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가의 교회(St mark's Church)도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올망졸망 다 모여 있어요.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지붕 타일이 워낙 귀여운 걸로 유명한 교회라서 내심 앙증맞은 사이즈를 기대했는데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거대하더군요.
성 마가의 교회는 자그레브의 명물로 13세기에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지붕의 독특한 타일은 1880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꼭 레고로 만들어진 지붕처럼 귀여운데 왼쪽의 문양이 달마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것이고, 오른쪽이 자그레브의 emblem이라고 합니다.
종탑에 1841이라고 씌여 있네요. 1841년에 증축되었거나 재건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문은 굳건히 닫혀 있습니다. 미사가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입장 불가입니다. 론플에 의하면 4월 말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정오에 교회 앞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고 하니 시간 맞춰서 가면 볼거리가 하나 더 있겠네요.
문 위에 포진하고 있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뿜어내는 포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월의 풍상이 느껴지네요.
근처에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결혼 사진을 찍는가 봅니다. 인종과 나이와 외모를 떠나서 새로운 출발을 앞둔 부부의 얼굴은 항상 빛이 나는 것 같아요.
교회 앞의 가로등도 예쁜 꽃으로 장식을 했습니다. 화사하네요.
성 마가의 교회를 등지고 바라본 모습인데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 양쪽으로 각종 박물관, 갤러리, 아뜰리에가 포진되어 있어 관심있는 분들은 투어를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 마가의 교회 바로 옆으로 보이는 주황색 지붕의 저 건물이 바로 대통령 궁(Banski Dvori)입니다. 대통령 집무실 뿐 아니라 많은 정부 기관들이 입주해있죠.
1991년 10월에 Franjo Tudman 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폭격 테러가 있었다고 합니다(그래서 왼쪽 건물 지붕이 얼룩덜룩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경비가 엄청 허술하더군요. 제대로 무장한 군인 한 명 안 보여요;;;;
제가 거기에 있을 때 대통령인지 모르겠지만 꽤 중요해 보이는 인물이 마침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더군요. 왼쪽에 있는 차량이 경호원 차량입니다.
성 마가의 교회 뒤로 돌아왔습니다. 인상적인 지붕에 가려서 제대로 못 봤지만 다시 보니 종탑도 위용이 엄청나네요.
대통령 궁을 왼쪽에, 성 마가의 교회를 오른쪽으로 두고 직진하면 크로아티아의 국민 조각가 Mestrovic 아뜰리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조각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강추합니다. 놓치지 마세요.
성 마가의 교회를 보러 오신 김에 보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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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고수 이준명님이 쓴 크로아티아 관련 가이드북입니다.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부인 '봄엔' 출판사에서 나왔고 '어느 멋진 일주일' 시리즈 중 크로아티아 편입니다.
우리나라의 평범한 직장인이 책상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낼 수 있는 최대 휴가 기간을 7박 8일로 상정하고 그 일주일을 최대한 알뜰하고 멋지게 활용할 수 있는 여행기를 내겠다는 컨셉으로 어느 멋진 일주일 시리즈를 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출판사에서는 '한 달쯤' 시리즈도 있습니다;;;;; 그 중에 라다크도 있던데 정말 한 달쯤 라다크로 여행을 갔으면 좋겠더군요.
어쨌거나 앞서 소개한 '크로아티아 랩소디'가 여행 에세이처럼 보이는 여행기인데 비해 이 책은 가이드 북의 정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크로아티아 소개, 항공편과 숙소 구하기, 준비물과 예산짜기 등 여행 초보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실려 있고요.
그 다음에는 일주일짜리 여행 루트를 짜고, 각 여행지 별로 핫 스팟 위주의 소개, 교통, 숙소, 음식점, 쇼핑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수록하고 있습니다.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따르는 자그레브-플리트비체-스플리트-두브로브니크가 모두 소개되고 있고 맛보기로 크로아티아 인근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와 블레드 호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몬테네그로 코토로 등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상세하지는 않지만 깔끔한 지도도 제공되고 정보의 꼼꼼함은 '크로아티아 랩소디'보다 낫기 때문에 한글책 한 권만 들고 떠나는 초보 여행자에게는 이 책을 더 추천합니다.
단점으로는 저자가 배낭 여행 고수 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저처럼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한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좀 부족하다는 것과 각 여행지에서 하루 별 추천 루트를 제공하지 않아 여행지 별 일정은 따로 짜야 한다는 거(크로아티아 랩소디는 자그레브와 두브로브니크에만 국한되기는 해도 추천 루트를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죠).
또 하나는 제게만 아쉬운 점일 수 있는데 역시나 자다르, 흐바르 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한 거.
그래서 세부 일정은 론플이나 다른 한글 가이드 북을 참고해서 짜야 합니다.
그래도 깨알같은 정보가 많기에 크로아티아 여행에는 론플과 이 책을 갖고 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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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현존하는 철학계의 이단아이자 이슈 메이커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사람은 라캉,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도 유명하고 대중 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으로도 유명하죠.
영어로만 이미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도 30종이 넘는 저작이 번역 소개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2~3권의 책을 쓸 정도의 생산성 넘치는 다작가입니다.
이 책은 폭력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성찰을 정리한 겁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뒤집어 과연 무엇이 폭력인가라고 되묻는 삐딱하면서도 참신한 그만의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들 중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이현우 선생이 잘 요약했듯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지젝의 주장이자 제안입니다.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오늘도 수많은 미디어들이 폭격하듯이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을 우리는 얼마나 여과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동정하면서, 한 편으로는 분노하면서 말이죠. 그 내면에 자리잡은, 그 행간에 숨은 의미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소수일까요?
지젝은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 꼼수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한글판 부제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인데 적절한 네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이라는 현상을 슬라보예 지젝다운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상당히 어려울 걸로 각오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읽히네요.
닫기
*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 미디어가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에 파묻혀 있을 때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이 폭력을 초래하는지, 우리는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포스트모던 좌파의 좌장인 안토니오 네그리 자신이 디지털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모든 요소들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며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 우리가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문제는 문화적 차이(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가 아니라, 정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이 이미 우리와 같아졌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기준을 내재화했으며 자기 자신을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실제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서구적 언어를 바탕으로 티베트 불교를 정당화하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역설적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게 정말로 부족한 것은 바로 진짜 '인종주의자' 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쉽게 견딜 수 있는 얘기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 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의지를 따르고 구원을 받기 위해 선행(자기가 선행이라 여기는)을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그저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 흄이 보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한 채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억압과 착취에 동의했음을 의미하는 형식적 제스처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 실질적 개선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라 '무정치적' 사회적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다.
*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부에서 바로 그 국가와의 거리를 두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도구로 이용해서 말이다.
* 간단히 말해서 폭력은 탈신비화돼야 한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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