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자신이 왜 여행을 좋아하는지(혹은 좋아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당연히 저도 그랬는데요. 2002년에 뉴질랜드에 가기 전까지는 비행기라고는 타 본 적도 없었고, 왜 비싼 돈, 귀한 시간을 들여 사서 고생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꽉 막힌 타입이어서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여행에 환장하게 된 제 자신이 저도 굉장히 놀라웠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을 돌이켜 보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조금씩 바뀌어 온 것 같습니다.
2000년 대 중반에는 다분히 뭔가 새로운 걸 경험한다는 기쁨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고, 신기한 먹을거리를 맛보는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다녔죠. 거기에 나는 돈 아껴서 여행 다니는 남자라는 자뻑도 솔직히 한 몫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게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기를 얻기 위해 초기에는 외부적인 요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비유하자면 조깅을 열심히 하기 위해 새로운 스포츠 웨어나 조깅화를 구입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그래서 해외 여행을 다니던 초반에는 그런 즐거움을 찾아 다녔습니다. 일정표도 빡빡하게 짜넣고, 가능하면 많은 것을 효율적으로 경험하려고 애를 썼죠. 그 때문에 여행을 다녀와서 몸져 눕기도 하고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겪은 적도 있습니다. 이 때 다닌 곳이 홍콩, 터키, 일본, 그리스 등이었습니다.
2000년 대 후반이 되자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여행의 매너리즘이라기보다는 삶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일도 재미가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고 뭔가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듯 했습니다. 우울 장애에 걸린 것처럼 만사 다 귀찮고 세상사가 허무하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삶의 색조가 옅어지면서 사는 게 뭔지 고민하던 시기였습니다. 어찌 보면 이 당시 떠났던 여행들은 제 나름의 힐링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하고 저를 치유하고 삶의 동력을 다시 얻었거든요. 이 때는 삶을 낯설게 하는 것이 제 여행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익숙해진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지도 네팔, 쿠바처럼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을 골라서 다녔습니다.
그러다 요새는 또 다시 여행을 가는 목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물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도 좋고, 삶을 낯설게 해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여전히 좋지만,
요새는 저 자신과 대화를 하는 목적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네팔을 다녀온 이후 저 자신과 대화를 하려고 산티아고 길을 혼자서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고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혼자서 다녀올까 하는 꿈도 꿨지만 꼭 혼자가 아니더라도 여행 중에 얼마든지 제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더군요. 함께 여행하는 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시간이나 기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시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행 일지를 정리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노르웨이 여행 때는 피요르드 크루즈 투어를 하면서 제 자신과 대화를 많이 했죠.
제가 살아온 삶과, 얼마나 남아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남은 삶에 대하여, 제 일과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아직도 여전히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좋아서, 그 다음에는 삶을 낯설게 만들어 생동감을 불어넣으려고, 이제는 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소중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여러분이 여행을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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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심리학자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심리치료와 상담이라고 아무리 목소리 높여 외쳐봐도 아직까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심리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임상 심리학자에게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숨을 쉬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안 하면 죽게 되는(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밑줄~) 그런 것이죠.
그런데 매일 하는 일이 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보고서가 틀에 박힌 것 같고 사용하는 문구도 매번 똑같아서 정체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Somatization Disorder와 Conversion Disorder, Dysthymic Disorder 등 Neurosis 계열의 장애를 진단하는 각각의 보고서를 진단 명만 바꾸어 내도 별 무리가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아무런 고민 없이 공부도 안 하고 그냥 항상 쓰던대로 보고서를 쓰는 전문가는 어차피 제 발로 무덤을 파는거니까 신경쓰지 말도록 하고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움이 되실까 해서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몇 가지 알려 드립니다.
첫째, 다양한 문구를 사용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 영어를 배울 때 미국인들은 똑같은 단어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 바꾸어 쓴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실 겁니다. 이걸 보고서 작성에 적용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인다'는 흔히 사용되는 종결 문구입니다. 이걸 동일 보고서에서 '~생각된다', '~나타났다', '~드러났다', '~시사한다' 등으로 다양하게 바꾸어 보는 겁니다. 물론 앞뒤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문구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상된다'도 '~가능성이 있겠다'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고 '~가능성이 커 보인다'와 같은 변형도 가능합니다. 물론 이 방법만으로 보고서 작성의 매너리즘에서 곧장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보고서에 활력을 불어넣어 읽는 사람의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여주고 본인에게는 문장력을 높여주는 연습이 되기 때문에 적극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다른 평가자의 보고서를 탐독한다.
: 다양한 문구를 사용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하고 글쓰기 연습을 하는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전문가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때에는 다른 전문가가 쓴 보고서를 읽는 것이 도움이됩니다. local NP에서 프리랜서로 평가를 하는 선생님이라면 다른 선생님이 쓴 보고서를, 수련 레지던트라면 윗년차가 쓴 보고서를 자꾸 읽는 겁니다. 이 때 매너리즘에 자주 빠지는 특정 장애가 있다면 그 장애에 대해 다른 선생님이 쓴 보고서를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어떻게 formulation을 하는 지 눈여겨 보는 겁니다. 제가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면서 큰 도움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양한 스타일의 보고서를 매일 읽으니까 저도 모르게 표현력이 늘게 되더군요. 이것도 모르고 심리평가 supervision을 안 하는 supervisor들은 어리석은 바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저 supervision을 귀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하겠지요. 그런 썩어빠진 정신의 supervisor는 뭘 해도 제대로 할 리가 만무합니다.
셋째, 다양한 표현을 수집하고 변형해 내 것으로 만든다.
: 다른 평가자의 보고서를 읽는 것과 연결해서 사용하는 방법인데 보고서를 읽으면서 인상깊은 표현이나 구절을 적어서 나름의 관용어구 사전을 만들어 두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소개한
'글쓰기의 공중 부양'에서 이외수옹이 추천했던 방법이지요(참고로 말씀드리면 외국에는 이미 심리평가 보고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모아 놓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걸 그대로 베껴쓰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켜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체화시켜 사용하는 겁니다.
지겹다~ 지겹다고만 하면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지겨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심리평가 보고서를 쓰는 일이 지겹다고 느껴질 땐 나름의 재미를 찾아보세요.
제가 설명드린 방법 말고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분들은 제보를 해 주시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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