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alo님이 포스팅하신 글(게임 보고서)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마음 한 켠편에 접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결론이랄 것도 없지만) 개인적으로 학습을 위해 일정 수준의 박탈은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교육은 좀 더 전인적인 부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기에 이 이야기는 학습에만 국한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학부생이었을 때 저는 과 내 심리학 학술 모임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도 졸업생 자격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심리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었죠. 심리학에 걸신이 들렸다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그때는 정보를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인터넷도 없었고(있기는 했지만 매우 제한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으니), 도서관에는 없는 책 투성이 였습니다. 원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대형 서점의 외서 판매부를 이 잡듯이 뒤져야 했으니까요. 겨우 구한 원서를 번역하다시피 노트에 정리를 하고 그림을 베껴서 그릴 정도(생리 심리학의 경우)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노트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애착이 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치열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학생들을 보면 도무지 치열함이 없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자료 검색이 훨씬 쉬워졌지요. 원문 검색도 앉은 자리에서 마음대로 하고 보고서만 전문으로 내려받을 수 있는 사이트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편리함 때문에 치열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부족함이 없으니 고민이 없고, 고민이 없으니 노력이 부족해지더군요. 강사가 힘들게 준비한 PT 자료를 복사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노트북 자판 치기도 귀찮아서 칠판을 폰카로 찍어버리더군요. 유료 강좌인데도 별다른 심각성 없이 내 돈 내고 내가 빠지는데 무슨 상관이냐며 그냥 빠져버리고(다른 사람의 학습 의욕을 꺾는 문제는 생각조차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내용도 이해 못하면서 족보를 짜깁기해서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런 어설픈 노력으로 받은 학점들을 소중하게는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새는 자신이 원하는 학점을 주지 않으면 이메일로 협박을 하고 교수 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주는 통에 강사가 학생의 눈치를 보고 학생이 원하는대로 강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강사가 의욕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저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10초에 한 번씩 웃길 수 있도록 '웃찾사'나 열심히 연구해야 하지요.
뭐든지 돈과 시간과 인터넷만 있으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학습의 기쁨과 소중함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후배들의 실력(?)은 그나마 제가 공부를 하던 때보다 오히려 후퇴하는 것 같습니다. 학부 때부터 선배에게 겨우 얻은 원서를 몰래 제본해 한 페이지에 50개 이상씩의 단어를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을 하던 열정은 사라지고 요새는 원서를 교재로 채택하면 교수 평가에서 낙제점을 받게 됩니다. 고학년이 되어도 원서를 제대로 해석하는 학생이 드물고 대학원을 가지 않으면 외국 저널을 참고하는 학생이 없습니다. 저널 명을 알려줘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되묻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심리학에서는 필수 분야라고 하는 통계 방법론에 대한 지식도 하향평준화된 것 같고(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더 형편없습니다)... 답답합니다.
인제 와서야 대학원 때 뭘 물어보면 박사 과정 선배들이 달랑 책 이름 하나 던져주고 거기에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는지 이해합니다. 그 당시에는 그 선배들을 원망하고 이를 바드득 갈면서 밤을 새서 원서를 읽었지만 지금은 그 선배들이 고맙습니다. 그 박탈감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기에 좋은 정보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기르게 되었고, 자료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고,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강의를 할 때 수업 노트를 복사해주지 않습니다. 출처(reference)를 밝히지 않는 소스를 자료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보고서는 반드시 꼼꼼히 읽어보고 내용을 이해하고 쓴 것인지 구석구석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선배들처럼 누군가가 정말 중요한 내용을 물어보면 출처만 가르쳐주고 화두를 던집니다. 그걸 깨달은 사람은 저처럼 이를 갈면서 찾아보고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겠지요. 그건 그 사람의 몫입니다.
이런 말을 블로그에서 주절거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저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노땅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덧. 그렇다면 왜 저는 이곳 자료실에 자료를 올리고 있는 걸까요? 월덴 3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여기까지 오는 수고를 감당하는 분들은 충분히 박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곳에서 정보를 얻어가신 분들은 몰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결실은 노력하는 자만 얻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이거든요.
- 온라인 문법/맞춤법 점검 -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346
.
2006/07/11 11:17
.
학습에는 박탈이 필요하다.
언제나, 다시 읽어도 좋은 글입니다. 내 주절거림의 내용이 너무 많아질 것 같은 데, 트랙백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주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