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상담자는 내담자를 돕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상담자는 무조건 모든 내담자를 도와야만 하는 걸까요? 물론 전문의가 자신의 전공 분야에 맞는 환자만 진료하듯이 자신의 주력 분야에 걸맞는 내담자를 중심으로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담자도 있기는 하지요.
오늘은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좀 더 급진적인 방향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내담자는 자신에게 맞는 상담자를 신중하게 물색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럼 상담자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내담자를 신중하게 물색하면 안 되는 걸까요?
물론 그런 선택 자체를 고려할 수 없는 기관 소속의 상담자들은 자신에게 배정되는 내담자가 누구이든 그냥 상담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내담자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요? 정말 효과적인 상담이 가능한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중독 상담을 할 때 모든 내담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독 문제를 가진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애착 외상이 너무 심해 중독 문제보다 애착 외상 치유가 더 시급한 내담자도 있었고, 성격 장애가 너무 심하고 특히 저랑 기질이 상극이라 역전이를 다루는 데 에너지와 시간을 다 빼앗겨 정작 중요한 주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내담자도 있었습니다. 또 중증 우울 장애가 있어 상담보다 당장 입원하여 집중적인 약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내담자도 만났습니다. 또 나는 부부 갈등이 문제이니 중독은 다루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중독자도 있었습니다.
상담자는 이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접근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눠야 합니다. 그 결과 내담자를 받아들일 지 아니면 거부할 지도 결정해야 할 수도 있죠. 정말로 내담자를 위하는 상담자라면 효과적이지 않은 상담때문에, 궁합이 정말 좋지 않은 상담자와 만나서 낭비하게 될 내담자의 에너지와 시간까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내담자를 선택할 수 있는 여건과 위치에 있는데도 오는 내담자를 모두 다 받는 상담자가 있습니다. 그게 본인의 사명이자 신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상담자가 모든 내담자를 상담할 수 있다는 착각도 결국은 '구원자의 환상'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심하면 나는 내담자를 거부할 수 없다는 순종성(submissiveness)이나 역의존성(counter-dependence)의 덫에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잘 상담할 수 있는 내담자를 가려서 받는 것이 유능한 상담자의 덕목이라고 믿고 그것이 결국은 내담자를 위하는 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나를 찾아오는 모든 내담자를 거부할 권리가 없고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담자라면 위에서 언급한 문제때문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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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받으려는 많은 내담자들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별 일도 아닌 이런 정도의 일로 상담 씩이나 받아도 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내담자일수록 보고하는 내용을 들었을 때 상담자가 느끼는 건 '대체 이렇게 힘든 데 어떻게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대체 이런 gap은 어떻게 생기는걸까요.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도움을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도움을 주는 것은 능력과 이타성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도움을 받는 건 역의존성 문제를 극복해야 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상담자가 내담자를 돕는 건 공부와 수련을 바탕으로 형성된 전문성과 조금의 소명 의식만 있으면 되지만 상담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생판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받을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담을 받는 내담자들은 정말 용기 있는 분들입니다.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뭔 용기까지 필요하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그건 지금 받은 도움을 당연히 언젠가 돌려줄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과 내가 도움을 청하면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형성한 건강한 분들(물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이기주의자들은 예외입니다만)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내담자들이 역의존성(conter-dependence)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역의존성은 간단히 말해서 남에게 아주 간단한 것도 의존하고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형편없는 자아상과 바닥을 친 자존감이 깔려 있습니다. 역의존성은 '나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핵심 신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기대했던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생기기 쉽구요.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지만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받은 상처 때문에 역의존성이 생기고, 상처를 치유해야 하지만 역의존성 때문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그래서 상처가 덧나서 더 심해지는 악순환을 겪게 됩니다.
그러니 상담자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자신의 역의존성을 넘어설 용기를 냈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엄청 대단한 겁니다. 그 상담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런 용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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