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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중에도 글을 잘 쓰는 분들이 꽤 많죠. 심리학의 난해한 전문 지식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어 쓰는 재주를 가진 분도 많고 몇몇 분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 가장 문학적인 향기가 물씬 풍기는 글을 쓰는 심리학자는 단연코 이흥표 선생님입니다.
이 책은 이미 전작인
'사람은 왜 아픈가(2012)'에서 진솔하면서도 감동적인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준 이흥표 선생님이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입니다.
'사람은 왜 아픈가(2012)'가 상담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을 마음으로 따라가는 책이라면 이 책은 사람은 대체 왜 상처를 받는 것인지, 사람이 이런 상처를 과연 치유할 수 있는 것인지, 결국 사람이 선택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의 답을 생각으로 따라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 마음은 왜 아픈가
2. 신은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가
3. 인간은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가
4. 무엇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가
5.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굉장히 방대한 연구들의 review 결과에 기반하여 엄정하고 과학적인 글쓰기를 지향하면서도 인문학의 향기를 담아내는데도 소홀하지 않고 있어 읽는 맛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볍게 읽자면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읽을수도 있고, 그 안에 담긴 함축된 의미를 진지하게 음미하려면 한 구절 한 구절을 곰씹으며 천천히 읽을 수도 있는 묘한 매력의 책이죠.
예전에 이흥표 선생님이 상처에 대한 인문학적인 책을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걸 기억하기에 저는 그냥 가볍게 출, 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훌훌 읽으려고 마음 먹고 집어 들었는데 제 손과 눈과 마음을 잡아끄는 대목이 많아서 자꾸 읽는 속도가 느려지더군요.
상처는 피할 수 없으며(운이 좋다면 최소한의 상처만 받겠지만) 잊을 수도 없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 상처를 받아들일 지 말 지를 결정하는 건,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건 개개인의 선택에 달려있고요.
상처받은 분들과 그 상처를 '그루밍'하는 자의 길에 서겠다고 결심한 모든 분들에게 현명한 선택의 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덧. 이 책은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여 많은 분들과 함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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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심리학 분야에서 많이 연구된 주제 중 하나로 sociotropy-autonom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두 개념을 간략하게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 sociotropy : 대인 관계가 중요한 성격 특질
* autonomy : 독립성이 중요한 성격 특질
그 유명한 Aaron T. Beck이 이 congnitive-personality contructs를 측정하기 위해 Sociotropy-Autonomy Scale(SAS)을 만들기도 했지요. 물론 우울 장애에 대한 risk factor로써 살펴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자기 효능감이 높고, 목적 의식이 강하며,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경향도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향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 이들을 독단적이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남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향 때문에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왕왕 받기도 합니다만 자율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며 그 과정을 자신이 통제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까지 지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획득하게 될 확률이 큰 것이죠.
이기적인 사람 중에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섞여 있을 수는 있지만 자율성이 강한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질-성격 검사인 TCI를 빌어 설명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이냐의 여부는 자율성 차원보다 연대감 차원이 더 많이 좌우합니다.
자율성 차원이 high 수준일 때 연대감 차원이 high라면, 자기 초월 차원의 정도와 상관없이 HHH(창의적인), HHM(성숙한), HHL(조직화된) 성격 경향을 보입니다. 모두 이기심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 유형이죠. 하지만
연대감 차원이 low라면 HLH(광적인), HLM(괴롭히는), HLL(독재적인) 성격 경향을 나타냅니다. 세 성격 유형 모두 다른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만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TCI에서 이기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성격 차원은 자율성이 아니라 연대감입니다.
사실 자율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통제받는 걸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가 명령받는 걸 워낙 싫어하니 자신의 명령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지도 잘 이해하거든요. 그래서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거기에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까지 낮은 사람이라면 나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마음까지 강하겠지요(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율성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기적이라는 사회의 편견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TCI의 사회적 민감성 기질 차원이 극도로 높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 글마저도 신경 안 쓰시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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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주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내가 뭘 원하는지 정말 몰라?"
"그런 건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 아닌가요?
모두 나에게 마음 읽기(mind reading) 할 것을 요구하는 말들입니다.
요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 읽기는 지극히 편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시시콜콜 일러줄 필요가 없으니 에너지가 절약되고 무엇보다 내 맘에 들지 않는 결과가 발생하는 경우 내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만 하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마음 읽기를 잘못한 상대방을 마음껏 책망할 수도 있으니 더 없이 편리한 수단이 아닐 수 없죠.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개는 힘이나 권력을 잡은 쪽에서 행사하는 경우가 많고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곤 합니다.
예전에 어느 포스팅에선가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 읽기를 요구하는 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고 거기에 선택까지 안 하면서 열매만 따 먹겠다는 심보에서 파생된 아주 못된 버릇입니다.
마음 읽기는 대인 관계에 해롭기 그지없는 방법입니다. 대인 관계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상당수의 원인이 바로 마음 읽기입니다.
그러니 마음 읽기는 요구도 말고 응하지도 마세요.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 읽기를 원하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달라고 하세요.
저는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해도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으면 일부러 모른 척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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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소설입니다. 원래 저자가 시리즈 물에 등장시킨 인물은 Hector인데 국내에는 꾸뻬씨로 번역되었죠.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시작으로 '꾸뻬 씨의 인생 여행', '꾸뻬 씨의 우정 여행', '꾸뻬 씨의 사랑 여행' 순으로 시리즈 물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전작인
'꾸뻬 씨의 행복 여행(2002)'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기에 이 책도 기대를 많이 하고 봤는데 결론적으로 기대만 못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꾸뻬 씨가 아니라 꾸뻬 씨의 아들 꼬마 꾸뻬입니다. 공리주의자인 아빠와 칸트주의자인 엄마 밑에서 자라는 주인공 꼬마 꾸뻬가 죽음, 용서, 자격, 선택, 비밀, 사랑, 정의, 돈, 예술, 종교, 꿈, 차이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가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아이의 관점에서 심각한 주제들을 다루는 걸 보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아이처럼 보여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았습니다. 등장하는 에피소드들도 문화적인 차이인지, 아님 투영된 저자의 가치관이 저랑 맞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에 그다지 와 닿지 않고요.
물론 우리가 자라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중요한 삶의 교훈들이 많이 나와서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의미는 있었지만요.
닫기
* 말을 할 때는 지금 내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 늘 생각할 것
* 인생에 있어 늘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좋은 면을 볼 필요가 있다
* 삶에서 중요한 것은 존중받을 줄 아는 것이다.
꾸뻬 씨의 행복 여행 때문에 다른 시리즈를 읽고 싶었던 분이라면 별로 추천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처럼 실망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직 읽지 못한 '꾸뻬 씨의 우정 여행'과 '꾸뻬 씨의 사랑 여행'은 안 읽어도 될 것 같습니다.
덧. 이 책은 직장 자료실에서 대출해 읽은 책이어서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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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를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내용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을텐데요.
대표적인 것인 선택과 집중 문제입니다.
어떤 자기계발서에는 우선 순위를 매기지 말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라고 충고하고 다른 자기계발서에서는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라고 조언합니다. 시간이라는 제한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걸까요?
시간이 한정된 자원인 것만큼은 확실하니 가장 중요한 일을 선택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아님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묻혀 있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열정을 불사르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해낼 수도 있을까요?
저는 둘 사이의 절충점이 가능하다고 보는 편인데 우선 둘 중 하나의 관점 중에서만 고르라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시도해보라는 쪽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는데 그 일이 모두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합니다.
해야만 하는 일들은 사실 해야 하는 이유가 나 자신의 가치관이나 삶의 의미와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주어진 일이니까 수동적으로 처리해야 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하는 일이 많죠. 이런 일들을 동시에 모두 해 내겠다고 시도해봤자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내면의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수록 상승 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제게는 블로깅과 심리학 공부가 그 예가 될 수 있겠는데요. 둘 다 제가 굉장히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그 내용을 정리해서 블로깅을 하고 있죠. 그 내용을 보고 의견을 남겨 주신 분들의 코멘트가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제게 영감을 주기도 하고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하게 도와줍니다. 그런가 하면 포스팅 내용을 보고 강의 의뢰를 하는 분들이 나타나고 그렇게 되면 공부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강의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깊은 수준으로 공부를 하게끔 자극을 받습니다. 이처럼 심리학 공부와 블로깅은 서로 연결되어 상승 효과를 일으키고 시간을 절약하며 생각을 정리하도록 고무합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모두 한꺼번에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대신 해야만 하는 것은 빼고 하고 싶은 것 위주로 목록을 만드세요. 하고 싶었던 것을 동시에 시도할 때 얼마나 엄청난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지 꼭 한번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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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ISC-III, K-WAIS가 각각 K-WISC-IV, K-WAIS-IV로 업데이트되면서 소검사의 총 수가 15개로 대폭 늘어났습니다. 물론 합산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10개의 주요 소검사만 실시해도 되지만 대체 소검사를 고려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수검자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보충 소검사의 추가 실시를 고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15개의 소검사를 모두 실시하자니 수검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고 늘어나는 검사 시간을 고려하면 효율적인 조합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K-WAIS-IV와 K-WISC-IV의 소검사 구성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주요 소검사는 모두 실시하지만 보충 소검사를 선별적으로 활용한다는 전제 하에 말씀드리겠습니다.
K-WISC-IV의 경우 '상식', '단어추리', '빠진곳찾기', '산수', '선택'이 보충 소검사인데 IV로 오면서 추론 영역이 보강되어 III에 행렬추리, 공통그림찾기, 단어추리 소검사가 추가되고 처리 속도 측정을 보강하면서 선택 소검사가 추가되었죠. 어차피 행렬추리, 공통그림찾기는 주요 소검사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이 실시해야 하고 단어추리와 선택이 새로 추가된 보충 소검사입니다.
매뉴얼에서는 WMI, PSI를 도출하기 위해서 각각 두 개의 유효한 소검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요 소검사가 무효가 될 경우를 대비해 '산수', '선택'을 가능한 한 실시하는 걸 권장하고 있습니다만 기호쓰기와 동형찾기 대신 선택 소검사를 실시해야 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 소검사는 우선 순위에서 밀립니다. 산수는 순차연결에 자리를 빼았겼지만 calculation skill을 측정하는 유일한 소검사이면서 동시에 concentration도 측정하기 때문에 여전히 제공하는 정보가가 꽤 높은 편입니다.
그렇다면 단어추리 소검사는 어떨까요? 개정 방향이 Reasoning을 강조하게 되면서 언어 이해 지표에 추가된 소검사가 단어추리인데요. 추론을 평가하는 소검사가 2개(공통그림찾기, 행렬추리)나 추가되었는데 언어 이해 영역에는 이미 공통성, 이해라는 걸출한 소검사가 2개나 있고 단어추리는 주요 소검사가 아닌 보충 소검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게 평가된, 굳이 꼭 실시할 필요까지는 없는 소검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K-WISC-IV를 사용할 때 보통 상식, 빠진곳찾기, 산수 정도를 더 실시하고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소검사 순서로는 빠진곳찾기 -> 산수 -> 상식 -> 선택 -> 단어추리를 꼽습니다.
K-WAIS-IV의 경우에는 '이해', '빠진곳찾기', 무게비교', '순서화', '지우기'가 보충 소검사인데 K-WISC-IV와 유사한 이유로
이해와 빠진곳찾기, 순서화 정도를 더 실시하고
우선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소검사 순서로는 빠진곳찾기 -> 이해 -> 순서화 -> 지우기 -> 무게 비교를 권장합니다.
K-WAIS-IV에서도 WMI, PSI 도출을 위해 '순서화'와 '지우기'는 가능한 한 실시하도록 권장하고 있는데 K-WISC-IV와는 달리 K-WAIS-IV에서는 순서화(K-WISC-IV에서는 '순차연결'로 불림)를 우선 순위에서 조금 앞으로 당겼습니다. 왜냐하면 K-WAIS-IV에서는 작업 기억 측정에서 여전히 산수를 주요 소검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산수 기술의 혼입 효과를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정 점수(K-WISC-IV의 처리 점수) 분석을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순서화 소검사를 실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간략히 요약하면,
* K-WAIS-IV : 이해, 빠진곳찾기, 순서화 보충 소검사 추가
우선 순위) 빠진곳찾기 -> 이해 -> 순서화 -> 지우기 -> 무게비교
* K-WISC-IV : 상식, 빠진곳찾기, 산수 소검사 추가
우선 순위) 빠진곳찾기 -> 산수 -> 상식 -> 선택 -> 단어추리
이론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 경험에 입각한 보충 소검사 선택 기준과 순서이기 때문에 본인의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활용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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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내담자가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의 답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이를 확인하려고 상담자를 찾는 건 아닙니다만 무엇이 문제인가를 한번도 고민하지 않고 백지 상태에서 무턱대고 오는 내담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막연하기는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왠지 끌리지만 겁이 나서 저지르지를 못하겠다'라는 정도의 느낌은 갖고 있죠.
내담자가 갖고 오는 모든 문제는 그것이 '일'에 대한 것이든, '관계'에 대한 것이든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알고 보면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답을 알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마음을 따를 수 없거나 반대로 현실적인 이득을 따르고 싶으나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 주저하고 있기도 하고, 정답을 모르지만 그 정답으로 향하는 문고리를 잡고 이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연다면 언제 열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상담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내담자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내담자의 현명한 선택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건 선택 결과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이해득실에 따라 결정토록 돕는 겁니다. 그런 도움을 원했다면 내담자는 상담자를 찾지 않았을 겁니다.
이 선택을 하게 되면 이런 장점이 있는 대신, 이런 단점이 있고, 저 선택을 하게 되면 이런 문제가 있지만 이런 좋은 점도 있다는 식의 결정 저울(decisional balance)을 암만 정교하게 만들고 양쪽 저울에 심리적인 무게추를 열심히 달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담자가 그 저울에 무엇을 올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가치관'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습니다. 대부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도화된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 세뇌, 강요, 설득된 전형적인 가치관을 대충 자신의 것으로 믿고 있을 따름이지요.
물론 그런 가치관으로도 사회 생활을 하는데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가치관이니까요. 하지만 일단 갈등이 발생하고 기존의 가치관으로는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깊은 고민이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치관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막연히 그동안 존재감을 몰랐던 자신만의 가치관의 존재나 필요성을 느끼고 탐색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비건(vegan)입니다. 비건이 되기 바로 전까지 고기를 잘도 먹다가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완전 채식을 실천하게 된 경우이죠. 평소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저항이 별로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제가 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고기를 먹을 때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남 모르는 찝찝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몰랐지만요. 환경에 대한 관심은 평소에도 많았기에 관련된 책을 읽다가 우연히 동물 권리에 대한 책까지 읽게 되었고 그 때서야 마음 한 구석에 스물거리던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종차별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죠. 동물에 대한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어요. 우연이었지만 제가 몰랐던 제 가치관 하나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건이 되었고 지금은 비건이 되기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제 가치관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죠.
가치관은 그런 겁니다. 원래부터 꼭 맞는 맞춤옷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야 행복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관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 가치관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담자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찾도록 돕는 것이 상담자의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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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에
'관계는 기대 때문에 망하고, 불행은 비교 때문에 느낀다'는 포스팅을 하면서 우리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기대'와 '비교'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포스팅은 위의 글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매사에 자꾸 기대를 하게 되면 그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 실망하거나 원망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대인 관계가 악화됩니다. 또한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며 불행을 느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며 얻게 되는 일시적인 위안에 매달리게 되죠.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대'와 '비교'를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아무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경지에 이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마음가짐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아무런 욕심도 갖지 않는다면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리고 무기력에 빠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적절한 수준의 욕심은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 생각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때때로 꺼내 되새겨 보세요.
1.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맞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빨리 인정할수록 좋습니다. 세상이 공평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기대가 꺾이는 경험을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왜 부자가 아닐까', '왜 나는 예쁜 여자 친구가 없을까', '왜 나는 한번에 취업이 안 되는 걸까'에 대한 원인을 '부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아서', '내가 못생겼기 때문에',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해도 안 되니까'처럼 원인을 자신에게 귀인하게 되고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불공평한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을 덜 느끼게 됩니다. 안 아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아프죠. 세상을 살면서 안 아플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 덜 아픈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무 아프면 아픔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어 문제 해결적인 대처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되거든요.
2. 다른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세상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라는 걸 빨리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제아무리 옳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담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마련이고 어떤 사람이냐,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냐, 지금 어떤 상황과 처지에 놓여있냐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더 신기한 것이죠. 나는 왜 자꾸 다른 사람들과 마찰을 빚고, 오해가 생기며, 사람들이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하면 그건 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딴지를 거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냥 주어진 환경에 맞춰 패배자처럼 참고만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빨리 인식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확률이 증가하게 됩니다. 최소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 속에서 낭비되는 에너지와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나만 싫어하는 것 같고, 세상이 나만 홀대하는 것처럼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기대를 내려놓고 비교를 하지 않기 위해 오늘 말씀드린 두 가지를 한번 차근차근 곰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실거에요. 저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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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4년 내면아이와 성인자아의 연결을 통해 심리 문제를 해결하는 '내면적 유대감(inner bonding)' 치유 과정을 에리카 초피크 박사와 공동으로 최초 개발한 Margaret Paul 박사가 썼습니다.
원래 이 분을 유명하게 만든 책은 'Healing Your Aloneness'로 우리나라에는 '내 안의 어린아이 : 잃어버린 내면아이를 만나는 자기 치유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바 있습니다.
이 책은 'Healing Your Aloneness'를 읽은 뒤 내면아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성인자아가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독자들의 빗발같은 성화에 보답하고자 나온 후속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면아이에 대해 좀 더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한 분들은 Healing Your Aloneness를 먼저 읽으시는 것이 좋고 임상/상담 장면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이 책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마가렛 폴 박사가 주장하는
내면적 유대감 형성을 통한 치유라는 건 대부분의 탁월한 치료적 기법이 그렇듯이 원칙적으로 간단합니다.
성인자아로서 하는 '생각'과 내면아이로서 느끼는 직관적인 '느낌'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택'과 '책임'을 인식하고 연결하는 것과 비슷해서 좀 놀랐습니다.
이 책은 앞서 출판된 'Healing Your Aloneness'를 읽지 않은 사람도 내면아이 치유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고 내면적 유대감 형성을 해 나가는 과정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상담의 초보자라도 쉽게 개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배우자, 부모, 자녀, 친구, 동료와의 관계를 각각 풍부한 사례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무에서 활용하기에도 좋습니다.
특히 이 책은 각 장의 주요 개념을 장이 끝나는 부분에 다시 한번 요약 정리하고 있어 독학을 하기에도 편리합니다.
내면아이 치유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하는 명저입니다. 시중에 내면아이 치유법을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이 갑입니다.
중독자를 상담하는 상담자들은 반드시 읽어보세요.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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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아이'란 우리의 인격 중에서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부분으로, 감정을 우선시하는 '직감적인' 본능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본래 모습이자 핵심적인 자아, 타고난 인격인 셈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내면아이와 어린 시절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의 유치함이 아닌 '순수함'을 말한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내면아이의 연약함, 직관력, 경이로움, 상상력, 타고난 지혜,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쇠퇴하거나 변하지 않는다.
* '성인자아'란 논리적인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으로 현실 세계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 즉 우리의 지성적이고 우뇌적 부분이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의식인 셈이다. 성인자아는 존재보다는 행동, 경험보다는 행동과 관계가 있다. 성인자아는 우리의 인격 중에서 후천적으로 배운 부분에 해당한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의 목적은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믿으며 살아온 믿음들, 수치심을 주며 자신을 제한하는 잘못된 믿음에 대해 의심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의 3단계
- 1단계 :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떤 불편함이나 갈등을 인식하는 것
- 2단계 :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 3단계 :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 자신의 감정과 단절되면 타인에게도 단절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단절을 더욱 더 고조시킨다. 이렇게 내면의 자신, 즉 내면아이와 단절되면 자신의 감정과 연결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 사실 의식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 대부분이 '성숙하고 적절하며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행동이 뒷받침될 때만 의미가 있다.
* 내면아이가 성인자아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자신이 사랑스럽지 못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성인자아가 자신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의지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의존이다.
* 의존의 두 유형
- 내면아이가 항상 '남의 시중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
- 사랑을 베풀지 않는 성인자아가 '남들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하는 경우'
* 모든 종류의 의존은 자신의 내면 및 타인과의 상호 작용에서 갈등을 지속시키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가장 어려운 단계는 마음을 열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는 부분이다.
* 배우려는 의도에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모든 감정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기꺼이 고통을 느끼려는 의지다.
* 내면적인 유대감 형성에서는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한쪽으로 치워둔다. 판단이 유대감 형성 과정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대감 형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내면아이가 침묵을 지킨다면 이유는 2가지다. 성인자아가 자신을 살펴보고 알아가려는 의도가 아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와 내면아이가 아직 당신의 의도를 믿지 못하는 경우다.
* 내면아이가 되어 말할 때는 인형을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우선 인형의 얼굴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고 가슴에 안은 상태에서 숨을 들이마신다. 내면에 의식을 집중하면서 마치 아이가 된 것 같은 상상을 하라. 인형이 당신의 내면아이가 되는 것이다.
* 내면아이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나면, 다시 성인자아의 역할로 돌아와 아이를 위로해줘야 한다. 가슴에 품었던 인형을 안아 올려서 인형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려라. 사랑의 마음으로 인형을 바라보면서 내면아이에게 그 아이의 감정을 이해했다고 알려야 한다. 또한 내면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다.
* 우리는 여러 고통으로 힘들어지면 상담가, 친구, 성직자, 알코올 중독자 모임 등 외부에서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 삶을 힘들게 하는 잘못된 믿음 6가지
- 나에게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
-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 무력하다.
-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내 감정보다 중요하고, 나는 그들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
- 나는 다른 사람이 가지는 나에 대한 생각과 느낌, 나를 대하는 방식을 통제할 수 있다.
-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원할 때는 나의 진정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 나는 고통, 불편함, 두려움, 상처, 슬픔, 타인과의 단절, 지루함, 실망, 수치심,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
*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기준은 그 행동을 하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드느냐가 아니라, 그 행동을 마친 결과 자신에게 어떤 기분이 드느냐다.
* 진정한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있는 기분, 일체감, 순조롭게 흘러가는 느낌 등이다. 이런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 바로 자유다. 기쁨의 확실한 증표로는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능력도 있다.
*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을 스스로 인정하는 방법이다.
* 우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4가지 방식
- 물질, 활동, 사람에 대한 중독
- 노골적인 통제.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이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 은밀한 조종. 칭찬, 보살핌, 친절함, 유혹 등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거나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것을 말한다.
- 저항
* 의존의 기본이 되는 것은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단절에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이 둘이 단절될 때 의존적인 사람들이 모여 의존적인 관계를 만든다.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 이상에 중독되어 있는데, 의존적인 관계는 서로의 중독을 더 부채질한다. 의존적인 관계는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에 대한 책임을 저벼릴 때 일어난다. 의존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2가지로 나뉘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첫 번째는 자기애적인 사람 혹은 남의 시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공감적인 사람 혹은 남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다.
* 성인자아와 내면아이가 연결되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이다.
* 자존감을 쌓기 위해 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면아이를 위해 실제로 행동해야만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 누군가 자신을 사랑스럽지 못하게 대할 때 참는 것은 상대에게도 절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 부모님께 베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지고 사랑에서 비롯된 일이라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두려움, 의무감, 죄책감에서 부모님에게 베푼다면 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 적절한 한계를 설정해주는 성인자아 없이 버려진 내면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감정적, 성적, 신체적으로 학대할 수 있다. 즉 자녀에 대한 아동 학대는 적절한 한계를 만드는 성인자아의 부재로 버려진 내면아이가 분노에 휩싸일 때 일어난다.
* 자녀들이 말을 잘 듣게 만드는 법을 물어보러 상담실을 찾는 부모가 많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을 변하게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녀를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아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자녀들에게 개인적인 책임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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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산 라파엘 대학교의 마테오 모테를리니 교수가 쓴 인지경제학 서적 '이코노믹 마인드 : 99%를 움직이는 1% 심리의 힘(2006)'을 북 크로싱합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인간의 착각 뒤에 숨겨진 심리 현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는 흥미로운데 너무 어려운 사례들을 선택해서 이해가 쉽지 않은 책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궁금하신 분은 '소개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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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덴 3에서도 몇 차례 나름대로 답변을 드린 적이 있고 포스팅으로도 몇 번이나 머리보다 마음을 믿고 따르라는 조언을 드렸지만 여전히 주저하고 결정을 못 내리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요.
머리를 따르지 말고 마음을 따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가 하는 소위 합리적라고 부르는 생각을 따르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습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생각을 해라, 머리를 써라, 논리적/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머리를 믿지 말고 마음을 따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머리가 분석하는 정보만 믿고 의사결정을 해 왔으니 습관이 되어버린 머리를 버리고 갑자기 마음을 따르는 건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은 일이죠.
둘째 이유는 머리가 마음보다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면 마음이 말하기 전에 이미 머리가 나서서 A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고 B는 또 이러쿵 저러쿵 벌써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합니다. 이미 정신이 산란해지죠. 왁왁대는 머리의 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은 그 중요한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깁니다. 그런데 조언을 구한 그 사람도 머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결정한 것과 별로 진배없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걸 자신이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는 근거로 받아들이고 뿌듯해합니다.
셋째 이유는 마음은 이유를 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걸 사람들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보는데 왜 그런 결정을 했냐고 물으면 머리는 이런저런 이유를 잘도 갖다 붙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그리 합리적인 것도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은 청산유수같이 내뱉죠. 하지만 마음은 의사결정의 이유를 대지 못합니다. 아무리 재촉해봐도 '그냥 좋아서' 정도가 다 입니다. 마음은 논리정연과 무관한 의사결정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왜 그게 더 끌리냐고, 혹은 왜 그걸 피하고 싶냐고 물어도 제대로 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유없는 묻지마 선택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머리가 시키는대로 결정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합리화 기제를 발동시키죠. 자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걸 주변 사람들과 특히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켜야 하니까요.
그래서 머리가 아닌 마음을 따르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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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 말은 다름 아닌 가족, 특히 배우자가 도박 중독자에게 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모든 배우자가 도박자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배우자가 이와 비슷한 말을 하거나 직접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말이 옳은 것도 아니고 도박 중독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는 말도 아니지만 그만큼 도박 중독으로 인해 가족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말에는 도박 중독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도박 중독이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박 중독자는 죄를 저지른 죄인이니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도박 중독이 죄라는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도박 중독이 아닌 도박 중독자를 원인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박자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의 치유는 도박자와 힘을 함쳐 도박 중독을 공격해야 가능한데 도박 중독을 죄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런 협동이 불가능해집니다.
둘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상호 의존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당신이 도박에 중독되어 내 삶을 망가뜨린 만큼 나도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해야겠고 당신은 그걸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인데 얼핏 자신이 통제권을 가지겠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고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택과 책임에 기반한 자립은 점점 더 어렵게 됩니다.
이 말은 결국 내 인생은 도박자인 당신에게 달려 있고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절대로 나 스스로는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없다는 의존을 고백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말을 하는 가족은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나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말이며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보복의 심리에 기반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족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보복한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받을 뿐입니다. 이 문제는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죄인이니까 항상 나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내 말대로 해야 해'
이 말에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가족 본인의 치유와 회복은 점점 어렵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면 할수록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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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이 병이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도박 중독은 엄연히 미국 정신의학회 진단편람(DSM-IV, 1994)에 등재되어 있는 충동 조절 장애의 일종이니 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것이 도박 중독자의 상습적인 거짓말과 무책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족의 고통감을 덜어주므로 이롭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도박 중독을 병이라고 보면 도박자에게 낙인 효과로 작용해서 치유를 포기하고 자포자기할 위험성이 있고 또 중독의 공통 특성 상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도박자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부적응적인 행동의 원인을 병의 탓으로만 돌리면서 오히려 회복을 저해한다고 강변하는 쪽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절충적인 관점에서 가족에게는 도박 중독이 병이라고 설명하는 편이고 도박자에게는 굳이 병적 도박이니 충동 조절 장애의 일종이니 하는 진단을 붙이는 것이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도박 중독이 병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한 도박자의 책임은 없지만 치유의 길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죠.
누구는 도박에 중독되고 누구는 절대로 도박에 중독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는 도박 중독을 치료하는 임상가도 도박에 중독된 임상 사례가 보고되고 있고 남녀노소 어느 누구도 도박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절대로 도박에 중독되지 않을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박에 중독된 것은 도박자의 자유 의지가 아니며 그렇다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듯이 도박자의 마음과 달리 어쩔 수 없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그 가운데 도박자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따름이죠. 이건 도박자에 대한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해 도박자보고 책임지라고 몰아붙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도박자가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 해도 여전히 치료를 받고 도박의 늪에서 빠져나와 회복의 길로 나아갈지에 대해서는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온전히 도박자의 자유 의지에 달린 것이니까요.
도박 중독자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도박 문제가 별 것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계속 멸망의 구렁텅이로 자신을 밀어넣든지,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고 자신의 참된 인생을 찾겠다고 결심하든지 말이죠.
그 선택은 온전히 도박자의 책임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는 않더라도 앞으로 도박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옳은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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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도박 중독자와 그 가족을 상담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몇 가지 깨달음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선택과 책임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어른이 되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곤 합니다. 주로 철없이 구는 사람들에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법에서 정한 성년이 되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어르신들 말씀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아님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른이 된다고 말할 때에는 그런 외형적인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겁니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이죠. 그럼 어른스럽게 행동한다는 건 어떤 걸까요? 어떻게 행동해야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어른스러운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결과를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신중하게 선택하고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이를 몸과 마음으로 책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른스럽다고 하지 않나요?
제가 어른스럽다는 말을 앞에서 계속 했던 이유는 선택과 책임이 도박 중독 치유에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도박 중독자는 도박을 하겠다는 선택만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도박 빚, 신뢰가 깨지는 것, 법적 문제 등)는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도박자가 도박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돕는 것이 치유의 제 1원칙이라고까지 하겠어요.
그런데
가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도박의 결과를 도박자 대신 책임지는 것만 합니다.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도박자가 채권자들에게 협박당하지 않게 하려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으려고, 신용불량자가 되면 안 되니까, 감옥에 안 보내려고, 혹시라도 절망에 빠져 목숨을 버릴지 몰라서 등등. 하지만 결국 가족의 이러한 선택은 그 결과까지 심사숙고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며 선택 없는(희생하는) 책임지기에 불과합니다.
도박자가 회복되려면 결국 자신의 도박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치유에 임하고 다시는 도박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가족 또한 도박자가 이러한 결심을 지킬 수 있도록 대신 책임지는 것을 중단하고 도박자가 치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도박 중독자와 가족 모두 선택과 책임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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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무런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인생은 매 순간마다 선택을 요구하죠. 사소하게는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에서부터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와 같은 진지하고 심각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과 깊이는 매우 다양합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딜레마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선택을 하든 100%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선택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누구든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유일하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선택에서 저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 물어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에 물어보는 것을 감안한다면 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이죠. 우리는 머리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꼼꼼히 재고 따져보면 확률적으로 후회를 줄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인간의 머리라는 것은 의외로 그리 정확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당히 많은 객관적인 정보를 주관적으로 왜곡하거나 윤색합니다. 그래서 뜻밖의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뭐 영혼 기타 등등으로 불러도 됩니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온통 오염된 머리와 달리 비교적 순수한 편이죠. 그래서 저는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고 눈앞에 이득이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머리를 구분하기 어려운 분들께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합니다.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을 때 이런 저런 조건을 따지고 저울질하지 말고 이것을 선택해서 경험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만약 그렇다는 답이 나오면 무조건 하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첫 번째 방법과 유사하죠.
제 인생이 바뀐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저는 거의 모든 선택을 위의 두 가지 방법에 따라 해 왔지만 크게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고 대부분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모든 선택의 근거를 합리적인 이성의 판단에만 맡겨왔던 분으로 선택의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한번 고려해 보심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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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든 타의든 간에 주변 사람들이 도박자의 도박 사실을 알게 되면 도박자는 이들과 접촉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나마 동네 사람이라면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 남이니까 대놓고 외출하기 곤란한 정도의 불편함만 감수하면 되지만 친척들의 경우는 제사라든가 피할 수 없는 각종 경조사 때문에 그러기가 곤란하죠.
도박자가 자신의 도박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하는 이유와 해결 방안을 짝을 지어 말씀드리면,
첫째, 자신이 도박 중독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거나 왕따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박자로 인해 큰 경제적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면 도박자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도박자와 잘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어차피 도박자가 이런 사실을 직접 체험하지 않는 이상 말로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도록 이야기를 자꾸 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둘째, 부끄럽고 민망해서 피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무조건적인 회피로 그냥 만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럴 때에는 무조건 피하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주고 비교적 부담이 적은 모임부터 함께 나가자고 유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중에 더 어색하고 힘들 수 있다는 점을 도박자에게 설명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셋째, 드물기는 하지만 도박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책임지지 않으려는 성향이 대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피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경조사나 제사 참석이 도박자의 의무내지는 책임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 의사를 관철하려고 무리하게 강요하지 말고 의견만 전달하고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은 자신에게 참석을 강요한 가족의 탓을 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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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도박을 끊는다, 단도박을 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도박을 하게 되면 중독이 되고, 문제가 되니 끊어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박을 끊는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도박을 끊는다는 말에는 알게 모르게 내가 원하지는 않으나 부정적인 결과로 인해서, 외부 환경에 의해서 강제로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수동적인 의미가 강하죠.
특히 도박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만 갖고 있는 가족에 비해서 도박중독자들은 도박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도박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지만 한편으로는 도박을 할 때 재미가 있었고 도박 때문에 짜릿한 느낌도 받았으며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좋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하고 끊어내고 잘라내고 싶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도박중독자에게 도박은 일종의 '나쁜 친구'와 같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도박과 함께 즐겁게 지냈지만 이제는 더 소중한 가족, 일, 삶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도박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보내는 '애도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애도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도박을 잘라내고 끊어내는 것은 쉽지도 않을 뿐더러 잘못하면 도박자의 저항을 불러오게 됩니다.
도박을 끊는다는 것은 도박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도박자의 선택권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도박을 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도박자가 도박을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현재 도박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 도박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므로 언제든 여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도박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도박자가 애도 과정을 통해 더 이상 도박을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박을 끊는다는 말보다는 도박을 하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한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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