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심리학자의 경우 수련 과정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심리평가이고 실제 임상 장면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도 심리평가지만 정작 심리평가와 관련된 전문성을 배양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임상가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수련 과정에서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은 심리평가를 실시하느라 완전히 물려서 그렇기도 하고 또 다른 이유로는 낮은 수가(수검자가 내는 비용이 적다는 의미가 아니라 심리평가를 실시하기 위해 투입되는 자원 대비 수가가 낮다는 이야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러고보면 심리평가는 그야말로 월급값을 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종합심리평가를 구조화된 면담+질문지 묶음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저간의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저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에 반대합니다.
평가자가 아무리 숙련되어 있다고 해도 수검자의 반응 속도와 어떻게 줄이든 검사에 걸리는 최소 시간을 고려하면 종합심리평가 한 케이스를 실시하는데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은 걸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게다가 평가자도 사람인만큼 기계처럼 일을 할 수가 없으니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종합심리평가의 수는 3건을 넘기 어렵습니다(간혹 이 이상의 검사를 소화하는 수련 기관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노동 착취에 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구조화된 면담+질문지 묶음으로 대체하면 구조화된 면담을 아무리 꼼꼼히 한다고 해도 최소한 두 배 이상의 수검자를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수가를 낮춘다고 해도 병원 입장에서는 후자가 훨씬 이득이죠. 그래서 병원 측에서는 이런 변화를 대놓고는 아니어도 지지할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병원에 이득이 되는게 수검자에게도 이득일까요?
또한 아직까지 자기보고형 척도들은 연구용으로 개발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상용화되지 않았고 그래서 보험 수가 청구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어느 정도 수준의 종합심리평가 가격대를 맞추기 위해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가격을 매기기 나름이니까요. 즉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질문지를 끼워넣어서 마음대로 책정한 가격을 수검자에게 청구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구조화된 면담+질문지 묶음이 종합심리평가를 실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질문지 묶음으로 대체하자는 쪽의 논리는 어차피 심리학자가 대학원 과정에 이르기까지 배웠던 연구 중심의 결과물이 척도들인데 현장으로 나오면서 종합심리평가만 사용하고 질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연구가 잘 되어 있는 척도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활용하자는거지요. 얼핏 보면 옳은 말 같지만 상당히 많은 척도들은 임상 장면에서 개발된 것들이 아닙니다. 학교 장면에서 개발된 척도들이 많아서 임상 장면에 적용해도 좋은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척도들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보고형척도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그것을 치료진과 평가자에게 솔직하게 오픈할 자세가 되어 있는 수검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심리평가를 받으러 오는 수검자의 상당수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지 않은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보고 신뢰도가 많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자기보고형 척도 묶음으로 측정된 것이 수검자의 문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숙련하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종합심리평가를 익히는 건 시간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수검자를 평가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합심리평가가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일례로 종합심리평가는 기질과 성격적인 부분을 평가하는데 약하기 때문에 TCI같은 도구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대안이 좀 더 철저히 종합심리평가 도구를 공부하고 관련 지식을 쌓고 그 틀 안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지 종합심리평가를 버리고 구조화된 면담과 질문지형 도구로 가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종합병원급의 대형 병원에 환자가 너무 몰려서 검사가 밀리니 수급 조절을 위해서, 임상심리학자의 업무 로딩을 줄이기 위해서, 병원의 현실적인 요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등등 이유를 대자면 끝도 없겠지만 정작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근본적인 목적인 정확한 진단과 사례 개념화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우려스럽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치열한 고민없이 수검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대충 둘러대지 마세요.
종합병원급의 대형 병원에서 종합심리평가 도구의 유용성과 한계, 각 장애군에 대한 검사 profile DB 만들기, 심리검사 도구에 대한 최신 지견 등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수련받던 2000년 대 초기 이후로 그런 워크샵이나 발표회를 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현장에 종합심리평가를 도입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정작 종합심리평가보고서 작성법에 대한 책은 달랑 한 권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게 현재 임상현장의 현실이고 민낯입니다. 달을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달이 가려진답니까?
이익을 위해 무리한 검사 요구를 하는 병원에 맞서 싸우기 어려우니 좀 더 손쉬운 부담 전가의 대상으로 수검자를 희생양으로 선택한거라면 심리평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 도리어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덧. 종합심리평가로 진단하거나 case formulation하기 어려운 장애가 분명히 있으니 그에 특화된 질문지를 활용해야 하지 않겠냐고 반박하는 분들이 계실텐데 정말 그런 장애가 얼마나 되는지 꼼꼼히 따져는 보고 이야기한 겁니까? 본인이 모르겠으니 그냥 손쉬운 대안에 주저앉은 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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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가 이 카테고리에 올린 글은 상담과 심리치료를 굳이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카테고리 이름조차 '상담/심리치료'이죠. 제가 상담과 심리치료를 세세하게 구분하지 않는 이유는 현장에서는 굳이 그런 구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오해를 하는 분들이 있어 이 참에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법 상 의사에게만 치료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에 의사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치료', '요법'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불법이죠. 그래서 한 때 놀이치료라는 명칭을 쓰려던 학회가 치료놀이학회로 개명을 하는 코미디 아닌 코미디가 연출되기도 했었죠. 어쨌거나 심리치료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은 정신과 의사가 묵인하고 있어서이지 마음놓고 써도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계셔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임상가들은 정신과 의사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 상담이라는 말을 일부러 선호하기도 합니다. 저도 좀 그런 편인데 굳이 심리치료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정신과 의사를 자극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상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더 큽니다만.
제가 상담이라는 용어를 심리치료보다 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제가 일하는 도박 중독 분야의 특성 때문입니다. 정신병, 병원, 환자, 치료라는 말을 끔찍히 싫어하는 도박자의 특성 상 굳이 심리치료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조기 탈락율을 높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 경험 상 도박자는 상담, 상담자와 같은 용어를 훨씬 더 편안하게 느끼더군요.
또한 심리치료라는 말은 듣는 사람이 시작 전부터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고 고쳐야 할 병에 걸려 있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와 달리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인식론적으로 좀 더 권력 위계를 높이 세우는)를 통해 치료자가 권위의 도구에 의존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는 굳이 하얀 가운을 입는 것, 큰 책상을 사이에 두고 명패 앞에 앉히는 것, 어려운 전문 용어를 남발하는 것 등이 있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심리치료에 비해 상담이 더 내담자의 치유와 행복에 도움이 되는 전인적인 용어에 가깝다고 보는데 심리치료적 기법은 상담 중에 상담자가 적절한 타이밍만 잡으면 언제든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사례 발표를 들어보면 사례 개념화 후 특정 심리치료적 접근법에 따라 상담(?)을 진행하는 걸 자주 보는데 제 경험 상 특정 심리치료적 접근법을 그대로 고수해서 내담자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상담자가 그런 경직된 사고틀을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내담자의 치유력을 약화시키거나 심하게는 중도 탈락하게 만들게 됩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가들부터 상담이라는 용어가 심리치료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폄하하는 스스로의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상담이 전쟁이라면 심리치료는 전투입니다. 전투의 승리는 분명히 중요하지만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죠.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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