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와 상담 비용과 관련하여 제가 바라는 건 국가가 정신건강복지를 책임지는 주체로 임상가를 공무원처럼 고용하고 일체의 비용을 부담해서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회기 제한 없이 상담과 심리평가 서비스를 무제한 받는 겁니다. 공급자인 임상가도 고용 안정에 대한 두려움과 내담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덜고 양질의 서비스 제공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그게 결과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 생각은 현재로서는 거의 유토피아 수준의 환상에 가깝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실적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지금의 이 나라가 향하는 방향은 이와 반대거든요. 비용은 선택적 복지 중 하나인 바우처 제도로 땜빵하면서 나머지를 고급 전문 인력의 사명감에만 의존해 이들을 갈아넣고 희생을 강요하면서 메꾸고 있습니다. 이건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서비스의 질 하락이 불 보듯 뻔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탁상 행정이 낳은 최악의 결과물 중 하나가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심리상담 서비스입니다.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심리상담은 내담자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무료 서비스입니다. 그렇다고 상담의 질이 낮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료 서비스가 상담에만 국한된다는 겁니다. 심리평가를 받으려고 하면 소정의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물론 그 비용도 사설 상담센터에 비하면 최소한에 그치지만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심리상담 서비스를 주로 이용하는 대상자가 기초생활수급대상자를 비롯한 취약 계층이라는 걸 감안하면 그 비용도 부담스러울 수 있고 무엇보다 상담이 무료인데 심리평가를 권하는 걸 보면 그걸로 부족한 수익을 메우려는 것 아니냐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는 게 더 문제입니다.
현장의 상담자들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내담자의 문제를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심리평가를 권하는건데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심리평가 권유를 망설이게 되어 결국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데 결국 손해는 이용자인 내담자가 보게 되죠.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실시하는 심리평가에 포함되는 검사 도구는 대개 MMPI-2/A, TCI, SCT, HTP 등으로 자기보고형 질문지이거나 간단하게 실시할 수 있는 대면 검사도구들이 많기 떄문에 과도한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검사 비용이 수익을 발생시키는 것도 아닐겁니다. 그게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다면 심리평가 실시 비용도 무료로 책정하거나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면 심리상담 비용도 수요자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받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특히 심리평가 비용이 내담자의 자존감 하락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상징적으로 책정된 금액이라면 더더욱 상담에도 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거구요.
지금처럼 상담 비용은 무료이면서 심리평가 비용은 부과하는 체제는 상담과 심리평가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는지를 아예 모르고 있거나 심리평가는 검사도구나 검사지 구입 등 실비가 발생하고 상담은 상담자를 갈아넣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집행한 탁상 행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담자에게 돌아가고 그 여파도 현장의 임상가들에게 미치게 됩니다. 현장과 유리된 이러한 정책은 최대한 빨리 시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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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사회학자인) 앨리스 밀러가 쓴 고전입니다. 앨리스 밀러는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폭력의 뿌리가 어린 시절 매를 맞는 것에 있다고 볼 정도로 체벌에 극단적으로 반대(체벌에 대해서는 저도 극단적인 반대론자에 가까운데 관련된 글은
'체벌은 전혀 효과 없다' 참조하세요)하는 임상가로 약 30년 전에 일대 열풍을 일으켰던 '성인 아이' 운동의 출발점이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평생 동안 약 13권의 저서를 발표했는데 주로 어린 시절의 상처와 치유에 관한 내용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학대 경험과 20년 간의 임상 경험을 잘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저작 중 대표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동안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예전에 구매해 두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 번역된 제목만 봤을 때에는 고기능 자폐나 아스퍼거 아동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사실 굉장히 단순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을 천재처럼 감추고 거짓 자아를 발달시킨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가 연출한 드라마의 역할 연기 속에서 강박과 중독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경멸하며 우울한 삶을 살아간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상담하면서 애착 외상을 입고 힘들게 살아가는 내담자를 많이 만나봤기에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자기 파괴적인 중독 행동으로 자신을 처벌하는 사람도 많고, 그 밖의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이러한 애착 외상으로부터 유래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의 시대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자가 모든 정신 병리적 문제의 원인을 부모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인 것으로 몰고 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면서 읽을수록 묘하게 거부감이 들더군요.
게다가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부모가 되면 그 때의 욕구 불만을 대리 만족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이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외상은 계속 대물림된다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가 과연 건강한 애착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게 맞나 싶고 저자 자신이 이러한 외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듯 다분히 감정적인 글쓰기를 노출해서 자주 위태위태하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처는 억압되고 가해자인 부모는 이상화된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때문에 심리상담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이 악순환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단언하듯이 말하고 있거든요. 이거야말로 저자가 그렇게나 열심히 경고하고 있는 과대성 아닌가요?
결정적으로 가장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대목은 다음입니다.
"마음을 잘 공감해 주고 받아주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면, 아래와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1. 자라서 심리 상담을 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
2.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감지 능력이 실제로 심리적으로 이용당했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까지 발달하는 것
후략~ (52p)
그러니까 조금 과장하자면 심리 상담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모두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주고 받아주지 못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통제, 조종 당한 사람이라는거죠. 저는 이런 극단적인 일반화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내용 중에는 강박, 중독, 우울, 경멸, 과대성 정도만을 제시하고 있지만 논조는 거의 모든 정신적,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바로 애착 외상인 것처럼 몰고 있습니다. 애착 외상과 관련없는 심리적 문제가 없는 듯이 쓰고 있거든요. 이것도 동의하지 못하겠네요.
무의식 속에 숨어 있어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학대 기억을 깨우라는 말도, 아이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라는 식의 이상화도, 자식의 감정을 온전히 잘 공감하고 받아주는 부모들은 거의 없다는 식의 논조도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억압된 학대 경험을 깨운답시고 어설프게 시도한 경험들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지는 미국의 사례가 방증하고 있죠(관련 서적 소개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 거짓 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1994)').
그래서 솔직히 애착 외상으로 고통받는 분들에게는 읽지 마시라고 말리고 픈 책입니다. 너무 단정적인 책입니다. 훈련받은 임상가들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애착 외상의 이해와 치유를 위해서는 차라리 수잔 포워드가 쓴
'독이 되는 부모(2002)'와 Wallin의
'애착과 심리치료(2007)'를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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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미리암 그린스팬(Miriam Greenspan)은 여성심리학의 태두라고도 할 수 있는 상담자입니다. 국내에는 늦게 소개되었지만 사실 이 책은 이미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되는 고전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은 구닥다리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자 스스로 상담자임에도 정신과 의사의 지도 하에 수련을 받은 점이라든가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심리검사의 특정 검사 sign을 하나의 문제에 연결하는 식으로 배워 결국은 심리검사를 불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 등 현재의 상황과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 책에서 가부장적인 치료 틀의 예로 들고 있는 Freudian의 정신 역동적 접근과 Rogerian의 인본주의적 접근만 하더라도 이 책이 씌여지던 당시에나 주류에 해당했지 요새는 흐름이 많이 바뀌었지요. 요새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 책에 묘사된 것처럼 toxic하게 정신 역동적 접근과 진단 체계만을 고집하나요. 오히려 약물 치료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 더 문제이죠.
저자는 자신이 받았던 상담 경험에서 그 당시 상담 접근이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틀에 의해서만 이루어짐으로써 여성들의 경우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부작용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고 여성주의 심리상담의 틀을 마련합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저자의 임상 경험이 녹아있는데 기존의 상담 내지는 심리치료적 접근이 가부장적인 시스템에 의거하여 세 가지 신화(1.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2. 모든 심리적 문제는 곧 의학적 문제이다, 3. 진단과 치료의 전문가만이 이를 치유할 수 있다는)에 의해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여성들의 문제를 제대로 치유해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 환경까지 포함된 삶의 맥락에서 내재된 분노를 이끌어내어 해소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간략히 말하자면 정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여성주의 심리 상담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성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권력이 전체 여성의 총체적인 권력과 어떻게 뒤얽혀 있을 수 밖에 없는가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성주의 심리상담이 여성의 억압을 종식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억압을 인식하게끔 하여 스스로 억압을 내면화하고 좇는 것을 최소로 줄이도록 도울 수는 있다는 것이죠.
여성들의 분노를 표면에 끌어내어 적절히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점과 , 사회적/제도적 환경에 의해 발생하는 심리적 문제를 내면화시켜 다뤄줘야 한다는 것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당하는 아내를 상담하면서 불면과 우울한 기분 증상만 다루고 다시 지옥같은 환경으로 돌려보내는 건 치료가 아니니까요.
현재도 대부분의 심리상담이 온통 개인의 내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운데 사회 구조적인 영향, 특히 착취와 이로 인한 소외의 문제로 직접 타격을 받는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소중한 틀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을 상담하는 상담자라면 한번쯤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번역자가 공을 많이 들였는지 내용이 쉽지 않은 책인데도 잘 읽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입니다.
다만 미국의 경우, 그것도 저자가 이 책을 쓰던 당시의 미국 문화에 치중된 내용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심리학자가 대부분 남자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반대입니다. 임상심리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거든요. 또한 빈곤층이 경계선 성격 장애로 주로 진단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 경험 상 이것도 한국에서는 반대일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지엽적인 세부 내용에 집중하지 마시고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여성주의 상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읽으시면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덧. 저자가 상담 훈련만 받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정신 병리적 문제까지 상담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역시나 정진경 선생님이 추천사에서 지적을 하셨더군요. 의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환자'까지 상담으로만 접근하는 건 굳이 약물 치료가 필요없는 '내담자'에게 약을 먹이는 것 만큼이나 위험천만하고 client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는 분들의 주의가 요망됩니다.
덧2.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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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써 놓고도 제목이 영 낚시스럽네요. 쩝...
저는 상담자의 진정한 내공이 바로 자신보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 남자 내담자를 끌고 갈 수 있느냐로 발휘된다고 봅니다.
물론 내담자의 특성과 상담의 목적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을테니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담 상황에서 말이죠.
전반적으로 여성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상담을 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원래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다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데도 거리낌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일단 상담 장면에 들어오면 그야말로 도움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죠. 여성 내담자의 경우는 상담자가 공감과 경청만 충실히 해도 끌고 나가는 것이 한결 쉽습니다.
그 다음, 남자 아동 및 청소년의 경우에도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부모에 의해 억지로 끌려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때로는 협조가 잘 되지 않고 상담 초기에 말문을 열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남자 어른 만큼 어렵지는 않습니다. 공통 분모만 잘 찾아내서 상담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만 하면 오히려 다른 어떤 유형의 내담자보다도 상담의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내담자군입니다.
남자 어르신(노인)의 경우는 내담자가 걸어온 길을 긍정하고 삶의 지혜를 인정하는 마음만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마음 편하게 상담에 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담자가 섣불리 어르신을 교육하려고 억지 부리지만 않는다면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상담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자에 비해 10년 이상 나이가 많은 남자 내담자는 무엇 하나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장유유서 정신이 살아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담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면 일단 자신의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네가 인생을 알아? 분위기)에 학력이나 학벌, 자격증과 같은 부수적인 도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합니다만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군요). 게다가 입 싼 남자를 경멸하는 사회 분위기 상 자신의 문제를 미주왈 고주왈 늘어놓는 남자 어른이 별로 많지 않고 그러다 보니 상담을 받으러 와도 자신의 문제를 조리있게 잘 표현하는 내담자가 없어요. 그래서 내담자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도, 상담의 목표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내담자와 빠른 시간에 라포(Rapport)를 형성하고 상담자를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도록 내담자를 이끄는 상담자는 고수임에 틀림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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