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 심리학은 scientist-practitioner model을 따른다고 흔히 말합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scientist로서 이론을 정립하고 practitioner로서 그것을 현장에 활용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뒤돌아 생각을 해 보면 대학원에 다닐 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전문가 수련을 위해 병원에서 일을 할 때에도 진정한 practitioner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들을 소화해내기도 바빠서 자신의 주관에 따라 생각하고 적용하고 feedback을 받고 수정하는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그저 practitioner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자위하던 시기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소위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field에서 일을 하게 되니 아무도 저를 간섭하지 않으며 말과 행동에 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더군요. 이렇게 되고 나니 드디어 scientist-practitioner model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교나 수련 장면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내가 공부하는 것이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는 지, 그 궁금함이 도무지 풀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공부해왔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 어떤 모양으로 효과를 나타내는지 실제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니 그야말로 공부를 하는 맛이 납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지식과 전문성에 대한 갈증이 강해지나 봅니다.
이론적인 지식을 현장에 직접 적용하고 그로 인해 더 큰 배움을 쌓을 수 있다는 장점보다도 제가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어 좋은 점으로 꼽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이비'들을 가려낼 수 있는 '눈'이 생긴다는 점이죠.
현장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대학 교수, 책을 많이 번역한(혹은 쓴) 사람, 방송 출연 많이 한 사람, 학회에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면 모두 고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보니 그런 분들 중 상당수가 허당이고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교수면 무엇합니까? 심리치료/상담도 하지 않으며 심리평가도 하지 않는데다 supervision도 하지 않는 교수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연구마저도 현장과 유리된 상태에서 손쉬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현장에 적용할 수 없는 junk article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수랍시고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을 보면 구토가 나올 지경입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도 도박 중독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교수랍시고 써 먹지도 못할 엉터리 이론을 들이대면서 현장을 망가뜨리고 도박 중독자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임상 현장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짐작도 못했던 사실이지요.
그래서 저는 임상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어 가장 좋은 점이 사이비 전문가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이 생긴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이비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걷지 않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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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화면은 교보문고의 2007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중 일부입니다. 100위까지 산정하는데 크리스 라반의 '심리학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59위에서 한꺼번에 28계단을 건너뛰어 12월 마지막 주에 31위로 랭크되어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회원평점도 높고 리뷰도 온통 칭찬 일색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가 보기에 전형적인 'Junk Psychology'입니다.
이 책은 2000년도 초반부터 시리즈물로 나왔던 '심리학의 즐거움' 시리즈를 한 권으로 묶어 출판한 책인데 심리학 분야의 뻔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짜깁기하고 흥미 위주로 편집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목차만 보셔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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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음이란 무엇인가
1장 마음의 심리학
2장 감정의 심리학
3장 인간관계의 심리학
4장 기억의 심리학
5장 감각의 심리학
6장 의욕의 심리학
7장 선악의 심리학
8장 뇌의 심리학
9장 욕망의 심리학
2부 마음을 읽는다
1장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다
2장 직장에서의 심리를 읽는다
3장 비즈니스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4장 혈액형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3부 마음을 사로잡는다
1장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기술
2장 마음을 사로잡는 직장 처세술
3장 마음을 사로잡는 대화 테크닉
4장 마음을 사로잡는 위대한 리더십
5장 마음을 사로잡는 연애 테크닉
6장 마음을 사로잡는 심리 테크닉
4부 심리학의 대가들
심리학의 대가들
1부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고 2부, 3부가 정말 가관입니다. 특히 2부 4장의 혈액형 이야기는 정말 저자가 심리학 전공자인지 의심이 갈 정도지요. 서점에서 선 채로 대충 훑어보았는데도 무슨 이런 막장책이 심리학 책이라고 버젓이 팔리는지 모르겠더군요. 게다가 베스트셀러라니... 휴우~
그래서 호기심이 생긴 김에 찾아봤습니다.
저자 소개를 보면 크리스 라반(Chris Ravan)은 심리학을 전공한 의사라고 합니다. 오호~ 독특한 이력입니다. 게다가 부인이자 이 책의 공저자인 쥬디 윌리암스(Jeudie Williams)도 심리학 전공자라고 하니 뭔가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Chris Ravan, Jeudie Williams, psychology, doctor 등의 키워드를 조합해 구글링을 해 봤습니다. 결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Nothing!!!
그렇다면 이들의 책은 어떨까요? '심리학의 즐거움'의 원서명은 'Joy of Psychology'입니다. 아마존에서 검색해 봤습니다.
역시나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2000년 7월 번역 출간된 크리스 라반 박사(과연?)의 '데이트 박사'의 원서명인 'Date Doctor'를 검색해 봤습니다. 결과는 예상하시는 것처럼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혹시 제가 실수를 했는가 싶어 아마존의 'advanced search'를 이용해 꼼꼼하게 검색해 봤습니다만 역시나 전혀 없습니다. 대체 뭡니까? 이 사람들은... -_-;;;
저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이 책이 Junk Psychology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엉터리 책이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현실이 참으로 눈물납니다.
지각있는 심리학도라면 이런 책을 구입하는 일이 없겠지만(인터넷으로 구입할 수도 있겠군요. ㅠ.ㅠ) 일반인들이 읽음으로써 야기될 심리학에 대한 무지몽매가 무섭습니다.
크리스 라반의 '심리학의 즐거움(시리즈 포함)'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배려의 심리학', '데이트 박사'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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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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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즐거움 한국에서 나름 팝사이콜로지 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그렇지만 내용이 아주 해괴망측하고, 도무지 서양인이 썼다고 볼 수 없는 표현들로 가득하며, 어딘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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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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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이런 책을 읽다니. 나무 시체, 너희는 이런 책을 만들고 아마존의 나무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때 목차만 봤어도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을텐데. …오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