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에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좀 말라는 의미의
'박사 학위는 대체 왜 그렇게 따라고 난리인가'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근 5년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공부를 왜 계속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계셔서 심심한 김에 국내 심리학 박사 학위 무용론 포스팅 2탄이나 써 보렵니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소위 말하는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학부 출신이 아니거나,
당신이 SKY 출신이 아닌 경우 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않았거나,
하다 못해 당신이 지원하려는 그 학교 학부 출신이 아니라면,
당신이 국내 심리학과의 교수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 한번 디벼 보겠습니다.
일단 한국 심리학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심리학 혹은 심리학 관련 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대학 정보를 싹 긁었습니다. 그 다음에 학교 별로 교수 명단을 확보하여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여 분류하였습니다.
* 분류기준
1. 학부가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인지 여부
2. 학부가 SKY가 아닌 경우 외국 박사인지 여부
3. 교수로 재직 중인 그 학교 학부 출신인지 여부
자 그럼 이 세 가지 분류 기준을 통과하여 학부가 SKY 출신이 아니고 외국 박사도 아니며 그 학교 학부 출신도 아닌 국내 박사 교수가 국내 심리학과에 몇 %나 있는지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대학을 다 조사 못한 이유는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 입맛에 맞는 대학만 임의로 뽑은 것이 아닙니다. 리스트의 위에서부터 차례로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말이죠. 이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은 여기 제시한 대학 명단에서 빠진 대학을 하나 선택해서 본인이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별로 큰 차이가 없을거라고 장담합니다.
* 서울대학교(12) : 서울대11, 전북대(Rutgers대) :
전멸
* 고려대학교(14) : 서울대3, 고려대9, 연세대. 서강대(Massachusetts 주립대) :
전멸
* 연세대학교(15) : 서울대4, 연세대8, 고려대, South Florida대, Smith대 :
전멸
보시다시피 SKY 심리학과는 세 기준을 통과하는 교수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고려대는 자대 학부 출신 교수가 60% 이상, 연세대는 자대 학부 출신 교수가 50% 이상입니다. 서울대는 압도적인 90% 이상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성주 교수 정말 대단하군요(저랑 대학원을 같이 다녔다능~). 보시다시피 SKY 출신이 아닌 국내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이제 그 밖의 수도권 심리학과 개설 대학을 살펴보죠. 최근 3년 사이에 신규 임용된 교수들의 경우 학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주 어렵더군요. 감안해 주세요.
* 성균관대학교(6) : 서울대3, 성균관대2(Nebraska대, Pitsburgh대), 장혜인(Pittsburgh대) :
전멸
* 성신여자대학교(7) : 서울대3, 고려대, 연세대, 이대(Georgia대), 성균관대(California대) :
전멸
* 서강대학교(7) : 서울대3, 연세대2, 고려대, Boston대 :
전멸
* 이화여자대학교(9) : 서울대, 이대2(Iowa대, Massachusetts 주립대), 이대, 양윤(Kansas 주립대), 안현의(Wisconsin대), 이승연(Iowa대), 설경옥(Minnesota대), 김수영(Wisconsin대) :
전멸
* 중앙대학교(8) : 서울대, 연세대2, 중앙대2, 중앙대3(Western Michigan, 동경대, Duke대) :
전멸
* 덕성여자대학교(7) : 고려대2, 이종숙(Iowa대), 오영희(Wisconsin대), 주은선(Chicago대), 김미리혜(New York 주립대), 김제중(Vanderbilt대) :
전멸
* 아주대학교(8) : 서울대3, 고려대3, 신강현(Kansas 주립대), 단국대(서울대박사) :
1명
보시는 것처럼 성균관대, 성신여대, 서강대, 이화여대, 중앙대, 덕성여대 모두 전멸이고 아주대학교에서 단국대 학부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박사를 하신 교수님이 딱 한 분 계십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1% 교수로 불리는 100만 부 베스트셀러의 작가인 이민규 교수님입니다. ㅡㅡ;;;
말 나온 김에 더 보죠. 수도권 이하 지방에 위치한 대학들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한림대학교(8) : 서울대6, 연세대, 이대(Michigan 주립대) :
전멸
* 광운대학교(7)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3, 성균관대2(Iowa주립대, Kansas 주립대) :
전멸
* 부산대학교(7) : 서울대4, 고려대, 부산대(서울대), 부산대 :
전멸
* 호서대학교 산업심리학과(6) : 서울대4, 이대(Texas Austin대), 호서대 :
전멸
* 전남대학교(9) : 서울대2, 한규석(Ohio대), 윤가현(Georgia대), 노안영(Kentucky대), 김문수(California대), 강영신(Northeastern대), 박형인(Central Michigan대), 이혜진(Wisconsin대) :
전멸
* 우석대학교(4) :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박영주(프랑스 리용 2대학) :
전멸
*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4) : 고려대, 연세대2 , 성균관대 유전공학과(고대) :
1명
* 충북대학교(10) : 서울대4, 고려대, 연세대, 이대2(Brown대, Purdue대), 박광배(Illinois대), 부산대 :
1명
* 강원대학교(5)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2 :
2명
* 경북대학교(7) : 서울대, 경북대(Florida 주립대), 이대(Purdue대), 경북대, 충남대(New Mexico 주립대), 서강대, 중앙대 :
2명
* 가톨릭대학교(13) : 서울대6, 고려대, 성심여대(Ohio대), 전북대(Arkansas 주립대), 정승철(프랑스파리제10대학), 최은실(이대), 한양대2 :
3명
* 대구 가톨릭대학교(4) : 서울대, 성균관대, 영남대, 아주대 :
3명
* 계명대학교(7) : 고려대2, 박권생(Texas Austin대), 김남균(Connecticut대), 성균관대, 중앙대, 손은정(이대) :
3명
보시는 것처럼 지방으로 내려가면 완전 전멸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전체 교수 중 비 SKY, 비 외국 박사, 비 자대 출신 교수의 비중이 50%를 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찾아본 곳 중에서는 대구 가톨릭대학교가 유일했습니다. 지방대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절대로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이버대학교를 살펴보겠습니다. 간혹 사이버대학교를 국내 심리학 박사의 탈출구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 고려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18) : 연세대7, 고려대2, 강원대(뉴욕주립대), 부산대(Florida대), Western Ontario대, 이대, 가톨릭대, 성신여대, 서울여대, 성결대 :
5명
* 대구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2) : 영남대(계명대), 서강대(고려대) :
2명
* 한양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9) : 서울대3,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Maryland대), 전북대(George Washington대), 이대, 숭실대 :
2명
대구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를 제외하고는 비율이 오히려 더 떨어집니다. 한양사이버대학교의 경우는 20%도 안 되고 고려사이버대학교의 경우도 30%를 넘지 못합니다. 대구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의 경우 100% 비 SKY, 비 유학파, 비 자대 출신 교수인데 그 2명이 누구냐 하면 영화치료로 유명한 심영섭 선생님하고 심리학 개론 및 카운피아로 유명한 전종국 선생님이에요;;;;
정리해 보겠습니다.
본인이 SKY 학부 출신이 아니고, 국내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데 자대 출신 교수 지망을 할 게 아니라면 국내 심리학과 교수가 되는 건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라는 걸 이제 아시겠지요? 죄송하지만 꿈 깨세요.
아, 물론 심리학과가 아닌 유사 학과까지 외연을 넓히면 가능성은 조금은 더 커지겠지만 저는 희망을 걸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낮은 확률을 바라보고, 이 늦은(?) 나이에 국내 박사 학위 취득에 도전한다는 건 솔직히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생각해요. 인생이 로또도 아니고 말이죠. 게다가 저처럼 인맥 관리 못하는 사람은 더 어렵죠.
그런 의미에서 박사 학위 과정에 기웃거릴 시간에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더 기울이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지금이라도 박사 과정에 들어가라는 되도 않는 오지랖 좀 그만 부리셨으면 좋겠네요.
덧.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 순수하게 공부가 좋아서, 개업하려고, 박사 학위를 요구하는 기관이나 기업에 취업하려고, 기타 등등 그 밖의 다른 목표를 위해 박사 학위에 도전하는 분들을 폄하하려는 포스팅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박사 학위만 있으면 어떻게든 심리학과 교수가 될 수 있겠지 하고 막연하게 감 떨어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분들과 제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한 글이에요.
작년에 출판업에 종사하는 분이 저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요새는 심리학이 출판 시장의 대세라고 하네요. 자기 개발(이거 계발이 맞나요? 당췌 헷갈려서 -_-;;;)서와 재테크 서적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심리학 서적의 세상이 온 겁니다.
그런데 정작 졸업하면 미아리에 돗자리 까는거냐는 비아냥과 조소를 들으며 학교를 다녔고 선배들로부터 10년만 참으면 심리학이 대우받는 세상이 온다는 격려같은 한탄을 들으며 살아온 제게 이런 세태는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도무지 들지 않거든요.
그래도 나름 최근에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서적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고 있다고 자부합니다만 정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심리학 서적을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궁금하시면 심리학 이야기 카테고리의 서적 코너에 가셔서 제가 별 다섯개로 평가한 책이 몇 권이나 있는 지 세어보시면 당장 아실 수 있을겁니다. 그나마도 제가 높게 평가한 책은 현장의 임상가를 위한 전공서적, 그것도 거의 번역서입니다. 일반인들을 위한 책은 제 기억으로 한 권도 없습니다.
이것은 심리학 분야가 일반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만큼 여전히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심리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비 전문가들이 당의정처럼 달달하게만 쓴 책으로 사람들을 현혹해 책 팔아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물론 강력히 후자를 의심하고 있고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2009년~2010년에 쏟아져 나온 '~심리학', '심리학 어쩌고 저쩌고로 살펴본 ~'류의 책 중에서 정말 좋은 심리학 책이 있나요? 몇 번 책 소개를 하면서 뻔한 사회 심리학 개념을 재탕하는 것을 한탄한 적이 있는데 사회 심리학의 개념들이 무슨 사골입니까? 재탕하게.
자신들만의 상아탑에 갖혀 상호소통을 하지 못하는 심리학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심리학이야 오해를 받든 말든 자본주의 파도의 서핑을 즐기는 얼치기 심리학자들은 정말 구역질이 납니다.
얼치기 심리학자들이나 제대로 안 파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넘들입니다.
당장 심리학과의 경쟁률이 폭등하여 어느 학교는 의대 다음으로 경쟁률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제 블로그만 해도 최근 들어 임상심리전문가, 상담심리전문가를 꿈꾸는 분들의 방문 수가 월등히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수련 기관이 모자라 수련을 받기 위한 재수는 필수요, 삼수도 필수라는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해줍니다. 선택받은 몇 몇을 제외하면 많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비정규직의 길을 걸어야 하거나(특히 박사급 전문가는 길이 없습니다) 프리랜서로 평생 심리평가만 하면서 치료자의 길을 접어야 하는데도 아무도 심리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심리치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심리평가만 해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전문가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이는 하향 평준화된 상황에서 아무도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하지 않습니다.
미팅에 나가 심리학과에 다닌다고 말하면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즐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을 만날 때 심리학을 했다고 하면 관심을 보이는 게 기분 좋아요?
언제까지 관심에 취해서 헤롱헤롱거리면서 살 겁니까?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것과 모자란 것을 점검하고 함께 나누고 쌓아서 제대로 된 전문성을 만들어야 합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심리학과를 들어갔는데 대학원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한 번 좌절하고 수련 기관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두 번 좌절하고, 가까스로 전문가가 되고 나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마지막으로 좌절해서 치료자의 꿈은 어디로 갔는지 프리랜서로 아둥바둥 일하다가 그냥 모교 대학원에 박사 과정으로 들어가서 주저앉는 걸 이제는 그만해야 합니다. 모두 다 교수가 될 수도 없지만 교수가 되고 난 이후에 심리평가도 심리치료도 supervision도 모두 내려놓고 그냥 대학생들에게 사기치면서 띵까띵까 정년만 보장받으려는 보신주의도 이제는 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실 별 것도 아닌 심리학 개념을 사골 우려먹듯이 재탕하면서 사람들에게 팔아먹는 짓거리부터 때려치워야 합니다.
책 좀 팔리고 인세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이 된 듯 으쓱하겠지만 나중에 나이 먹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정신차리세요. 그 때 가서 물릴 수도 없어요.
요새는 사기치는 것이 쉬운 만큼이나 물리기가 어렵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인간으로 살기는 참으로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맙시다.
최근에 박사 학위 과정에 들어가라는 압력을 도처에서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의 사생활에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건 매우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제 주변에 있는 분들이 나쁜 의도를 갖고 하신 말씀은 아닐테니 그건 넘어가고요.
대체 박사 학위는 왜 따려고 하는 겁니까? 실질적으로 박사 학위가 필수 요건인 교수 자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박사를 따야 할 이유가 정말 있나요? 혹시 남들 다 하는 거니까 나도 불안한 마음에 혹은 덩달아 하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두 번 사는 인생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 없이 살고 싶지 않아요.
그저 박사 학위가 있어야 어느 위치에 있던 더 좋은 기회가 온다는 막연한 기대로 너도나도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데 대체 그 좋은 기회라는 것이 뭡니까? 결국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연봉 좀 더 받고 그 댓가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행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지금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어서 충분히 행복하고 돈도 더 벌 생각이 없고, 더 많은 일을 하느라 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뭐하러 지금의 행복한 인생을 희생하면서 필요도 없는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수 년의 시간과 수 천 만원의 돈, 그리고 자존심을 버려가며 현장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교수에게 굽실거려야 한답니까?
학회의 supervisor들은 언제나 의사처럼 전문가 자격만 있으면 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자신의 제자, 수련 레지던트들에게는 박사 학위를 따도록 종용합니다. 자신만의 라인만을 구축하려고 혈안이 된 자격 미달의 supervisor들도 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후학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full time 박사가 된 이들이 교수가 될 수 없다면(대개는 나이 때문에 교수가 될 수 없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지요? 학교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프로젝트가 생기면 투입되어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을 감내해야 하는 허울좋은 인생이 아닌지요.
박사도 박사 나름이고 박사 학위가 그 사람의 실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막말로 말해서 박사 학위를 따면 논문을 더 잘 쓰게 된답니까? 연구를 더 잘하게 된답니까? 아니면 치료를 더 잘하게 된답니까? 현장에서 겪어 보면 학위에 따른 차이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박사는 이론에 경도되다보니 현장감이 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아요. 앞으로 제가 일하는 직장에서 치료자를 뽑을 때에도 박사는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어차피 교수의 꿈을 접은 저로서는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할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박사를 못 따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다든지 하는. -_-;;;)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엄한 짓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제가 박사 학위 과정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정말 박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큰 일이 생긴 줄 아시면 됩니다).
그러니 저를 아는 분들은 제발 제 앞에서 박사 학위 이야기를 꺼내지 말기 바랍니다. 행복한 제 인생에 똥물 튀기는 짓입니다.
병원에서 수련을 마치고 나온 이후 몇 년간 박사 학위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를 않았습니다. 지금의 자격으로도 현장에서 일을 하기에는 충분했으니까요. 그런데 사회는 그 사람의 실력보다는 학위를 전문성의 척도로 보더군요(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군요. 일반인에게는 전문성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것이 없으니). 심리학의 경우, 교수 임용 시, 여전히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를 선호합니다. 교수라는 자리에 대한 미련도, 사실상의 능력도 없는 저로서는 현장에서 일을 하는 데 있어 제 전문성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박사 학위가 필요해서 일 년 전부터 박사 과정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박사가 공부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심리학이 아니더라도 배움에는 당연히 끝이 없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순간부터 교만해지고 배움을 게을리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숱하게 보았기에, 그리고 박사라는 명함만 가지고 석사보다 못한 실력으로 행세하는 사람도 꽤 보았기에 박사라는 이름은 그만큼 큰 무게감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결혼해야 하는 것처럼(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문에 대한 쉼 없는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된 사람만이 박사 학위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고 정보를 모으다 보니 많은 학교에서 교수들이 full-time 박사를 원한다고 하더군요. 서울대 같은 경우는 내규로 정해졌다는 소문도 있고. 물론 교수의 입장에서는 학업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임상 심리학의 경우 남자라면 병원 수련을 마치고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는 나이가 최소 31살에서 그 이상이 됩니다. 대체로 그 무렵에 결혼을 하게 되어 당장 가정을 책임져야 되고요. 그 상황에서 full-time 박사과정생으로 들어가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에도 학생생활연구소에서 상담을 하거나 시간 강사를 하면서 근근이 생활하는 임상 심리학 박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지금의 임상 현장의 현실을 보면 그들에게 희망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교수가 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현장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높은 학력과 많은 나이가 걸림돌이 됩니다. 이들은 어디로 가야하겠습니까?
등록금 전액 보조와 한 달에 60만 원 지급이라는 조건은 석사 때라면 솔깃할 제안(이것도 특정 대학의 소수 박사과정생의 이야기이고 대부분의 박사과정생들은 한 학기에 500만 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을 자비로 내야 합니다)이겠지만 가정을 책임지고, 미래를 저울질해야 하는 박사과정생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이나 박사 과정에 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제가 박사 과정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어서 삐딱하게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학교의 교수들은 학업에만 매진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full-time 박사 선발을 고집하는 걸까요? 혹시 교양 과목의 강의라든가, project 연구원으로서의 인력 동원이라든가, 논문 작성을 위해 몸바쳐 일하는 데 있어 full-time 박사과정생이 부려 먹기가 용이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왜 심리학계에는 자신을 first author로 내세운 논문을 내는 교수의 수가 그렇게 적을까요? 정말 후학들을 위해 first author의 자리를 양보하는 선의의 교수들이 그렇게 많은 걸까요? 수많은 논문을 내면서도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데 7년이나 걸린 full-time 박사 선배는 과연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요?
이것도 음모론의 일종일까요? 아니면 제 피해 사고(persecutory idea)의 일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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