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신체적인 손상의 의학적 치료와 달리 손상 부위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상담을 잘 하고 있는지의 여부도 가늠하기 어려워서입니다.
그래서 많은 상담자들이 자신이 상담을 잘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자신없어 합니다.
그렇다면 상담이 잘 되고 있는지를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담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없어지고 있다면 상담이 잘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담자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증상 자체인 경우보다 이면에 자리잡은 다른 핵심 문제때문인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통 잠을 못자던 내담자가 어느 날부터 잠을 푹 자기 시작했다고 해서 상담자까지 덩달아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골몰하는 상담자일수록 시야가 좁아져 자신이 초점을 맞추는 내담자의 문제가 호전되느냐에만 신경을 쓰기 쉬운데 저는 오히려 내담자의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매일 어두운 복장에 화장도 하지 않던 내담자의 옷차림이 점차 화사해지고, 매일 10분 전에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내담자가 상담에 조금씩 늦고, 늦은 이유를 상담자에게 설명하면서도 주눅들지 않고, 상담자의 말에 예예 하기만 하던 내담자가 자기 주장을 시작하고, 농담을 이해하고 함께 웃고,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등의 사.소.한. 변화 말이죠.
변화의 방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담 초반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내담자의 사소해보이는, 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밭을 계속 갈아 엎고 비료를 줘 토질을 개선하면 먼지만 푸석푸석하게 일던 흙 색깔이 거무튀튀해지고 냄새도 달라지는 것처럼 상담의 효과는 처음에 주목했던 바로 그 문제가 아닌, 예상치 않았던 주변부에서부터 나타나게 됩니다.
땅이 지력을 얻으면 어떤 작물을 심든 잘 자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내담자의 문제를 수술해서 떼어낼 생각만 하지 말고 내담자 스스로 툭툭 털고 갈 수 있도록 힘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과 그 변화에 주목하면 상담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한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일시적인 변화에 그칠 수 있으니 섣부른 단정은 하지 말고 그런 변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지 지켜볼 필요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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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에는 워낙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에 도박자와 그 가족 뿐 아니라 상담자도 정신없게 만듭니다만 모든 문제에는 당연히 해결 방법이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도박 중독의 경과에 따라 가장 힘든 문제가 바뀔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스스로에게 그 중 어떤 문제가 가장 힘들고 해결하기 어렵게 느껴지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문제가 바로 해결책이 숨어 있는 문제니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도박을 그만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계속 도박 생각이 납니다. 도박에 빠진 동안 직장에서 일을 소홀히 했더니 상사가 맨날 일 못한다고 대놓고 면박을 줍니다. 도박 자금으로 사용하려고 여러 명의 친구에게 조금씩 돈을 빌렸는데 갚을 일이 막막하니 친구들의 연락을 자꾸 피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친구 관계가 다 끊기지 않나 두렵습니다. 아내가 자기 명의로 된 재산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산권을 방어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러다가 갑자기 이혼 소송이라도 내려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이 중 무엇이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나요? 이 모든 문제가 도박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니 도박만 그만두면 해결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배수구가 막히면 물이 내려가지 않고 막힌 곳을 뚫어야 물이 정상적으로 내려가듯이 가장 힘들다고 느껴지는 그 문제부터 정면 돌파해서 해결해야 다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깁니다.
이제서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배우자에게 버림받는 것이 가장 두렵고 끔찍하다면 가족의 신뢰를 다시 쌓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친구들이 오해하고 자신을 떠날까 두렵다면 그들에게 자신의 도박 문제를 솔직하게 open하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도박 충동이 너무 강해서 자꾸 도박 생각이 나는 것 때문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먼저 도박 충동을 통제하고 여가 시간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가로막은 성벽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우회로만 찾다가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대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길이란 결코 없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힘들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그것이 바로 도박 중독을 치유하는 지름길이자 돌파구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핑계대지 말고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조건 정면 돌파하세요. 이것만 돌파하면 그 다음은 정말 쉽습니다. 이 성벽만 넘고 나면 내가 왜 이런 걸 갖고 그렇게 고민했나 싶을 겁니다.
이건 정면승부에 성공한 모든 도박 중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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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문제는 없다'라는 글에서는 문제를 삶의 변화에 적응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불협화음으로 설명을 했습니다만 오늘은 모든 문제에는 나름의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임상 장면, 특히 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심리전문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심리평가를 통해 '환자'의 '문제'를 찾아내고 심리치료를 통해 그 '문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증상'이 곧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증상을 잡으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죠.
이런 접근은 자칫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해 엉뚱한 곳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게 만듭니다. 특히 원인 치유적인 접근보다 증상 완화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현대 의학이 지배하는 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가들은 이런 접근에 자신이 경도되어 있지 않은 지 주의를 기울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문제'는 그것을 '문제'라고 이름 붙이면서 부정적 영향력이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가 문제라고 지칭하는 그것이 가져오는 주관적 고통감에는 공감해야 하지만 그것을 진정 문제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왜 나타났을까의 차원에서 꼭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모든 문제에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는데 그것의 보여지는 모습이 부정적이라고 해서 내담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나타나는 증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부정적인 모습이 보여도 내담자 본인에게는 중요한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문제를 통해 그러한 이유나 목적을 대리 충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파괴적 관심끌기'가 있습니다.
'파괴적 관심을 추구하는 아동 다루는 법'이라는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부적절한 행동을 통해 주 양육자의 관심을 끄는 것인데 제 3자의 눈으로 보면 그저 일탈 행동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면 개망나니처럼 보이는 아동의 행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닌 정서적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는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그것이 부분적이든, 일시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내담자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담의 목표는 내담자가 '문제'라고 보고하는 것의 존재 이유를 함께 찾고, 그 관계성을 내담자가 이해, 수용하고, 그 원래 이유를 위한 새로운, 그러면서도 건강한 대안을 찾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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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겁니다'라는 제목은 사실 틀린 것이죠. 엄밀히 따지자면 상담은 주고 받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상담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이유는 상담자들이 내담자에게 뭔가를 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정작 중요한 내담자와 관계 맺기에 실패하거나 내담자의 문제를 잘못 파악함으로써 상담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상담은 내담자가 비용을 지불하고 제공받는 심리적 서비스이기 때문에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부담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되면 상담을 받기 이전에 내담자가 무수히 경험했을 틀에 박힌 충고나 조언과 같은 민간 요법을 상담자도 무심결에 따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특히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내담자나 빠른 해결 방법을 원하는 조급한 내담자를 상담하는 상담자에게 이런 위험성이 커집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비록 비용을 지불하기는 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온몸과 마음으로 집중해서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을까요? 자신을 돕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나봤을까요?
물론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가 뭔지를 알고 싶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또 상담자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상담을 받으러 옵니다. 그러나 그건 상담을 하는 동안에 함께 해결하는 과정이지 상담자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주고 싶다고 상담자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상담은 내담자가 마음의 힘이 강해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과정이니까요.
그러니 내담자에게 뭔가를 줘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길 때마다 온 몸과 마음을 던져 진심으로 내담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내담자가 하는 말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 안으세요.
상담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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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판을 받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없을 테고요.
하지만 누군가 내 잘못을 이야기하면 혹시 그게 사실이 아닐까 한번쯤은 의심하고 자기를 돌아보고 그게 사실일 경우 바로잡고 고쳐야 발전이 있습니다.
"걔는 대체 왜 그런다니?", "왜 우리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고자질하냐?"라고만 발뺌하면서 뭐가 문제인지 살펴볼 생각을 안 한다면 그게 사람이든, 조직이든 더 이상 발전은 없습니다.
자기가 속한 조직을 비판하면 그 똥물이 나에게는 튀기지 않을까요? 내 얼굴에 침뱉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그 사람이 개망신을 당하건, 그 조직이 망하건 말건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뭐하러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잘못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우리 솔직하게 나이, 학력, 출신 등 모든 계급장 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이야기 해 봅시다.
문제가 정말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걸 누가 이야기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문제를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이야기하고 누가 이 문제를 고칠 겁니까?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달 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참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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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내담자는 저게 주요 문제야". "저 사람은 저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데", "저 문제의 내면에 감추어진 역동이 뭘까?"
현장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까요?
저는 다른 전문가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한정된 경우(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한다든지)를 제외하고는 '문제'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상담/심리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삶이 변화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융통성을 갖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몸이 성장하면 예전에는 잘 맞던 옷이 몸에 꽉 끼기 때문에 새로운 옷을 사야 하는 것과 비슷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정신보건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몸의 변화에 민감하고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저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임상가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맞춤옷을 디자인하는 재단사이며, 동굴 탐험을 돕는 가이드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방문하는 내담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전제하고 상담을 하는 임상가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내담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우월감을 갖게 되기 쉽습니다. 이는 옳지 않을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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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평소에 입이 근질거렸던 부분이 많았는데 이참에 happyalo님의 글에 트랙백을 겁니다.
episode I.
얼마 전에 제가 아는 분이 서울 모 대학의 교수 임용에 도전을 했습니다.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하고 얼마 뒤 느닷없이 예고에도 없던 영어 공개 강의 능력을 테스트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분,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발표 자료도 영어로 준비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도 준비를 해서(물론 영어로 준비했겠지요.) 갔더랍니다. 20분 동안 땀을 삐질 흘리면서 안 되는 영어로 강의를 마친 후 심사위원으로 들어와 있던 교수들(그 과의 교수들은 두 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행정을 담당한 보직 교수랍니다)이 질문을 쏟아 붇는데 전공이나 발표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변잡기의 이야기였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한국말로 했다는데 대체 왜 영어 강의를 시킨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랍니다. 물론 결국 이분은 임용에서 탈락했지요. 아직도 이분은 왜 그 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테스트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episode II.
episode I.에서 등장한 제가 아는 그 분(이분은 제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학자인데)이 외국 저널에 논문을 제출하려고 심리학 분야에서 매우 유명한 교수(당연히 미국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에게 원문은 자기가 다 쓰고 번역을 하는 대가로 공동 저자로 넣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고 그 교수가 번역한 논문으로 게재를 신청했는데 1차 심사에서 탈락해서 도착한 평가서를 보니 내용을 논하기 이전에 논문에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유치한 문장이 너무 많아(고등학생들도 사용하지 않는 콩글리쉬였다는...) 논문으로 고려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게 제가 제안한 대로 전문 번역가에게 맡기었더라면 이런 낯뜨거운 꼴은 당하지 않았으련만... 게다가 이 교수는 상의도 없이 자기 맘대로 다른 저널에도 동시에 apply를 했더군요. 대체 도덕심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episode III.
제가 학부생이었던 당시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교수 한 분이 새로 오셨는데 이분은 교포 2세라서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국제화니, 대학의 경쟁력 강화니 하면서 영어 강의를 하는 것이 붐이었고 학교는 신이 나서 전공 영어 강의(4학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 방법론이었습니다.)를 개설했습니다. 강의 중 모든 의사소통방법은 영어를 사용해야 하고 보고서도 영어로 써서 내야하는 난이도가 높은 수업이었습니다. 결과는 엉망진창이었지요. 저야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만 제가 우수해서라기보다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강의와 학생들 때문에 제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이런 영어 강의는 몇 년 동안 꾸준히 개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수는 영어로, 학생은 한국말로 하다가 보고서도 한글로, 나중에는 교수가 답답해서 그냥 한국말로 하다가, 학생들이 교수의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면서 그냥 영어로 해달라고 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전공 필수가 아닌 이상 누가 그 힘든 강의를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강의만 영어로 개설하면 뭐 할까요? 학생들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박사 학위를 외국에서 취득했다고 수업도 영어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happyalo님도 언급을 하셨지만 영어 강의 가능자라는 조건을 다는 이유는 영어 강의를 실제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을 뽑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서울대 심리학과의 교수진만 보아도 거의 대부분(확인은 안 해보았지만 아마 90%이상일겁니다)이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이고 거의 대부분이 서울대 학부 출신들이죠. 임용 조건에 특별히 서울대 학부 출신, 외국 박사 학위자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참으로 이상하죠?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외국에서 한 공부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직 심리학 분야가 그것입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들어와서 조직 생활은 해 보지도 않은 채 교수 자리를 꿰차고 미국의 최신 조직 이론을 들먹이면서 국내 조직 문화가 어쩌네 저쩌네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참으로 의심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당시 저랑 같이 수업을 듣던 박사과정생(이분은 국내 유수 기업의 인사팀에서 과장으로 7년을 근무한 베테랑이었습니다)이 잘 골라서 배우지 않으면 기업에 들어가서 개망신당하거나 왕따 당하기 쉽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닫기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대학교수라는 직업 자체를 상당히 경멸하는 사람입니다(제 아버지도 교수입니다만). 저는 대학교수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는데 가장 많은 부류는 '지식도둑놈'입니다. 박사 학위를 어디에서 했건 간에 상관없이 일단 교수자리를 꿰차고 나서는 자기 밑의 석, 박사를 쥐어짜 연구 실적을 가로채는데 혈안이 되어있죠. 국내 학회지(외국 학술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에 교수 단독 연구 논문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공동 저자가 있는 경우 그중에 하나라도 석, 박사과정생이 포함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 논문은 그 과정생이 대부분 썼거나 준비중인 학위 논문이라고 장담합니다. 사실 저는 교수가 단독으로 제출한 논문이라도 그 교수가 정말 혼자서 연구를 했을까 하고 상당히 의심하는 편입니다. 교수들이 국내의 유수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려고 하는 이유는 우려먹을 자원이 우수하기 때문이죠. 둘째 부류는 '돈 도둑놈'입니다. 교수가 되면 아무래도 산학 협동 연구니 어쩌니 하면서 기업에서 project를 따내 연구를 하게 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수석 연구자인 교수는 대개 실적물의 저작권이나 명예를 얻게 되므로 인건비가 상당히 적게 책정이 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실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석, 박사과정생들의 인건비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교수가 전횡을 부려 이 인건비를 가로채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이죠. 학술진흥재단에서 하도 이런 일들이 많아 인건비를 직접 연구원들의 통장으로 입금을 시켜주니 얼마씩 다시 상납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이 정도면 교수라고 부르기에도 아깝습니다만 제가 아주 잘 아는 교수랍니다. ㅠ.,ㅠ) 경우도 있습니다.
적어도 교수는 자기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 탐구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고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양심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는 면에서 존경받아야 마땅한 직업임에도 언제부터인가 그런 치열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하찮은 직업(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만)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외국에서 학위만 따고(돈으로 따든 뭐로 따든 상관없이) 같은 학교 출신 라인에 줄서고, 필요에 따라 학자로서의 양심만 팔아먹으면 개나 소나 다 교수가 되니 제 교수 혐오증을 고치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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