인데 말이다.
* 나는 진정한 관계, 진정한 우정, 진정한 철학 공동체는 작고 친근한 규모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세계에는 인간관계를 자동화된 설문으로 대체하고 국민의 자율성을 희생하는 대신 '행복 전문가'들에게 너무 많은 권위를 주는 기계적이고 수단화된 행복의 정치학이 등장할 위험이 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고대의 개념과 현대의 다원적이고 자유민주적인 정치 사이에서 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행복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실증적 과학으로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고, 만일 행복이 그런 거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지루한 곳일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행복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의 다원성을 탐구하고, 국민을 동등하게 대화에 참여시킬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대해야 한다. 실제적 추론과 균형을 이루는 실증주의, 인문학과 균형을 이루는 과학, 좋은 삶은 한 가지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공식적인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강제로 행진해야 하는 한 덩어리의 대중이 아니라 좋은 것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 돕는 친구들의 모임, 그것이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이다.
* 소크라테스적 전통의 미덕은 자제, 합리성, 자기의식, 중용이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는 정신에 위계가 있다고 보는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최상위에 있고,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욕구와 관련된 부분이 최하위로 여겨진다. 디오니소스적 전통은 소크라테스적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을 찬양한다. 소크라테스가 합리성과 중용을 설파할 때, 디오니소스는 중용과 통제를 넘어서라고 부추긴다.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인 힘을 찬양하고, 춤을 추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술에 취했을 때 느끼는 활기와 즐거운 삶을 찬양한다.
덧. 이 책은 e-book으로 읽었기 때문에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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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알라딘
'Learned Helpless'개념으로 유명한 마틴 셀리그만이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지금까지 부정적인 심리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심리학(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상/임상 심리학)의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는 야심을 갖고 시작한 긍정 심리학의 결과를 정리한 책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기대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많이 실망했습니다.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 때문인지, 서평, 판매 부수 등 호평 일색이지만 뭐가 획기적인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고대의 문헌부터, 옛 성현의 말씀들까지 모아 쥐어짠 후 정수를 골라낸 것 같은데 곳곳에서 느껴지는 셀리그만의 자부심이 뭐에 기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리학도라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연구 결과 소개의 나열이라서 읽다가 좀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책의 유일한 독자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 24가지의 강점 개념도 지나치게 일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Flow' 개념이 제게는 오히려 명쾌하고 명확하게 와 닿더군요.
게다가 셀리그만은 5장에서는 정신분석적 접근에 대한 잘못된 이해마저 드러내고 있는데 정신분석이론에서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을 장려하기 때문에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지행동치료의 우수성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Beck과의 개인적인 친분때문에 시선이 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고 이해하더라도 좀 심했습니다. 대체 현대의 어느 정신분석이론이 부정적인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고 표출해야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고 주장한답니까?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더욱 어이가 없었습니다.
12장 자녀 양육에 관한 부분은 '초보의 주식 재테크 성공기'처럼 비전문가의 양육 성공기를 보는 듯해서 부담스러웠고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자부심이 지나쳐 잘난 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투도 싫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은 삶의 의미를 신앙에 대한 귀결로 교묘하게 연결시키는 부분도 참 배신감이 느껴지더군요.
독설을 하는 김에 끝까지 해 본다면 4페이지로 구성된 '부록: 용어 해설'부분만 꼼꼼히 읽어보면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감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책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지 모르겠지만 심리학도에게는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저서나 차라리 이전에 제가 리뷰한
'행복'을 읽으시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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