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임상심리학회가 당면한 모든 위기는 임상심리학회를 지탱하는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제도의 문제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면 나머지 문제는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자격 제도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건 제대로 된 수련 과정을 통해 양질의 전문가가 현장에서 제 몫을 담당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현장의 임상심리전문가는 심리평가/치료/교육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 가르침에 따라 지금도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임상심리학회는 세 영역의 불균형을 여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기존의 강점이었던 영역마저도 점차 약점으로 전락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심리평가 영역은 제가
'심리평가를 하찮게 생각하는 임상심리학자'라는 글을 올린 것이 2007년 2월이니 거의 3년이나 되어가는데도 오히려 그 때보다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심리평가 보고서의 quality 감소는 누구라도 체감할 정도인데 그 이유로는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의 부재(관련 포스팅
'표준화된 심리평가보고서의 필요성'), R/O 또는 NOS 진단의 남발(관련 포스팅
'심리평가에서 NOS의 의미'), case formulation이 아닌 검사 별 기술 방식의 남용(관련 포스팅
'임상심리평가보고서 이렇게 쓰면 안 된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제대로 된 심리평가 supervision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supervisor에게 1:1로 심리평가 supervision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제게 Big 5에 속하는 수련 기관마저도 1:1 supervision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심리평가를 전혀 하지 않는 supervisor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대학을 다니면서 10년 째 동일한 강의 노트를 고수하는 교수들을 뒤에서 얼마나 욕했습니까? 자신이 심리평가를 하지도 않고 1:1 supervision도 하지 않는 supervisor를 우리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치료 영역은 더 암담합니다. 사실 상 치료 영역의 수련은 전무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나마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수련을 겸하고 있는 기관에서 정신보건센터를 활용하는 것과 대학교의 학생생활연구소가 동원되는 것을 제외한다면 과연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에 치료 수련이라는 것이 있기나 할까요? supervisor부터 치료를 하지 못하는데 수련 레지던트에게 치료 기회가 있을리 만무하고 그러니 제대로 된 치료 supervision이 가능할 리 없지요. 그런데도 사례 발표가 이루어지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입니다. 제대로 된 심리치료라고는 배운 적이 없는 상태에서 전문가가 되고 현장에 투입되니 학회에서도 전문가들의 치료 사례 발표나 치료 기법 공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교수들이 학회에서 치료 기법 강의하는 것도 인정하자고 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런 분들께는
'내가 생각하는 임상심리학 교수의 최소 역할' 포스팅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일을 할 때 제가 환자나 내담자를 다른 전문가에게 의뢰하려고 해도 제대로 된 치료자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렵습니다.
교육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supervision만 놓고 본다면 supervisor를 위한 supervision 지침서 한 권 없기 때문에 모든 수련 과정이 supervisor 자신이 배운 그대로 답습되며 완전히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supervisor의 지식 편차가 supervisee에게서 그대로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심리검사에 대한 개론서(아무리 봐도 별로 차별화되지 않는 그 책이 그 책 수준인)는 매년 그렇게 쏟아지고 있건만 정작 수련 레지던트를 위한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과 같은 필수적인 책은 한 권도 없으며 Clinician's Thesaurus같은 책이 번역된 적도 없습니다. 정말 답답해 죽겠습니다.
그럼 연구는 좀 나은가 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funding이 이루어지고 의사와 co-work이 되는 일부 수련 기관에서만 환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물이 간간히 나올 뿐 대부분의 수련 기관에서는 심리평가 loading에 치인 나머지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학원 연구 논문 수준을 능가하는 결과가 나오기 힘들고 그나마 학교에서는 연구 대상군인 환자를 접할 수 조차 없기 때문에 만만한 대학생(그것도 교양 강의를 듣는 수강생을 대상으로 한)을 대상으로 해 일반화 가능성이 극히 낮은 뻔한 논문만을 양산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제가
'좋은 논문 고르는 법' 같은 포스팅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학회도 점점 재미가 없고 매번 뻔한 커리큘럼이라는 feedback이 나오는 겁니다(참고로 이번 임상심리학회 추계학회에서는 EMDR 강의 하나 겨우 건졌다는 후문입니다). 도무지 업데이트가 되지 않으니 시류에 맞춰 인기있는 새로운 영역의 기초 발표만 반짝 이루어지고 후속타가 없습니다.
이처럼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이 빈틈투성이니 자격 제도가 건실할리가 없고 자격 제도가 부실하니 임상심리학회의 허리가 약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니 점점 동력을 잃게 되는 겁니다. 동력을 잃게 되면 임상심리학회의 미래는 암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을 일대 개혁해야 합니다. 시행 세칙이나 바꾸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부터 재정비해야만 임상심리전문가, 더 나아가서는 임상심리학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처방이냐에 대해서는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다른 글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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