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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것에 대한 분석은 거시적으로는 5포 세대와 관련하여 출산률 저하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개인의 이기심에 대한 성토를 양념하여 개탄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미시적으로 돈 많이 버는 삶의 대척점으로 자아 성찰을 설정하고 이에 초점을 맞춰 내면을 들여다보는 세태와 인문학의 융성(?)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히키코모리처럼 찌질하게 살면서 좁디 좁은 원룸방에서 질식해 가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가십거리로 소비하거나요.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실제로 1인 가구를 형성하고 독신 생활을 하고 있는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가 사회학의 관점에서 '혼자 사는 것', '독신 생활', '1인 가구'를 꽤나 건조하게 조망하는 책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은 분들이라면 조금 실망할 수 있겠습니다.
책 표지만 보면 힐링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학문적인 서적에 가깝거든요.
노명우 교수는 1부에서 1인 가구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고정관념, 피할 수 없는 독신들의 세상 도래를 기술하고 2부에서는 1인 가족과 그 밖의 다인 가족을 4인용 테이블과 1인용 테이블의 비유를 들며 중요한 건 구성원의 수가 아님을 역설합니다. 그리고는 3부에서 결국 다 함께 홀로 서기 위한 방법으로 행복한 개인들의 연대와 그에 따르는 주거 형태를 제안합니다.
본인이 독신인데도 1인 가구의 장점만 늘어놓으면서 억지를 부리지도, 그렇다고 1인 가구주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외로움을 과장하는 신파로 빠지지도 않고 객관성을 잘 유지한 게 장점입니다.
결국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든 자신에게 잘 맞고 행복하면 장땡인거지요. 다만 초고령화 사회로 가면서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 살 수 밖에 없는 시간이 오게 마련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학술서적에 준하는 건조한 문체로 씌여 있어 달필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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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삶은 때로는 자유롭고, 어떤 때는 처량하고 그런 것이다.
* '혼자 사는 것'은 이미 '1인 가구'에 속한 사람이든 언젠가 '1인 가구'가 될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 가운데 누구와도 무관할 수 없는 주제이다.
* 삶의 자유란 언제나 인간에게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목표이지, 혼자 사는 삶에 자동으로 딸려오는 부속물이 아니다.
* 죽음처럼 어쩔 수 없이 절대적으로 혼자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피할 수 없기에 '혼자라는 것'에 대한 질문 또한 우리의 인생에 부수적인 그림자와도 같다.
* 혼자서 해야만 하는 것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의 삶은 쉽사리 균형을 잃어버린다.
*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전부가 혼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낯설기 그지없다. 혼자 살지 않는 사람들은 혼자 사는 사람조차 낯설어하는 상상적 이미지를 혼자 사는 사람에 관해서 만들어내고, 이 이미지에 따라 혼자 사는 사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판단하고 참견하고 간섭하고 조언한다.
* 불행한 일이지만 1인 가구의 증가 현상이 공론화되는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적인 사회 문제, 자기중심주의와 파편화의 징후, 공적 생활의 약화로만 해석한다. 하지만 혼자 살기 그 자체는 그냥 계속 증가하고 있는 보편적인 사회 현상일 뿐이다.
*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1인 가구의 증가에 대해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이 되는 사회적 변화들(개인의 부상, 여성의 지위향상, 도시의 성장, 통신기술의 발달, 생활주기의 확장)이 역진될 가능성이 낮음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말이다. 1인 가구의 증가는 이타주의의 몰락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가정중심성이 약화되는 징후에 불과하다.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는 자족성을 경고하는 것이지, 자족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집합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 서양 언어에서 '사회'가 한편으로 '사교'와 '교제'를 뜻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정의해보면, 그것은 강요된 집단주의처럼 '집단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 상호작용은 집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자율성을 지닌 개인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전근대적 전체주의나 스탈린적 사회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집단'을 주어로 삼지 않는다. 개인화는 사회의 몰락이 아니라,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형식과 제도가 변화했다는 뜻이다.
* 일반화된 타자의 과잉 역할이 문제되는 만큼이나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일반화된 타자의 부재가 큰 문제로 떠오른다. 혼자 사는 사람은 외부에서 역할을 가르쳐주는 일반화된 타자 없이 모든 것을 자기가 궁리하고 자기 힘으로 해내야 한다.
* 우리의 사고 습관은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 모습이 아니라 가족관계라는 유일한 기준에 의해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한다.
* 역할에 대한 만족도는 역할 행동이 거짓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할에 대한 만족도의 차이는, 역할의 진정성의 차이에서 온다. 역할의 진정성은 모든 형태의 자기 연출을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연출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자기 결정력이 강할 때 온다. 역할이란 그것이 사회적 관계인 한 연출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만족도의 차이는 거짓과 진실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역할의 내용을 스스로 결정했는지 혹은 외부에 의해 수동적으로 결정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 역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이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역할 가면을 벗어던지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균형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 "한 개인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환원될 수 없는 개별적인 행위다. 먹을 것을 가져다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 있지만, 아무도 남을 대신해서 먹어줄 수 없고 잠을 자줄 수 없다. 이것은 모두 한 개인의 신체를 통해 가능하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레비나스는 '향유'라 불렀는데, 향유는 하나의 개체가 개체로서 '나의 나 됨' 즉 자기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 기꺼이 혼자가 되어 홀로서기를 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자폐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과잉화된 '일반화된 타자'와 거리를 두는 능력의 획득을 의미한다.
* 혼자라는 것은 같이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분명 결핍이다. 같이 있다는 것은 혼자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충족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틀에 비추어보면, 행복은 혼자 있을 때와 같이 있을 때 어느 한쪽과 일방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행복이란 혼자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결핍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같이 있을 때 발생하는 과잉 충족으로 인한 질식에서도 동시에 벗어날 때 가능하다.
* 타인들에 의해 아예 무관심한 영역에 방치되어 있는 사람은 왕따가 아니다. 그는 단지 혼자 있는 사람이다. 왕따는 혼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왕따는 같이 있되, 같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사람이다. 관계가 왕따를 만드는 것이지, 고립이 왕따를 만들지 않는다.
* 취미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취미는 자기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는 영역이다. 자기밀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취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자기밀도는 높은데 취미조차 갖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밀도가 매우 낮은 사람들은 의외로 취미가 없으면서도 삶을 그럭저럭 살아간다. 취미가 있는지 혹은 취미가 없으면 견딜 수 없는지는 자기밀도를 측정할 수 있는 일종의 바로미터이기도 한 셈이다.
* 관계로부터 단절을 꿈꾸는 사람은 민첩하게 행동해야 한다. 자기에의 몰두에 대한 충동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을 놓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을 이루지 못한 채 마음속의 꿈으로나 간직하며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 누구나 이타심을 칭송하지만, 이 칭송의 대상이 실현될 수 있는지 혹은 그 이타심이 실현될 때 어떤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타심을 실행하기 위해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자기 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나쁜 것으로 간주되는 이기심의 반사적 대당으로 이타심을 무조건적으로 칭송하는 분위기는 때로는 은밀히 개인을 궁지로 몰아간다.
*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알아야 한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배려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이타주의의 강박에 물든 사람은 자기를 이해하는 최소한 시간조차 가져보지 못했기에 자신의 진정한 욕구조차 알지 못한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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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소개드린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5)'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죽음을 맞이하는 새로운 시각을 다루고 있다면 철학자인 줄스 에반스의 이 책은 표지에 있는 것처럼 삶을 사랑하는 기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이라는 어찌보면 양 극단에 놓여 있는 두 운명이 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는 걸 보면서 이상한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일부러 이 순서로 읽은 건 아닌데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다음 책으로 이 책을 고른 걸 보면 사람의 무의식이란 게 참 무서워요.
줄스 에반스는 고대 철학자의 고전을 현대 생활에 접목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저널리스트이자 철학자입니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리스, 디오게네스, 아우렐리우스, 세네카 뿐 아니라 에픽테투스, 에피쿠로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다소 낯선 철학자들까지 총 출동합니다. 거기에 스토아 학파, 이오니아 학파, 쾌락주의, 회의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 사조들도 소개됩니다.
이 책의 특이점은 철학 관련 책인데도 유독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겁니다. 앨버트 엘리스와 아론 벡, 대니얼 카네만, 마틴 셀리그만 등이 등장하고 그 밖에도 심리학 전공자라면 아주 익숙한 다양한 심리치료와 심리학 이론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가 대학 졸업 후 우울증과 PTSD를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유하면서 심리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있는 건 제가 예전에 비판적으로 포스팅했던 랜드마크 포럼(관련 포스팅 :
'랜드마크 포럼을 조심하세요')도 소개하고 있더군요. 제목만 보고 당연히 철학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심리학과 접목하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심리학의 접목이 살짝 어색한 부분도 있고 저자의 지나친 심리학적 해석 편향이 거슬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철학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고 피하고 싶은 분들이 조금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이어서 읽으면 더 재미있습니다.
닫기
* 행복의 철학은 모두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가치와 믿음, 판단과 관련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했듯,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이런 질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답을 선택하는 일은 그 자체로 좋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이런 과정을 억압하거나 소위 '전문가들'이 고안한 행복의 조립식 모델 속에 국민의 행복을 끼워 맞추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자율성과 추론능력과 선택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조건인데 말이다.
* 에픽테토스는 '회복탄력성'의 철학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상처투성이 삶을 이용했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능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어떻게 불확실성과 억압을 극복하고 평정심과 강한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상기하라고 대답한다.
*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믿을지 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 누구도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저항하는 방법만 안다면 아무도 우리를 세뇌시킬 수 없다.
*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우리의 책임이다.
* 세네카는 화로 이어지는 가장 큰 오류는 아마도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일거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가 화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면 그 치유법은, 기대를 낮추고 기대를 좀 더 현실에 맞추도록 노력해서 이 세상에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 우리가 삶의 목표라고 말하는 쾌락은 일부 사람들이 잘 모르거나 편견 탓에, 아니면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해서 이해하는 것처럼 방탕한 쾌락이나 관능적인 쾌락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쾌락이란 신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문제가 없는 상태다. 즐거운 삶이란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선택하든 회피하든 그 근거를 찾고, 영혼을 잠식하는 잘못된 믿음을 없애는 데서 얻을 수 있다.
* 견유주의자로 살려면 남들이 비웃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에 둔감해져야 한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여길지 지나치게 걱정하고, 남들이 인정하지 않을까봐 너무 두려워한다. 그 결과 불안해지고 불행해지며 진짜가 아닌 삶 속에 갇힌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숨기지 말고 남들이 비웃거나 조롱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도록 단련함으로써 독립적인 개체로 서야 한다.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 마틴 셀리그먼과 그의 정치적 후원자들은 '객관적 과학'을 정립하면서도 도덕적 가부장주의라는 비난을 피하려는 열망을 담아 '도덕적 판단', '윤리적 논쟁', '자유로운 선택'은 쏙 빼버린 채 좋은 삶의 모델을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 세 요소는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측면들인데 말이다.
* 나는 진정한 관계, 진정한 우정, 진정한 철학 공동체는 작고 친근한 규모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세계에는 인간관계를 자동화된 설문으로 대체하고 국민의 자율성을 희생하는 대신 '행복 전문가'들에게 너무 많은 권위를 주는 기계적이고 수단화된 행복의 정치학이 등장할 위험이 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고대의 개념과 현대의 다원적이고 자유민주적인 정치 사이에서 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행복은 객관적으로 정의하고 실증적 과학으로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고, 만일 행복이 그런 거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지루한 곳일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행복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의 다원성을 탐구하고, 국민을 동등하게 대화에 참여시킬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대해야 한다. 실제적 추론과 균형을 이루는 실증주의, 인문학과 균형을 이루는 과학, 좋은 삶은 한 가지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 공식적인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강제로 행진해야 하는 한 덩어리의 대중이 아니라 좋은 것을 찾는 과정에서 서로 돕는 친구들의 모임, 그것이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이다.
* 소크라테스적 전통의 미덕은 자제, 합리성, 자기의식, 중용이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는 정신에 위계가 있다고 보는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최상위에 있고,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욕구와 관련된 부분이 최하위로 여겨진다. 디오니소스적 전통은 소크라테스적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을 찬양한다. 소크라테스가 합리성과 중용을 설파할 때, 디오니소스는 중용과 통제를 넘어서라고 부추긴다.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인 힘을 찬양하고, 춤을 추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술에 취했을 때 느끼는 활기와 즐거운 삶을 찬양한다.
덧. 이 책은 e-book으로 읽었기 때문에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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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이 2007년 6월 8일부터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의를 정리해 책으로 엮은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2008)'을 북 크로싱합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정치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궁금한 분들은 '소개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국민도서관 이용)가 적용됩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분은 아래의 북 크로싱 방법에 있는 내용대로 하시면 됩니다.
* 월덴 3의 변경된 북 크로싱 제도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국민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분들은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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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진정한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정작 고전을 즐겨 읽는 사람은 눈씻고 봐도 눈에 잘 띄이지 않죠. 그만큼 고전 읽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유원 선생은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세로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저자와 그의 시대를 철저하게 이해하기, 둘째. 전체를 통독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보기, 셋째. 구조를 파악하기, 넷째. 독특한 표현과 비유들을 찾아내기, 다섯째. 소리내어 읽기, 여섯째. 문장 다시 써보기, 일곱째. 핵심만 추려내어 써보기입니다. 말이 쉽지 이건 뭐 거의 고시 공부 수준입니다. ㅠ.ㅠ
이 책은 강유원 선생이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2007년 6월 8일부터 7월 27일까지 8회에 걸쳐 진행한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강의를 정리한 겁니다.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로크의 '정치론'을 고전 읽기의 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에는 시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 당시의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강유원 선생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기는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습니다. 심리학책을 메모하고 정리하면서 읽는 것도 힘든 일인데 고전까지 그렇게 요약하면서 머릿속에 넣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여전히 제게 고전 읽기는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그래도 고전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길잡이를 찾은 것 같아서 반갑고 고전 읽기에 도전하실 분들은 이 책으로 워밍업을 하면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80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로 얇고 가벼운 책이거든요.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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