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supervision을 하면서 정규 수련 과정 중이거나 이를 완료한 전문가들인데도 자신의 역량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상담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지금도 놀라곤 합니다.
저는 가장 큰 원인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강압적인 수련 과정에 있다고 보는데 정작 자신은 노하우도 경험도 부족한 주제에 그저 박사, 교수, 자격번호 앞 순위 선배라는 타이틀 하나만 갖고 supervisee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알량한 자존감을 유지하는 supervisor가 너무 많습니다. 임상, 상담 따질 것도 없습니다. 다 똑같아요.
상담의 경우는 회기 제한의 단기 상담으로 시스템이 고착화되는 것이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심화와 함께 예산 배정을 건수 실적 중심으로 하다보니 생기는 고질적인 문제인데 이로 인해 내담자가 완전하게 치유되는 걸 경험한 상담자의 수가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수련 과정 내지는 초심 전문가 시기에 자신의 주력 분야 선정을 위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 보는 것과 함께 가능한 한 최기 제한이 없는 세팅에서 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하겠습니다. 급여가 줄어드는 것까지 감수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강압적인 수련 과정, 단기 상담 중심의 환경 등은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것이니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으로 보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임상 전공자여서 제대로 된 상담 수련 과정을 밟은 적이 없지만 반대로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을 취득하고 상담을 시작해서 앞서 언급한 강압적인 상담 수련 과정의 악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고(꼰대갑질을 당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 상담에 대해 사실 상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편견 없이 다양한 상담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 좋았으며 운 좋게도 회기 제한이 없는 공익 기관(?)에서 자율적으로 근무하면서 중독, 아동/청소년, 부부, EAP 등 다양한 상담을 원 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제가 상담자로서 밟아온 단계를 말씀드리면 제대로 된 수련 과정을 거친 선생님들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1단계 : 조기 종결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
회기 제한이 있든 없든 대부분의 초심 상담자들은 상담을 구조화하는 것도, 초기 라포를 형성하는 것도 서투릅니다. 하다 못해 내담자가 상담을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마음을 읽어주는 것도, 카리스마있게 보이는 것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 3년 간 제 목표 중 하나가 10회기 이상을 유지하는 비율을 50%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2단계 : 성공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
2단계부터 단기 상담 세팅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상담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내담자에게 치유 경험이 나타나는 걸 상담자가 확인하면서 세밀하게 조율을 하려면 장기 상담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담자의 치유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치료적 기법을 경험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메우려고 미친듯이 노력하는 것이 2단계입니다. 2단계 중반이 되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으면서 상담이 재미도 있고 보람도 느끼고 자신이 내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상담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5년차에서 10년차 기간이 그랬습니다.
3단계 : 자신이 어떤 상담자인지 알게 되고 자신에게 맞는 세팅을 완성하는 단계
3단계부터는 스스로 초심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누가 봐도 초심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진 내담자를 만나든 별로 두렵지 않게 되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꽤 많은 성공 경험이 쌓였기 때문에 상담이 치유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없는 상태이고 내담자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상담자인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구로 확장됩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치료 기법이나 접근법을 확립하게 되고 때로는 여러가지 기법을 혼용해서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이 약한지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고 다른 전문가와 협업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11년차에서 15년차 기간이 3단계였습니다.
4단계 :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정리하는 단계
3단계를 성공적으로 지나왔다면 상담자로서의 강,약점 분석과 노하우 등을 잘 정리한 것에 더하여 자신이 상담자, 분석가, 평가자, 교수, 강연자, 작가, 프로그램 시행자, supervisor 중 어느 세부 직역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알게 됩니다. 3단계가 끝나가는 기간에 저는 제가 내담자를 직접 만나는 상담자나 치료자보다는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전문가에게 알려주는 supervisor, 강연자 역할을 더 좋아하고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기관에 사표를 던지고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Season 2를 시작합니다').
모든 상담자가 저와 똑같은 길을 거치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참고하여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대략이라도 점검해 보시고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포스팅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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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근본을 바꾸는 변화를 야기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직접 경험입니다. 간접 경험도 좋기는 하지만 impact면에서는 직접 경험만 못합니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고 변화하기 위해 모든 아프고 슬픈 경험을 직접 할 수는 없으니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깨달은 지혜를 정리해 놓은 산물을 통해 간접 경험하는 것이 좋겠지요.
간접 경험은 직접 경험만 못해도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면 직접 경험 못지 않은 깨달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혜가 담긴 책들을 많이 읽다 보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소름끼칠 정도로 겹치는 걸 보게 되는데요. 상담을 많이 하다보면 공통된 주제, 공통된 해결 방법 등이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이 책은 됴코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인 야스토미 아유무라는 분이 썼습니다. 나름 고학력 엘리트로 경제학 분야에서 촉망받는 인재인데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듯 보였지만 부모의 정서적 학대 속에서 자랐고 그 영향으로 인해 잘못된 배우자를 선택해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자살 충동과 싸우며 불행한 삶을 살다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어서 삶을 바꾸었고 그 결과를 '당신이 살기 힘든 것은 자기혐오 때문이다'와 이 책으로 엮어서 내놨습니다.
200페이지에 불과한 작은 포켓북에 자립, 친구, 사랑, 화폐, 자유, 꿈의 실현, 자기혐오, 성장이라는 각각의 주제에 대해 저자 나름의 명제를 달면서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사실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동감인 내용이라 그냥 읽어보시면 되는데요. 대표적인 몇 가지 명제를 소개하면,
* 누구하고든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될 수 없다
* 조금이라도 싫다고 느끼는 사람과 친구인 척해서는 안 된다
*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모두 자기혐오의 결과이다
* 자유는 선택지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 인생의 목적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 꿈은 실현하는 자체가 아니라 실현하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
* 행복은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 뭔가를 강하게 동경한다면 자기혐오에 속박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떤가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명제들이죠?
하지만 다음의 것은 좀 다릅니다.
* 자립은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 의존하는 대상이 늘어날 때 사람은 더욱 자립한다
* 의존할 대상이 감소할 때 사람은 더욱 종속된다
* 종속은 의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 도와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자립한 것이다
저자는 '자립은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다'를 자신의 핵심 명제로 규정하고 세상은 이를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립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마 저자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독이 되는 부모와 절연하는데 큰 도움을 준 친구들이 있었고 이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위와 같은 명제를 찾은 것 같은데 제 생각은 같으면서도 좀 다릅니다.
저자는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고 그 대상이 늘어날 때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의존과 의존에 의한 부정적인 영향에 개의치 않을 수 있는 게 바로 자립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립을 먼저 해야 의존을 해도 더더욱 자립하게 되고 의존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게되는 것이죠. 의존해야 자립할 수 있다는 건 1) 세상은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2) 악한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은 집단에서도 그들의 파괴적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3) 자립하기 전 인간의 악에 대한 저항력은 매우 약하다는 걸 간과하는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제 생각에 저자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건 저자가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저자 말마따나 일본이 '입장'을 중요시하는 입장사회라서 그동안 자립할 시간을 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와 경우가 다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죠. 건강하게 살려면 병균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야 하니 다양한 보균자와 접촉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원했던 항체가 생겨서 왠만한 병균에는 끄덕도 않는 건강한 체질이 될까요 아님 운 나쁘게 심각한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될 가능성이 클까요.
마음이 약해 상처를 자주 받는 사람일수록 간절히 자립을 원합니다. 그런데 홀로 서는 연습도 안 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면 자립하게 되는게 아니라 착취당하거나 심하면 더 큰 상처를 입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명제에는 모두 동감하지만 '자립은 의존하는 것이다'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립은 홀로 설 힘을 갖는 것이다. 자립한 사람은 의존할 필요가 없고 실제로 의존하지 않으며, 의존하게 되더라도 더욱 자립하게 된다.
자립을 하게 되면 사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의존할 필요도 없지만 의존을 하게 되더라도 의존 대상의 영향에 개의치 않으며 의존해도 좋은 사람을 알아볼 눈을 갖추었기 때문에 의존하더라도 자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죠.
자립과 의존에 대한 부분이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이기 때문에 길게 토를 달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에 소개되는 명제는 저 또한 전적으로 동감하는 좋은 내용입니다. 실제로 저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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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당대비평 편집위원회에서 단행본으로 내놓은 기획작으로 87년 이후 민주화는 과연 실패하였는가에 대한 화두를 정치, 법, 문화, 종교, 노동계, 언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논객들의 입을 빌어 분석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함께 한 필진은 다음과 같습니다(2007년 기준).
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최장집 :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상길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김두식 : 경북대 법대 교수
권인숙 :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방현석 :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장하준 :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
김성태 : 자유기고가
임지현 : 한양대 사학과 교수
박노자 :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김기봉 : 경기대 사학과 교수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이국운 : 한동대 법학과 교수
조계완 : 한겨레 21 기자
임영호 :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서동진 : 문화평론가
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보시다시피 꽤 쟁쟁한 분들도 많고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분들이 참여했더군요.
2007년이면 아직 참여정부 시절이고 MB 집권 전이기 때문에 어떻게 분석을 했고 어떤 전망들을 내놓았을까 궁금했는데 MB 이후 박근혜 정권인 지금에서 읽어도 통찰력있는 글꼭지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두식 교수의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박노자, 임지현 교수의 대담인 '외길이 아닌 여러 갈래의 민주주의', 그리고 권인숙 교수의 '6월 민주화 항쟁, 그 이후에 찾은 질문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들이 많았어요.
아 물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글(대표적인 것이 서동진 문화평론가의 '민주화 이후의 문화와 진보를 생각하며')도 있습니다. 평론가에 대한 제 선입견을 한층 강하게 만든 어이없는 글이었네요.
386 세대도 아니고 87년 민주화 항쟁의 핵심에서 살짝 벗어난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지만 그래도 알건 알아야하겠기에 생각을 좀 넓혀보자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 독서였습니다.
세대가 어찌되었든 한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닫기
* '필연의 영역'이 되어버린 자본주의를 '자유의 영역'인 민주주의가 충분히 견제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실패의 파장은 너무도 컸다. 그것을 10년 뒤, 또 20년 뒤에 거듭 안타까워했어야 할 만큼.
* 우리나라 경제 정책은 분배의 문제도 전부 성장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합니다.
* 성장이냐 복지냐,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 공동체를 성장에 종속시키느냐, 아니면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하는 가치에 중심을 두느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도덕의 강조는 분명 억압적인 담론입니다. 권력자나 시장에서 경제적인 강자들이 국가의 이익이나 전체 사회, 공공의 이익을 강조하면서 작은 이익이나 갈등의 분출을 억압하고 대안을 막는데 사용하면서 도덕이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합니다.
*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이 경제 분야에서는 지극히 개입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 우리는 늘 정의로웠다, 우리는 늘 피해자였다, 우리는 가해자일 수 없다와 같은 말처럼 집단을 구별화시키고, 통합시키고, 집단으로서의 명분을 부여하는 데 집단적 정의감만큼 효과적인 게 없습니다.
*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은 프랑스 혁명 이래로 역사와 사회를 독해하는 오래된 문법이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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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상담,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제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왜곡된 supervisor-supervisee 도제 제도의 정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지도 교수의 권위에 굴종하고 비합리적인 처사에 굴복하는 걸 습성화했던 패턴이 전문가 수련제도에도 그대로 답습되어 supervisor는 어디까지나 supervisee가 향후 적절히 기능하는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support하는 사람에 불과한데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심한 경우 수련 과정에서 탈락시킬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학회가 방임해왔죠.
결국 그 결과로 전문가 자격을 취득한 뒤 현장에서 일을 시작한 임상가들의 자존감이 처음부터 바닥인데다 몇 년이 지나도 도무지 자신감이 올라갈 생각을 안 합니다. 저는 이게 다 무조건 혼내기만 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학문적으로 토론하고 임상적으로 숙의하기는 커녕 무조건 깔아뭉개기만 하는 못된 supervisor들과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수련 제도의 시스템 문제라고 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많이 빠졌습니다만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상담자들이 상담을 하게 되면 상담의 결과에 일희일비하게 됩니다. 내담자가 좋아지는 것 같고, 상담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나오고, 명절이 되면 간단한 선물이라도 챙겨오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상담에 자꾸 빠지고, 연락이 잘 되지 않고, 그러다가 임의 종결이라도 하게 되면 자신의 무능을 확인이라도 한 것처럼 우울에 빠집니다.
내담자의 회복과 치유, 성장을 바라는 마음은 좋습니다. 하지만 상담은 내담자와 상담자가 모두 함께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일방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에요. 밝게 웃으면서 꼬박꼬박 상담 시간에 참석하는 내담자의 모습이 자기의 진정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의 발동일 수도 있고 말없이 상담에 불참한 내담자가 사실은 상담의 효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상담자에게 종결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워 차마 연락을 못하는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내담자가 진정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회복하고 성장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알게 되겠지요.
그럴 때까지
상담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내담자의 회복이 곧 나의 실력이라는 식의 단선적인 결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고 내담자를 통해 배운다는 겸허함입니다.
그러니 상담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담자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상담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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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은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상담을 받는 내담자 뿐 아니라 상담의 효과에 대해 궁금해하는 상담자들도 많습니다.
대부분 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 않은 상담비용과 최소 일주일에 1시간씩 꼬박꼬박 내야 하는 시간을 감안할 때 과연 그만큼의 효과가 있을까요?
상담의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습니다만 다음의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상담자가 어떤 치료적인 기법을 사용하든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담자가 상담을 통해 변화하고 싶은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상담자가 진정으로 내담자가 변화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마음입니다. 거기에 상담자와 내담자의 스타일(일종의 코드)이 잘 맞으면 금상첨화겠지요. 물론 상담자가 상담을 진행할 수 있는 전문성과 능력이 없는 경우는 배제해야할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상담자가 진정으로 내담자의 성장과 치유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상담료에만 정신이 팔려 있거나 내담자가 변화하려는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담자를 시험하려고 상담에 임하는 경우에는 결코 효과가 없습니다.
상담을 7년째 하고 있고 지금도 거의 매일 2~3명을 상담하고 있지만 대개 이 두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분명히 내담자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담은 자전거타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상담자가 거꾸로 타는 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내담자에게 독이 되는 상담을 일부러 진행하지만 않는다면 내담자는 분명히 좋아지고 일단 성장하고 나면 자전거 타는 법을 몰랐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담자들은 상담의 효과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내담자의 변화와 성장을 위한 노력에 전력을 기울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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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강요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모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정신과나 상담센터에서 소아/아동/청소년 심리평가를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절감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자라면서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게 하고 싶다, 내 자식에게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삶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후회했던 삶을 반복하지 않도록 안전한 길로 이끌고 싶다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정작 자신의 자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포장되었을 뿐 내용물은 강요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원치 않는 선물을 안기고 나서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자식은 분재가 아닙니다. 부모에게 자랑스럽더라도, 그 모습이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더라도 분재가 된 아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절망의 늪에서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자녀의 행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자신의 행복을 투사하여 자녀를 통해 대리 만족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녀는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크는 것입니다. 부모가 할 일은 스스로 성장하는 자녀를 지켜보면서 도움을 요청받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움은 어디까지나 자녀가 원하는 수준에 그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이자 철학자인 칼릴 지브란의 주옥같은 시를 한 편 올려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칼릴 지브란이 이미 다 했더군요. 이전에 포스팅한
'각자 행복해야 둘이 되어도 행복합니다'에서도 칼릴 지브란의 시를 인용했습니다만 정말 생각의 깊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이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는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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