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EAP를 모르는 분을 위해 짧게 소개드리면 EAP는 Employee Assistance Program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근로자 지원 제도'라고 번역됩니다. 원래는 미국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가 되는 근로자들의 회복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시작되었는데 최근에는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를 포함해 근로자들의 후생 복지, 더 나아가서는 인사, 경력 개발 분야까지 아우르는 커다란 영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P&G와 같은 몇몇 외국계 회사를 중심으로 실시하고 있는데 제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최근에 시범적으로 EAP를 도입했습니다. 당연히 주무 부서는 제가 근무하는 기관이 되었고요.
도입의 이유는 과거 미국에서 EAP 도입의 시발점이 된 알코올 문제의 개입을 위해서인데요. 제가 근무하는 직장은 다양한 부속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정 기관의 근로자들이 알코올을 지나치게 섭취함으로써 생산성 저하는 물론이고 안전 사고의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그동안 산재 평가에서도 매우 낮은 점수를 받아왔고요.
결국 최근에 큰 사고가 날 뻔한 일을 계기로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메스를 대기 시작했고, 문제가 된 근로자를 2달 간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에 입원시키고, 퇴원을 한 후 1개월 전부터 제가 근무하는 기관에서 심리 치료 및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 근로자를 담당하게 되었고요.
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성 알코올 중독 환자를 경험한 적은 있지만 그다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체계적인 치료 프로그램을 실시한 적이 없어서 수험생의 마음으로 지금도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EAP를 대하는 당사자의 마음가짐이 치료자와 많이 다르더군요. 회사에서 근무 복귀를 위한 필수 조치로 치료를 명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 있을 뿐, 치료자를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거나 감시하기 위해 보낸 사람으로 나름 규정하고 있어 도통 마음을 열지 않고 매우 방어적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중독성 질환 환자의 고유한 특성까지 겹쳐 5주째 만나고 있지만 계속 제자리걸음입니다. 금단 증상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일상 생활이나 근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Rapport를 형성하는데 주력하고 있고 변화 동기가 내면에 생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고무하고 있지만 벽에 가로막힌 느낌입니다. 사실상 회사에서는 이 근로자의 복귀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고 인사팀이나 관련 부서와 저와는 하등의 이해 관계가 없지만 이 근로자가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지요.
물론 EAP 실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로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과 전문적인 지식, 노하우 등이겠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 가장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privacy의 완벽한 보장과 치료자와 이용자가 신뢰를 형성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의도와 상관없이 EAP는 허울만 좋은, 보여주기 위한 제도로 전락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트랙백 주소 :: http://walden3.kr/trackback/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