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화를 이해하는 접근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증상'으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즉, Somatization Disorder나 Hypochondriasis와 같은 신체화 관련 장애의 진단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 때 신체 증상은 피검자가 가장 많이 호소하는 문제이며 면담에서도 특정한 신체 증상이 부각됩니다. 이 경우 심리평가에서도 문장 완성 검사, MMPI, 로샤 검사 등에서 신체화 반응과 관련된 sign이 일관되게 관찰됩니다.
다른 하나는
대처 기제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즉, 우울 장애나 적응 장애처럼 주된 문제는 따로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loading을 회피하기 위해 신체화를 사용하는 것(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입니다. 이 경우 신체화 증상이 주가 되는 신체화 장애와 달리 다양한 정서적 불편감이 주관적으로 보고 또는 객관적으로 관찰되며 신체화 증상은 부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평가에서도 MMPI에서는 SOD, HEA 등의 척도 상승이 관찰되지만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며 문장 완성 검사에서는 오히려 대인 관계 갈등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 기술 등 신체 증상과 관련이 없는 문제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로샤 검사에서도 신체화 반응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론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을 위한 formulation에서 헷갈리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셔서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본 것이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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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임상심리학자는 수련 과정에서 대부분 자존감이 많이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는 수련 과정이 혹독해서가 아니라 지도 교수에게 목을 매는 대학원에서의 잘못된 도제식 제도가 전문가 수련 과정까지 연결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supervision을 하다보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자신이 쓴 심리평가 보고서나 치료한 환자에 대해서 자신없어 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을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이런 자신없음이 임상가에게 꼭 필요한 자기 부정에는 도움이 되니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임상심리학자들은 심리평가 보고서를 쓰면서도 자신의 진단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심리치료를 하면서도 자신의 치료 방향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항상 고민합니다.
최근에 supervision을 할 때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가져온 진료 기록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의사들은 자신이 처방한 약물의 효과가 없으면 이 환자가 그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유형이라고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의 진단이 틀렸거나 약물 치료가 아닌 다른 치료법을 생각하지 않는걸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전문가가 되는 과정에서 자기 부정의 토양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상가에게 자기 부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에 대한 자기 반성과 성찰이 없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환자/내담자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수련 제도를 개혁하는 것과 자기 부정의 마인드를 유지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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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에도 적용됩니다.
물론 모르는게 너무 많아서 심정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막막함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내려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점검하고 헷갈리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을 따로 list up해 supervision 때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할 때마다 supervision point를 물어봅니다. 이 케이스를 왜 supervision 받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요. 이 질문을 자꾸 던지는 이유는 supervision을 준비할 때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알고 싶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case formulation이 어렵기 때문에 supervision을 받으려고 하지만 point를 잡기 위해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자신의 취약점을 찾아낼 수 있고 이 취약점을 보강해야 supervision을 통해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평가 supervision을 받을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supervision point를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진단의 문제인가
:
진단이 헷갈리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가설 검증 방식에 의한 case formulation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진단을 위해 필요한 정신병리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검사는 그런대로 하겠는데 진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항상 막막함을 느끼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정신병리에 대한 지식을 더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검사 결과를 대충 꿰맞추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자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단명을 붙여 제출하게 됩니다.
2. 검사 sign 통합의 문제인가
: 검사 sign이 통합되지 않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역시 가설 검증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보다 중요한 검사 sign을 선별하지 못함)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검사 sign이 어떠한 심리적 상태, 증상, 문제와 연결되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과도한 정보에 압도되어 보고서 작성 시점에서 수많은 정보를 늘어놓고 골라내는데 어려움을 겪게되고 후자의 경우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가설 검증 방식으로 접근하는 체계적인 연습을 통해 문제를 개선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각 검사 sign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검사 별 manual과 해석서를 보다 심층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3. 검사 sign과 배경 정보의 불일치 문제인가
: 심리검사의 실시 및 채점, 해석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도 겪게 되는 이 문제는
대부분 배경 정보의 신뢰도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해(자녀를 방임한 어머니의 주관적 보고를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등)
screening에 실패하거나 꼭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해(병력이 있는 정신분열병 환자가 복용하던 약물 미확인 등)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심리검사 실시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나머지 검사 실시, 채점, 해석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죠. 이 경우는
부족한 정보를 수집하는 노하우를 익히게 되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4. 검사 실시 및 채점, 해석의 문제인가
: 수련 과정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중요시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맹점이 많은 부분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종합병원 급 수련 기관에서도 검사의 실시, 채점은 대학원에서 충분히 익히고 왔다고 가정하며 1년차 때 윗년차가 몇 번 관리 감독하는 것으로 마스터했다고 여기는데 실제로 전문가가 된 이후에도 잘못된 검사 실시 방법을 본인도 모르는 채 고집하는 경우가 많으며 검사 도구 자체에 대한 지식마저도 부족(예를 들어 K-WAIS의 언어성-동작성 지능의 유의미한 차이 점수가 연령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모름)한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세부적인 지식을 supervision을 통해 교정해야 합니다.
5.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의 문제인가
: 이건
임상심리학회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인데 현재 어느 수련 기관에서도 어떻게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지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수련 레지던트의 자질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현재 국내에서는 심리평가보고서 작성법에 대한 참고 서적이 한 권도 없으며 Clinician's Thesaurus와 같은 외국 서적을 참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supervision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표준화된 보고서 작성법보다는 적절한 용어 사용, 군더더기 없는 기술, 논리적인 연결법 등입니다.
6. 심리평가 보고서 활용의 문제인가
:
심리평가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술 방법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지체 판정을 위한 보고서이냐, 심리치료를 위한 평가이냐, 학교 제출용이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고 제언(recommendation)도 달라지게 됩니다. supervision에서는 이러한 각각의 활용도에 따라 심리평가 보고서를 어떻게 달리 작성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점검 point가 있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정리를 했으니 심리평가 supervision을 받는 선생님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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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전문가가 쓴 심리평가 보고서를 읽다 보면 상당히 잘 쓴 보고서인 것 같은데 다 읽고 나서도 피검자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심리평가 보고서의 분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분량을 늘이는데 치중한 나머지 중언부언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서 읽는 사람이 핵심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량을 줄여서 간략하게 보고서를 작성하는데도 여전히 동일한 문제가 지속된다면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이 피검자는 부적응 상태에 있어 일상 생활에서 어려움을 경험할 것으로 보임"이라는 어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저도 자주 이렇게 씁니다. ㅠ.ㅠ).
물론 틀린 기술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일반적인 어구로만 이루어져 있어 피검자가 어떤 부적응 상태인지,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경험할 것으로 예상되는지 읽는 사람이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피검자는 최근에 경험한 이별로 인해 중등도 이상의 우울감을 경험하고 있어 의기소침, 무기력한 상태이므로 대인 관계 상의 접촉이 필요한 현재 직업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임"처럼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읽는 이가 이 피검자가 현재 어떤 상태이고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최소한의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은 써야 합니다.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잘 몰라서이기도 합니다.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련을 받을 때 어떤 용어를 선별해서 사용하는지에 대해 어떤 supervisor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으니까요. 현재 수련 실태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용어 사용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데도 자꾸 애매모호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면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단이 틀렸을 때, 피검자의 정서 상태를 잘못 평가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유,무형의 비난과 질책을 피하기 위해 모호하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죠.
최대한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해 정확하게 보고서를 쓰려고 노력할 때만이 전문가 스스로 자신의 실력 그대로를 직면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얄팍한 전문가 자격의 껍질 뒤에 숨어서 자신이 평가한 피검자를 기만하면서 계속 죄책감때문에 불편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형편없는 전문가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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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을 조금 보태서 우리나라 정신과에서 임상심리학자가 하는 일의 90% 이상은 심리평가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점차 나아질거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도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닐 겁니다.
임상 현장에 따라 사회복지전문가나 간호사가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특히 정신과에서 심리평가를 의뢰하는 사람은 거의가 정신과 의사입니다. 치료 권한과 대부분의 책임 소재가 모두 의사에게 있으니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마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심리학자라면 적어도 한 두번쯤은 다른 전문가가 쓴, 그야말로 형편없는 심리평가 보고서를 접할텐데, 그럴때면 이런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어떻게 잘리지 않고 계속 일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른 임상심리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심리평가 보고서를 보는 축에 속하는데 의외로 형편없는 보고서가 아주 많습니다. 대체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짐작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엉터리 임상심리학자가 퇴출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심리평가를 의뢰한 정신과 의사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친한 의사 선생님께 심리평가 보고서를 모두 읽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어렵다면 제출한 보고서를 나중에라도 확인해 보시면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습니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대부분은 심리평가 보고서 중에서 Summary & Recommendation만 읽습니다. 그것도 요약 부분 중에서 지능 지수와 진단에 필요한 특정 결과 부분만 (밑줄치면서) 읽습니다.
제가 작성한 종합심리평가보고서는 A4 기준으로 대개 3장을 넘지 않는 적은 양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6~7장이나 되는 보고서를 읽을리가 만무하지요. 제가 supervision 하면서도 그런 보고서를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걸요.
이건 임상심리학자들의 책임도 있는 것이 개업 의사들(특히 소아정신과)이 요구하는대로 visual에만 신경 쓴 나머지 표만 화려하게 집어넣고 양을 늘리는데만 급급했기 때문에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보고서가 된 것이죠. 의사들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니 의사가 원하는 진단에 맞는 용어만 몇 개 넣어서 써 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일 할 수 있는 것이죠. 실력이 없어도 들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심리평가를 실시하기 전에 의뢰자에게 의뢰 사유를 꼼꼼히 물어보고 뭘 알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반영해서 보고서를 쓸테니 요약 및 제언만 읽지 말고 전체 보고서를 다 읽어달라고 합니다.
보고서 전체를 꼼꼼히 읽으면 어느 정도는 엉터리 formulation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일부 문구는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어도 실력이 없으면 보고서의 전체 내용을 논리적 빈틈 없이 formulation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뢰자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실력없는 엉터리 임상심리학자들이 하루빨리 퇴출되어 심리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더 이상 침해하지 않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의뢰 사유를 꼼꼼히 확인하고 그 의뢰 사유를 보고서에 반영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보고서를 전부 읽어달라고 요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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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린
'임상심리평가보고서 이렇게 쓰면 안 된다' 포스팅에 소설을 쓰는 것도 문제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이 포스팅은 그 댓글을 읽었던 당시에 들었던 생각을 나중에 정리한 것입니다.
'심리평가 보고서를 쓰는 방식'이라는 글에서 저는 의뢰 사유와 보고서의 용도, 보고서를 읽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등에 따라 심리평가 보고서를 융통성있게 작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기술 방식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이고요.
하지만 소위 '소설'을 쓰는 것은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S병원의 작성 방식으로 알려진 이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은 소설의 한 대목을 읽듯이 풍부하고 유려한 문체로 드라마틱하게 피검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스타일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최근에는 S병원 출신들을 중심으로 supervisee에게 이 방식의 작성법을 강요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제 귀에 들려오고 있는데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소설'처럼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의 문제는 평가자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관점에 침잠될 수 있어 결국에는 아집과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 시 검사 sign을 함께 기술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evidence-based approach에 따라 그렇게 작성한 근거를 댈 수 있어야만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 피검자는 매우 우울한 상태에 있다'고 기술하고는 근거도 없이 '내가 보니까 딱 우울한데 뭘'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평가자는 심리평가를 해서는 안 되고 미아리에 가서 돗자리를 펴는 것이 맞습니다.
단 하나의 검사 sign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는 다른 검사 sign을 통해 교차 검증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매번 supervision할 때마다 애를 먹는데 '소설가'들까지 rush하기 시작하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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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심리학자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심리치료와 상담이라고 아무리 목소리 높여 외쳐봐도 아직까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심리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임상 심리학자에게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숨을 쉬는 것과도 같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안 하면 죽게 되는(이거 중요한 말입니다. 밑줄~) 그런 것이죠.
그런데 매일 하는 일이 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보고서가 틀에 박힌 것 같고 사용하는 문구도 매번 똑같아서 정체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Somatization Disorder와 Conversion Disorder, Dysthymic Disorder 등 Neurosis 계열의 장애를 진단하는 각각의 보고서를 진단 명만 바꾸어 내도 별 무리가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아무런 고민 없이 공부도 안 하고 그냥 항상 쓰던대로 보고서를 쓰는 전문가는 어차피 제 발로 무덤을 파는거니까 신경쓰지 말도록 하고요.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움이 되실까 해서 제가 사용하는 방법을 몇 가지 알려 드립니다.
첫째, 다양한 문구를 사용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 영어를 배울 때 미국인들은 똑같은 단어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 바꾸어 쓴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실 겁니다. 이걸 보고서 작성에 적용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인다'는 흔히 사용되는 종결 문구입니다. 이걸 동일 보고서에서 '~생각된다', '~나타났다', '~드러났다', '~시사한다' 등으로 다양하게 바꾸어 보는 겁니다. 물론 앞뒤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문구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상된다'도 '~가능성이 있겠다'로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고 '~가능성이 커 보인다'와 같은 변형도 가능합니다. 물론 이 방법만으로 보고서 작성의 매너리즘에서 곧장 빠져나올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보고서에 활력을 불어넣어 읽는 사람의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여주고 본인에게는 문장력을 높여주는 연습이 되기 때문에 적극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다른 평가자의 보고서를 탐독한다.
: 다양한 문구를 사용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하고 글쓰기 연습을 하는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전문가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때에는 다른 전문가가 쓴 보고서를 읽는 것이 도움이됩니다. local NP에서 프리랜서로 평가를 하는 선생님이라면 다른 선생님이 쓴 보고서를, 수련 레지던트라면 윗년차가 쓴 보고서를 자꾸 읽는 겁니다. 이 때 매너리즘에 자주 빠지는 특정 장애가 있다면 그 장애에 대해 다른 선생님이 쓴 보고서를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어떻게 formulation을 하는 지 눈여겨 보는 겁니다. 제가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면서 큰 도움을 받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양한 스타일의 보고서를 매일 읽으니까 저도 모르게 표현력이 늘게 되더군요. 이것도 모르고 심리평가 supervision을 안 하는 supervisor들은 어리석은 바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저 supervision을 귀찮은 일이라고만 생각하겠지요. 그런 썩어빠진 정신의 supervisor는 뭘 해도 제대로 할 리가 만무합니다.
셋째, 다양한 표현을 수집하고 변형해 내 것으로 만든다.
: 다른 평가자의 보고서를 읽는 것과 연결해서 사용하는 방법인데 보고서를 읽으면서 인상깊은 표현이나 구절을 적어서 나름의 관용어구 사전을 만들어 두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소개한
'글쓰기의 공중 부양'에서 이외수옹이 추천했던 방법이지요(참고로 말씀드리면 외국에는 이미 심리평가 보고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모아 놓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걸 그대로 베껴쓰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켜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체화시켜 사용하는 겁니다.
지겹다~ 지겹다고만 하면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지겨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심리평가 보고서를 쓰는 일이 지겹다고 느껴질 땐 나름의 재미를 찾아보세요.
제가 설명드린 방법 말고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분들은 제보를 해 주시면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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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썼지만 제목 한번 참 유치합니다. 이건 무슨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도 아니고... -_-;;;;
이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지방의 일부 몰지각한 supervisor들이 임상심리전문가 자격만 따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거라며 수련 레지던트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이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이 supervisor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었지만, 아마도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의 유무와 상관 없이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수련 감독을 할 수 없는 사람일 겁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수련 지정 기관에 있는 supervisor였다면 이런 엄한 소리를 할리가 없으니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 없이 임상심리전문가 자격만 갖춘 supervisor거나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을 갖고 있더라도 어차피 수련 감독을 할 수 없는 교수들이 틀림없습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와 임상심리전문가 자격을 모두 갖춘 supervisor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결국 승패(?)는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능력과 그보다 더 중요한 심리치료 능력에 의해 판가름이 날 것으로 보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정신보건임상심리사에 비해 임상심리전문가가 여러모로 불리해보입니다.
첫째, 제가 수련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의 quality가 더 높았고 requirement도 더 세세하고 까다로웠기 때문에 현장에 나오면 정신보건임상심리사보다는 임상심리전문가를 더 인정해주는 것이 통상적이었습니다만 두 가지 자격을 모두 갖춘 supervisor들이 수련 기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수련 과정의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고 현재도 격차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둘째, 첫째 조건과 연결되는데 연구 논문과 치료 사례 발표 조건(이 문제는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하겠지만 대학원에서 지도 교수가 횡포를 부리듯이 이 조건을 갖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supervisor가 꽤 많습니다)때문에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포기하고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만 취득하려고 하거나 아예 심리학 베이스가 아니기 때문에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포기하고 정신보건임상심리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면서 임상심리전문가는 그야말로 쪽수에서 밀리고 있습니다(매년 현장에 나오는 임상심리전문가의 수와 정신보건임상심리사의 수를 비교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학회에서 정신보건임상심리사 협회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마도 심리학 베이스가 아닌 순수(?) 정신보건임상심리사들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잘못된 생각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셋째,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에서 심리평가 영역이 더 이상 강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정신보건임상심리사들의 심리평가실력이 나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레지던트들의 실력이 저하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겁니다. 이건 제가 6년 동안 현장에서 supervision을 하면서 피부로 체감하고 있는 문제인데 저는 이걸 현장의 supervisor들이 제대로 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이것도 조만간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심리평가 supervision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 supervision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현장에서 하다 못해 social skill training이나 집단 프로그램이라도 돌릴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정신보건임상심리사에 비해 점차 치료 영역에서도 밀리게 될 겁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데 국가 기관에서 전문가를 채용할 때에는 국가 공인 자격이 우선시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저만 해도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이 없었다면 지금 일하는 직장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기관에 속한 전문가 전원이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을 갖고 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군, 법원 등 전문가가 진출할 수 있는 국가 관리 영역은 점차 넓어지겠지만 이미 국가 공인 자격을 요구하고 있고 아직은 아니더라도 결국은 국가 공인 자격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을 수련 과정 없이 소급해서 받은 교수급 전문가들은 그 당시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모르거나 설사 알고 있더라도 그 심각성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제가 직접 겪은 일이고 지금도 현장에서 숱하게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 몇 년 뒤에 임상심리전문가 자격만 갖춘 사람과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만 갖춘 사람이 국가 기관에 apply하면 누가 채용될 것 같습니까? 저랑 내기라도 해 볼까요?
내년부터 산업인력공단의 임상심리사 1급 자격자도 현장에 나오게 될텐데 임상심리전문가는 임상심리사 1급과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임상심리전문가 자격만 따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습니까? 아직까지 local NP에서는 정신보건임상심리사보다 임상심리전문가를 더 쳐준다고 합니다만 실상을 알면 어깨 으쓱할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부분 개업 10년이 되지 않은 의사들로 수련받을 때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레지던트와 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임상심리전문가를 선호하는 것일 뿐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평가 보고서의 quality와 자신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다양한 심리치료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굳이 임상심리전문가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결론을 맺겠습니다.
저는 수련 당시에는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의 고마움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이 자격을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현장에서는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자격이 무엇을 하더라도 큰 힘이 됩니다.
'임상심리학 관련 자격증' 포스팅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저는 임상심리전문가 자격보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이 실질적으로 더 쓸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수련을 받아야 하고 정신보건임상심리사 수련 과정과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면 임상심리전문가 수련 과정을 선택할거라고 자신있게 말 못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덧붙이자면 레벨이 있는 모든 자격증은 최상위 자격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정신보건임상심리사 1급 자격이 있는한 2급은 절대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최상위 레벨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니 정신보건임상심리사 2급 자격을 가진 선생님들 중 심리학 베이스가 아닌 분들은 임상심리전문가 수련을 받기 위해 심리학과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 아니라 정신보건 1급 승급을 위해 지정 기관에 들어가서 5년의 경력을 쌓으면서 평가든, 치료든 자신만의 영역과 노하우를 쌓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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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대학원에서나 전문가 수련 과정에서나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과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Clinician's Thesaurus' 같은 교재가 이미 많이 나와 있을 뿐 아니라 정규 교과 과정에서 별도의 시간을 들여 다루는데 비해 우리나라 심리학과 대학원에는 그런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곳이 (제가 알기로) 한 곳도 없습니다. 참 한심하죠.
전문가 수련 과정에서도 supervisor가 알고 있는 방식을 도제식으로 그대로 답습할 뿐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곳이 역시 없으며 그래서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에 대한 지식을 배울 기회가 없고 알음알음 대충대충 익힐 뿐입니다. 저 역시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현장에 나와 일을 하면서 수많은 supervisee의 다양한 보고서 형태를 접하게 되면서 이런 문제로 나름 고민을 많이 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제 나름의 심리평가 보고서 작성법에 대한 기준을 갖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빨리 학회 차원에서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를 만들고 교육 과정에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의 필요성' 포스트 참조).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에 대해서는 앞으로 포스팅을 할 기회가 있을겁니다. 그것보다 오늘은 보고서를 쓰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의뢰 사유와 심리평가 보고서의 용도, 보고서를 읽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등에 따라 작성 방법이 융통성 있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표준화된 심리평가 보고서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보고서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이야기이고 쓰는 방식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심리평가 의뢰 이유가 장애 판정을 받기 위해 국가 기관에 제출하려는 것과 전문가의 해석 상담 없이 부모에게 직접 제공되는 소아용 심리평가 보고서의 작성 방식은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전자는 행정적인 절차에 부합되게끔 용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고 그에 비해 후자는 부모가 피검 아동의 상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용어를 최대한 배제하면서 기술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어로 된 표현을 직접적으로 얼마나 쓸 것인지, 해석 위주로만 기술할 것인지 아니면 검사 sign의 예를 많이 드는 evidence-based approach를 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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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원칙적인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미성년자의 경우 법적인 권리가 양육권자에게 있으므로 양육권자인 부모가 심리평가 원자료를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줘야 합니다.
의료법에 의거해 부모가 의무기록복사 신청을 하면 의료기관은 모든 의무기록 사본을 제공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심리평가 원자료는 의무기록인가'라는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심리평가 원자료가 의무기록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으로는 심리평가 원자료가 의무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상 심리학자의 전문성 침해라는 감정적인 방패 뒤에 숨어서 오히려 피검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는 이 문제를 학회가 전면적으로 나서서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의 핵심은 심리평가 자료를 보여줘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피검자인 아동/청소년의 동의 없이 부모에게 보여주는 것이 과연 정당하냐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심리평가를 받는 아동/청소년에게 구두로 또는 문서를 통해 부모가 원할 경우 검사 정보의 비밀 보호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도 맥락 상 비밀 보호가 되는 것으로 알고 평가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심리평가 뿐 아니라 상담/심리치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 경우 아동/청소년이 직접 작성하는 소아용 SCT나 MMPI-A, K-YSR과 같은 자기 보고형 검사지는 작성한 후 서류 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가져오도록 합니다. 부모가 보지 않도록 orientation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임상 심리학자가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알리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심리평가에 대한 아동/청소년의 협조도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반응 왜곡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심리평가, 상담, 심리치료를 시작할 때마다 비밀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이 합당한 절차이냐에 대해서도 저는 회의적입니다. 자칫하면 절차상의 곤란함을 피하기 위해 한 이야기가 평가자-피검자, 상담자-내담자의 치료적 신뢰 관계를 깸으로써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권장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부모가 심리평가 원자료를 보고자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아봐야 합니다. 평가자의 심리평가 보고서를 신뢰할 수 없어 다른 전문가에게 원자료의 reading을 맡기려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기분은 나쁠 수 있지만 아동/청소년에게 피해가 직접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행스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문장완성검사에서 부모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 문구나 그림 검사의 가족화 등을 보고 아동/청소년을 비난하려는 의도를 갖고 원자료를 보여달라는 부모도 간혹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첫째, 원자료의 일부 내용을 비전문가가 마음대로 취사선택해서 해석하는 것이 결코 올바르지 않으며 둘째, 그 결과를 갖고 아동/청소년을 탓하는 경우 좋지 않은 영향이 있어 마음의 상처나 심리적인 문제가 악화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셋째, 끝까지 봐야겠다고 주장하는 경우 부모님이 원자료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이 평가자의 의무임을 설명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부모들이 많기 때문에 두 번째 단계에서 보시지 않게끔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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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자료라 함은 심리평가 보고서와 심리검사 원자료, 거기에 면담 요약, 진료 기록지 등 심리평가를 위해 활용되는 피검자의 모든 기록을 말합니다.
이 중 진료 기록지 등 일부 자료는 의무 기록으로 분류되어 의료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자료는 피검자의 정신장애 진단 및 심리 상태와 같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방치된 상태라고 봐도 될 정도로 무성의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심리평가자료는 유출될 경우 피검자에게 법적, 사회적 불이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엄청난데도 학회에서 공식, 비공식 지침 한번 발표된 적이 없을 정도로 그 심각성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임상심리학자를 상근 고용하지 않는 의료기관의 경우가 가장 문제인데 심리검사를 위한 전용 검사실을 갖추지 못한 곳이 태반이고 그러다 보니 심리평가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도 없어서 임상심리학자들이 그 중요한 심리평가자료를 개인적으로 (집에) 보관하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경우 그대로 폐기함으로써 나중에 재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집니다. 게다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임상심리학자가 그만두면 그 평가자가 평가한 피검자의 자료는 몽땅 며느리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이죠.
물론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에서는 심리평가 보고서를 스캔하여 광파일로 보관하고 검사 원자료는 의무기록실에 저장해 병원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신경을 좀 쓰는 편입니다. 그래도 역시나 헛점은 있는데 예를 들어 수련을 마친 임상심리 레지던트가 전문가가 되어 병원을 나가게 되면 당연히 그동안 작성했던 심리평가보고서 파일을 모두 백업하고 유출이 되지 않도록 PC, 노트북의 파일을 삭제해야 하는데 제가 알기로 그렇게 하는 병원은 국내에 하나도 없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제가 수련받던 당시에 작성했던 심리평가보고서 파일을 모두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백업 후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고 확인도 안 하더군요. 이건 사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피검자의 개인 정보가 오로지 임상심리학자 개개인의 양심에 맡겨져 있다는 건데 이래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모든 심리평가자료가 임상심리학자 개인의 손에 맡겨져 언제든 유출될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로 소송이 걸리고 자격이 박탈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지금이라도 학회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최소한 전문가 회원을 중심으로 심리평가자료를 어떻게 보관, 관리하는지 실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관리 지침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현재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제가 실시했던 모든 심리평가자료를 년도 순으로 보관하고 있으며 10년이 지난 후 순차적으로 파쇄기를 이용해 폐기할 예정입니다. 또한 심리평가 보고서의 문서 파일은 비밀번호를 알아야 접근이 가능한 저장장치에만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방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될거라고 봅니다.
모쪼록 학회가 빨리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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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정신과 외래에서 요구하는 심리평가 보고서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량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표나 그래프를 삽입해서 시각적으로 화려한 것을 의사들이 선호하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곳도 많다고 하더군요. 이건 실제로 제가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들어주지는 않았지만요. 그래서 짤렸나 봅니다. ㅠ.ㅠ
참 답답한 일입니다. 물론 의료보험도 되지 않는 상태에서 수십 만 원에 달하는 평가 비용을 내는 환자,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뭔가 근사해 보이는 colorful하고 화려한 보고서를 기대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리평가 보고서의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리평가 보고서가 환자, 피검자 아동 부모의 시각적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작성하는 것인가요? 심리평가 보고서는 피검자의 인지 기능, 성격, 정서 상태, 대인 관계 양상, 대처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필요 시 정확한 진단을 하고 치료적 제언과 예후를 제공하는 심리평가의 최종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피검자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작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길이를 늘리는 방향으로 보고서가 작성되다 보면 외형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case formulation이 제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중언부언 불필요한 문구가 삽입되어 읽는 사람들이 피검자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고 실제 치료 현장에서 이를 활용하는 사람에게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A4 5장이 넘는 심리평가 보고서를 모두 읽는 치료자가 얼마나 될까요? 거의 없다에 한 표 던집니다. 정작 의사들도 대부분 summary & recommendation만 밑줄치면서 읽고 맙니다.
제가 나름대로 지키고 있는, 길이와 관련된 심리평가 보고서의 작성 원칙은 딱 하나 뿐입니다.
"빼고 나서도 피검자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구는 과감히 뺄 것"
어떤 문구를 빼고 나서도 피검자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 문구는 불필요하게 들어간 것이고 오히려 앞 뒤 연결에 혼란만 가중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빼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원칙을 갖고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해야 어떤 문구를 쓸 지, 그것이 피검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지 고민하게 되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한결 군더더기가 줄고 간결하게 작성하게 됩니다.
심리평가 보고서는 최대한 짧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성인 종합 보고서의 경우 A4 기준으로 3장을 넘어가지 않도록 작성합니다. 여러가지 표나 그래프가 들어가는 소아 종합 보고서의 경우라도 A4 4장을 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항상 상기하세요. 대체 왜 심리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지를...
덧. 사실 약자인 임상심리 레지던트 입장에서 의사나 병원의 요구에 당당하게 맞서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일하는 supervisor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회 차원의 대응입니다. 이건 뭐 완전히 각개전투에요.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벽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격이니 전문가가 되고 나서도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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