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를 잘 하려면 DSM에 익숙해야 한다는 말은 임상심리전문가 과정을 밟는 임상심리학자들에게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어찌보면 뻔한 조언입니다.
수련 제도 자체가 정신건강의학 관련 분야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데다 대학원부터 DSM 체계에 따른 심리평가보고서 작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환경이니까요.
그런데 임상심리학자가 아닌 상담심리학자나 기타 정신건강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는 DSM에 따라 피검자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낯설고 어색한 일일 수 있습니다.
물론 DSM도 여러 가지 단점이 있고 그런 단점들 때문에 계속 개정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임상 장면에서 심리평가를 할 때, 특히 진단이 필요한 피검자를 formulation할 때에는 DSM에 따른 다양한 정신 장애를 가설로 설정한 뒤 심리검사 결과를 통해 이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뿐 아니라 피검자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오류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DSM을 활용하지 않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평가자의 사전 지식과 정신병리 지식의 수준에 따라 가설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의 학생생활상담소에서 대학생의 진로와 연애 문제만 주로 상담한 상담자가 DSM 체계를 모르면 정신분열병이 발병해서 문 밖 출입이 어려운 피검자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겁니다. 정신분열병 환자에 대한 frame 자체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아직도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심리평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존의 DSM 체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DSM도 모르면서 심리평가를 잘 하려는 건 무모한 욕심입니다.
최소한 Axis 체계와 10가지 장애 범주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각 범주에 속한 장애들의 변별 진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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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상담과 심리서비스의 동향(trend)'은 한국심리학회 산하 한국상담심리학회에서 2009 한국심리학회 연차 학술대회의 국제심포지엄으로 개최한 발표회로 일본 효고대학교의 Darryl Yagi교수를 초빙해 일본의 상담 심리학의 동향을 듣고 한국의 그것과 비교하는 자리였습니다.
25일 오전 10시라는 비교적 넉넉한 시간에 시작했는데도 시작 시 참석자가 20명도 안 될 정도로 인기가 별로더군요. 동시통역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영어로 들어야 하는 발표라서 그랬을수도 있지만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3세대 일본인인 Yagi교수는 아주 알아듣기 쉬운 영어 발음으로 일본 상담심리학의 현황을 소개했습니다. PPT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더군요.
내용을 정리하자면
현재 일본은 임상심리학이 학교와 현장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과언이 아닌 상태인데 1950년대에 미국에서 교육받은 상담 심리학자들이 대거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상심리학과 상담심리학의 정체성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데다 상담심리학자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없고 특히 대학에도 상담심리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983년에 설립된 일본임상심리학회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본의 심리학 관련 학회 중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을 했고 2007년 현재 16,000명의 임상심리학자가 의료 분야 뿐 아니라 학교, 국가 기관에까지 진출해서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한국의 상담심리학 현황과 전망에 대한 발표가 있었는데 발표자가 준비한 PPT자료도 100% 영문, 발표도 영어로 하더군요. 대체 한국에서 한국인이 한국인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발표에서 오로지 영어만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초빙한 Yagi 교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전에 배부한 자료를 보면 모두 한영 번역이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굳이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한국의 상담심리학은 한국문화를 반영한 고유의 상담이론과 기법의 개발에 중점을 둔 연구 활동, 상담 심리학자를 양성하는데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자격 인증 제도를 장점으로 보유하고 있는 반면 학계에서 동의된 구조화된 상담자 훈련 모형이 없다는 점, 지나치게 학교에 치우쳐져 있어 상담에 대한 실습과 인턴십 기회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도전이 예상되는 문제로는 임상 심리학자를 비롯한 인근 전문가와의 경쟁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사회복지사가 강력한 경쟁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임상심리학 분야를 위협하고 있는 한국의 상담심리학의 입장에서는 임상심리학자에게 온통 점령당한 일본의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약간은 뿌듯할 수도 있겠더군요.
5분의 휴식 시간이 지나 진행된 open discussion에서도 온통 영어만 사용하네요. 오직 사회자만 우리말을 씁니다. 토론자로 참석한 교수도 영어만 사용하네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포지엄은 처음 봅니다. 참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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