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중독 치료를 하는 상담자가 현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유형의 도박자는 아니지만 간혹 자신은 잡기에 능하고, 도박을 잘 하며, 좋아하기도 하니 이참에 아예 프로 도박사가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바람에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드는 내담자가 있죠.
이들은 대체로 젊고 혈기 왕성하며 머리가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 수준이 아직까지는 그리 극심하지 않아서 소위 바닥의 쓴 맛을 아직 못 본 분들이 많죠.
이러한 도박자를 상담하는 상담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도박 중독자라는 인식을 하게끔 노력하는 과정에서 프로 도박사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길인지를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는 도박자에게 도박으로 돈을 따는 것이 왜 불가능한 것인지 그 이유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한 함정입니다.
물론 프로 도박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도박자가 (머리로) 알게 만들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현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도박 중독 상태에 있는지를 도박자가 깨닫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비효율적인 작업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분들이 오면 프로 도박사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길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아래의 내용들을 먼저 생각해보도록 돕습니다.
1. 프로 도박사가 되는 것처럼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의사 결정은 현재 깨어진 삶의 균형(balance)를 회복한 이후에 즉,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회복한 이후에 내려도 늦지 않다.
2. 삶의 balance를 회복하고자 노력할 때에는 일시적인 성공만으로 자만하지 말고 몸에 밴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나타날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보자.
이 두 가지를 먼저 해 보자고 합니다. 물론 당연히 실패하게 마련이죠. 삶의 균형을 그렇게 쉽게 회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도박 중독자가 아닌 겁니다.
실패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이 프로 도박사가 되기 위한 재원이 아니라 단순한 도박 중독 상태에 빠져 착각을 하고 있는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죠.
만에 하나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프로 도박사가 되는 길에 대해 상담자가 함께 고민해야 하느냐고 우려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담자가 프로 도박사가 되겠다고 매달리는 건 진지한 자기 성찰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라 도박을 끊고 싶지 않은 갈망과 집착에 의해서 생긴 착각이니까요.
그래서 막상 삶의 균형을 회복하게 되면 프로 도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예전에
'지도가 영토가 아니듯 증상이 원인은 아니다'라는 말씀을 다른 포스팅에서 드린 적이 있습니다.
도박자가 하는 모든 말이 도박자의 문제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상담자는 그 안에 숨겨진 도박자의 양가 갈등과 고민을 읽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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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초기에 도박 중독자들이 흔히 하는 말 중의 하나는 '나는 도박 중독자가 아니다.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심하다의 기준이 뭐냐고 물어보면 '맨날 도박만 하지는 않았다'(과도한 시간 투입), '집을 날린 것은 아니다(과도한 재정 투입)',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지는 않았다(관계 파탄)' 등의 극단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치료 현장에서는 도박 중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실질적인 기준으로 '과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도박을 과하게 하면 중독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생긴다는거지요.
그렇다면
'과하다'의 기준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첫 번째 기준은 '삶의 균형이 깨지는 수준'입니다. 도박 때문에 일을 하는데 방해를 받는다든지, 가족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정도라도 균형이 깨져서 도박의 영향을 받게 되면 충분히 과한 겁니다. 물론 이 때 도박자는 균형이 깨진 것이 아니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균형이 깨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feedback이 어떤 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가족들의 잔소리가 늘고 주변 동료들의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 친한 친구들의 질책이 증가한다면 삶의 균형이 깨졌는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과한 수준으로 도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두 번째 기준은 활동의 전환(transition)'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게임에 빠진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게임에 너무 심하게 몰두하면 게임뇌가 되어 공부뇌로 전환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말합니다. 도박 중독도 이와 같습니다. 초반에는 도박을 하다가도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일을 하는 모드로 변경이 되지만 도박에 중독되면 도박뇌로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정작 일을 하거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도박뇌에서 해당뇌로 전환이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억지로 바꾸려고 무리하면 감정 조절을 잘 못해서 짜증이 심하게 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게 다 전환이 잘 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도박을 과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한 분들은 '삶의 균형이 깨졌는지', '활동을 전환하는데 어려움이 없는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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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을 불문하고 중독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데 어려움을 보이는 건 공통된 현상입니다. 신체적인 금단 증상을 거의 수반하지 않는 행동 중독, 그 중에서도 도박 중독은 특히 자신의 문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도움을 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의 반이라고 할 정도니까요.
도움을 구하러 자발적으로 전문 기관을 방문하는 도박자가 매우 드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족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방문을 해도 가족에게 준 경제적 피해와 마음의 상처가 미안해서, 혹시라도 가족들이 자신을 버릴까봐 어쩔 수 없이 가족의 강요를 받아들이는 것 뿐 처음부터 자신이 도박 중독자라는 걸 인정하는 도박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이처럼 병식이 없는 도박자를 상담할 때에는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윽박지르거나 직면하거나 웬만한 도박자라면 다 아는 뻔한 내용을 교육하라는 말이 아니라 도박자가 갖고 있는 양가 갈등(나는 도박 중독자가 아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도박 중독자라면 어쩌지?)의 빈틈을 정확하게 찔러서 동요를 일으켜야 합니다. 말이 기선 제압이지 설득하는 기법에 더 가깝습니다.
제가 첫 회기에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도박자는 도박 중독이라는 병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영화 타짜에 나오는 것처럼 비밀 골방에서 뿌연 담배 연기에 쩌들어 밤을 꼴딱 넘기는 사람이라든가, 집안 재산을 완전히 날려 온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어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붙잡고 우는 모습이라든가, 회사를 잘리고 감옥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람 등등.
그들이 가진 도박자의 상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도박 중독자를 그런 이미지로 그려야만 반대로 자신이 도박 중독자가 아님을 자기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학적인 진단 기준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도박 문제가 있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동차의 예를 자주 듭니다.
자신에게 도박 문제가 있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삶의 균형이 깨지는 것(타이어의 공기압 차가 생겨 주행 중 차가 흔들림), 2)
통제력을 잃어 멈추고자 할 때 멈추지 못하는 것(브레이크의 이상 작동)입니다.
제 경험 상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경험하지 않는 도박 중독자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차가 좀 흔들리거나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는 게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방치하다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이 두 가지 기준에 해당되면 일단 더 이상 주행하지 말고 차량 정비소에 가서 점검을 받아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그런 정비소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도박자가 자신은 절대로 도박 중독자가 아니라는 강경한 입장에서 한결 부드러워져서 자신의 애로사항을 털어놓곤 합니다.
도박자가 자신의 도박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해보도록 하기 위해
자동차의 비유를 들 때 도박 중독, 정신병, 치료와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주는 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런 정공법은 도박자의 방어를 뚫지 못합니다. 게다가 오히려 상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해 임의 탈락할 위험성을 높이기 때문에 초기 상담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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