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나 학교 당국에 의해 의뢰되어 비자발적으로 내방한 청소년이라면 MMPI-A와 같은 심리검사를 실시했을 때 L, K 척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하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담 라포 뿐 아니라 검사 라포를 잘 맺는 게 중요하고 이는 Wee 클래스나 청소년 상담복지센터처럼 학교와 연결된 기관에서 일하는 임상가가 특히 더 꼼꼼히 챙겨야 하는 부분입니다. 낙인 효과로 인해 또래 관계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니까요.
검사 라포와 관련해서는 여러 차례 포스팅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오늘의 주제인 자발적으로 방문한 청소년이고 심리평가에 대한 orientation도 잘 진행되어 심리평가를 했는데 MMPI-A에서 L, K 척도가 유의미하게 상승한 경우를 생각해보죠.
이런 상황에서 많은 임상가들이 당황하게 마련인데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와서는 정작 검사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힘든 것도 없다고 하는 꼴이니 말이죠.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청소년이 하고자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힘든 것도 맞고 도와달라고 온 것도 맞지만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 환자는 내가 아님'
그러니까 이 청소년은 가족 문제 해결을 도와달라고 '대표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아무리 열심히 상담해 봤자 나아지는 건 거의 없으며 상담자가 듣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도 않을 것이고 대개는 조기 종결하게 됩니다.
가족 안의 문제, 예를 들어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든가, 부모님이 자신이나 다른 형제를 학대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도와달라고 방문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탐색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상담을 받으러 온 걸 부모님이 아시는 지,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 이야기를 들어봐도 되는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물론 이 때 부모님 몰래 왔거나, 부모님에게 연락하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가족 문제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라포가 형성되지 않아 상담자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섣불리 공개할 수 없어서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청소년일수록 MMPI-A에서 Pd1, A-fam, A-fam1, A-fam2처럼 가족 문제 관련 척도의 점수가 현저히 낮게(원 점수 0점에 가깝게) 나옵니다. 역설적으로 가정 문제때문에 왔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죠.
많은 선생님들이 자주 질문하는 문제여서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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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류의 답 없는 질문 같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담 라포와 검사 라포가 둘 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임상가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심리평가를 주로 하는 임상 전공자가 상담 라포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상담을 주로 하는 상담 전공자는 검사 라포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임상 전공자가 검사 라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냐 하면 그건 또 그렇지 않은 게 병원 현장의 특성 상 검사 실시 여부, 실시 시점, 검사 도구의 선택 등 심리평가와 관련하여 임상가에게 주어진 권한이 극히 제한적이라 의사의 진료 이후 예약된 심리평가를 schedule에 따라 '쳐 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검사 라포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담 전공자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회기를 쪼개 심리평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담 라포에 집중하기에도 버거운 것이죠. 특히 비 자발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은 아동/청소년 전문 기관의 임상가들이 이런 문제에 특별히 취약합니다.
그래서
'아동/청소년 대상의 심리검사 시 라포 형성 방법'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검사 절차에 대한 상세한 orientation(검사 도구의 소개, 검사 시간, 검사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의 종류, 개인 정보의 보호, 해석 상담 절차 등)과 함께 검사 거부권에 대한 안내까지 충실히 해야 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상담 라포의 경우는 현재 상담 현장이 아무리 단기 상담 위주로 재편되었다고 해도 그래도 10회기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초기에 라포 형성에 문제가 생겼어도 이를 만회할 시간적인 여유가 그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검사 라포의 경우는 실패하는 경우 만회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뿐더러 한번 검사 도구에 노출되고 나면 재검사 불가능(비용을 면제해도 시간과 에너지를 또 다시 들이는 걸 허용하는 수검자는 거의 없으니), 검사 노출에 의한 학습 효과 및 오염 때문에 어차피 재검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검사 라포 형성에 실패하면 어렵게 실시한 검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데도 활용해야 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상담 라포와 검사 라포는 둘 다 매우 중요하지만 라포 형성에 실패했을 때 입게 될 손해만으로 비교하면 상담 라포보다 검사 라포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게 훨씬 더 치명적이기 때문에 임상가들은 상담 라포보다 검사 라포를 맺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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