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지은 조정환 선생은 1989년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에 참여하면서 문학운동의 주류였던 민족문학론에 맞서 '노동해방문학론'을 제창하여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9년에 걸친 수배 생활을 했고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도서출판 갈무리의 주간 겸 공동대표로 '다중지성을 위한 삶출판'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네그리는 누구인가 하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다중의 창조적 능동을 표현하는 언어인 '자율(aunonomia)'의 사상을 전파하는 이탈리아 사상가입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동력으로 발전하는 체제입니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자본가에 노동자가 맞서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파업을 들 수 있는데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자율은 저항이 아닌 대안에 가까운 방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동력을 자율적인 방식으로 다른 대안 활동에 사용하는 겁니다. 파업 등의 저항은 다시 노동력을 장악하려는 세력에게 빌미를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5포 세대, 중국의 탕핑족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너희를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는 비폭력 비협조 운동이니까요. 이들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으므로 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협박 무기인 부와 가난의 이분법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조금 궤를 달리하지만 노동자들의 아우또노미아도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별 2개로 평가한 이유는 글이 너무 어렵습니다. 내용을 보면 네그리의 사상 자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지만 문체가 너무 난해하고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아마 네그리의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너무 낮아서 그런 것 같지만 어쨌든 초심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최소한 가타리, 들뢰즈 등의 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분들만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덧. 이 책은 국민 도서관을 통해 북 크로싱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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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르크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부터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2004년 저작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1960년대 후반 아우또노미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1979년 테러 단체 '붉은 여단'의 수뇌부라는 혐의로 체포 수감되었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정치과학을 강의하였고 1997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구속된 후 2003년에 자유의 몸이 된 석학입니다. 이 책은 석방된 이듬해에 나온 저작이고요.
사실 이 책은 2000년에 나온 '제국'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이 책에서 네그리 또한 '제국'과 함께 읽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제국'에서는 제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가 출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해외 영토로 확장된 국민국가 주권에 기초를 두고서 근대 권력들에 의해 실천되었던 제국주의라는 용어로는 현재의 전지구적 질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소위 네트워크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초국적 기관들,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 제국적이지만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새로운 권력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이 책에서 네그리는 제국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살아 있는 대안인 '다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네그리가 '제국', '다중'을 통해 토머스 홉스가 '시민'에서 '리바이어던'으로 나아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에서 네그리는 영원한 전쟁에 의해 오염된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는 제국과 대안인 다중을 설명하기 위해 전반부에서는 '전쟁'에 대해, 그 다음에 이 책의 핵심 개념인 '다중'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 민주주의, 특히 다중의 민주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제국'을 읽고 이 책을 읽었다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 조차도 따라가기 힘들었기 때문에 앞으로 '제국'을 읽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덧. 이 책은 국민도서관에서 대여해 읽은 책이므로 북 크로싱하지 않습니다. 특히 2016년 4월 13일 현재 이 책은 품절 상태이므로 읽고 싶으신 분은 국민도서관을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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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현존하는 철학계의 이단아이자 이슈 메이커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사람은 라캉,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철학으로도 유명하고 대중 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것으로도 유명하죠.
영어로만 이미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출간했고 국내에도 30종이 넘는 저작이 번역 소개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2~3권의 책을 쓸 정도의 생산성 넘치는 다작가입니다.
이 책은 폭력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성찰을 정리한 겁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뒤집어 과연 무엇이 폭력인가라고 되묻는 삐딱하면서도 참신한 그만의 생각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들 중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유명한 이현우 선생이 잘 요약했듯이
폭력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두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폭력이란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려주는 상투적 '이미지'에서 한 걸음 물러날 때만, 우리는 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지젝의 주장이자 제안입니다.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오늘도 수많은 미디어들이 폭격하듯이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을 우리는 얼마나 여과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동정하면서, 한 편으로는 분노하면서 말이죠. 그 내면에 자리잡은, 그 행간에 숨은 의미를 분석하고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소수일까요?
지젝은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 꼼수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한글판 부제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인데 적절한 네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이라는 현상을 슬라보예 지젝다운 시각에서 삐딱하게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상당히 어려울 걸로 각오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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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다.
* 어떤 상황에서는,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하는 것, 끈기 있고 비판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 미디어가 쏟아내는 폭력의 이미지들에 파묻혀 있을 때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이 폭력을 초래하는지, 우리는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 오늘날 지배적인, 관용적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사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대량 학살, 테러)에서 이데올로기적 폭력(인종주의, 선동, 성차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인 듯하다.
* 포스트모던 좌파의 좌장인 안토니오 네그리 자신이 디지털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의 모든 요소들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며 찬양하고 있지 않은가.
* 우리가 내면의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거짓말이다. 진실은 외부에, 우리가 하는 행동 속에 있다.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용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 문제는 문화적 차이(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가 아니라, 정반대로 근본주의자들이 이미 우리와 같아졌다는 사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기준을 내재화했으며 자기 자신을 그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실제로는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는 서구적 언어를 바탕으로 티베트 불교를 정당화하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역설적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게 정말로 부족한 것은 바로 진짜 '인종주의자' 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하게 된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한 것이 나의 열등한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연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실패를 훨씬 쉽게 견딜 수 있는 얘기다.
*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 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에 국한되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의지를 따르고 구원을 받기 위해 선행(자기가 선행이라 여기는)을 한다. 하지만 무신론자들은 그저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 흄이 보기에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한 채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억압과 착취에 동의했음을 의미하는 형식적 제스처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 오늘날 진짜 위협적인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유사-능동성이다. 곧 '행동하라'는 요구, '참여하라'는 요구,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감추라는 요구다. 사람들은 늘 개입하면서 '뭔가를 한다',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일은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고 철회하는 것이다. 권력을 쥔 자들은 설사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침묵보다는 참여와 대화를 더 좋아한다. 우리를 대화에 끌어들여서 우리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길한 수동성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의 기권은 진정한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 실질적 개선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이 아니라 '무정치적' 사회적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다.
* 바디우가 오늘날 궁극적인 적의 이름이 자본주의, 제국, 착취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한 것은 옳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모든 변화를 이루는데 궁극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환상이고, 바로 이 환상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처럼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여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부에서 바로 그 국가와의 거리를 두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도구로 이용해서 말이다.
* 간단히 말해서 폭력은 탈신비화돼야 한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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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에서 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은 "'조국을 위해 죽은 자들에게 바친' 우스꽝스러운 기념비들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탈영자들의 기념비들'을 세우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드높이 세우는 영웅들의 승전비는 이 세계에 의해 강요된 규범적 시선을 대표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으로 박정희의 동상 같은 것이 있지요. 아니면 맥아더 동상일까요? 그렇다면 탈영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 설명은 목차로 대신하겠습니다.
* '국민'이라는 이름의 감옥 - 박노자*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 정희진* 용해와 귀속의 역사를 돌아보며 - 신형기* 지식인, 너의 이름은? - 박형준* 결계의 폭력 - 이정희* '마지노선'의 이데올로기와 가족,국가 - 권명아* 근면과 성실 혹은 아저씨 품성에 대하여 - 김진송* 출세와 성공, 그 헛살기의 실체 - 강수돌* 대의 민주주의 속에 민주주의는 없다 - 조정환* '내'가 소외시킨 '그들'의 이야기 - 김두식* 성을 파는 사람들, 그 위반의 이름이 놓일 자리 - 원미혜* 커밍아웃의 정치학을 다시 생각한다 - 서동진* 빈민이라 불리는 사람들, 빈민이라 부르는 사람들 - 조문영* 투쟁하지 '않는' 철거민 - 이호* 국제이주 노동자, 아직 미완성인 우리의 미래 - 유명기
예전에 소개드렸던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과도 맥이 통하는 글들입니다.
귀에 익은 이름이 꽤 많이 보입니다. 저처럼 지식이 얕은 사람에게도 박노자, 정희진, 김두식 이 세 분의 이름은 익숙하네요. 월덴 3에서도 모두 소개드린 적이 있는 책을 쓴 분들이고 제 기억으로는 모두 높게 평가했던 책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의 글도 훌륭하지만 최소한 다음의 세 편은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큰 깨달음을 주는 명문입니다.
*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 정희진* '마지노선'의 이데올로기와 가족,국가 - 권명아* 출세와 성공, 그 헛살기의 실체 - 강수돌
영웅이 아닌 탈영자들의 기념비를 똑바로 바라보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덧. 이 책은 북 크로싱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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