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먼저 들겠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사례 두 가지를 보시죠.
1. 아버지가 무능한데다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합니다.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할 어머니가 없어 자녀들은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2. 아버지가 무능한데다 알코올 의존이 심해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밖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합니다.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할 어머니가 없어 그 역할을 조모가 대신합니다. 조모는 며느리 보기 민망하고 아이들이 안쓰러워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허용하게 됩니다. 일하느라 집에 늦게 돌아온 어머니는 생활 습관이 엉망이고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보고 잔소리를 하다 나중에는 큰소리도 내고 체벌도 하게 됩니다.
1번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우느라 주 양육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그 역할을 어머니가 대신 하게 되어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죠. 동일시 할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실 상 부재한 상태이니 상담자 입장에서는 방임의 부정적 영향만 다루면 됩니다(그게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가 명료하다는 의미로 이해하시는 게 좋습니다)
2번의 경우는 조모가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 하려고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고(조모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려고 하니 역할 혼란이 생기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장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조모가 망쳐놓은 걸 바로잡기 위해 아버지의 훈육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역시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하려니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집은 조모가 수행하는 good mother role과 어머니가 수행하는 bad father role이 충돌하게 되어 자녀에게 혼란을 주고 이 때 대부분 무조건 오냐오냐 하는 할머니에게 밀착되어(자신들에게 득이 된다고 믿으니까요) 가장의 역할을 감당한 죄(?) 밖에 없는 어머니와 갈등이 격화됩니다.
굳이 불안정 애착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1번 상황은 회피형 애착 유형에, 2번 상황은 혼란형 애착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당연히 혼란형 애착 유형이 자녀가 경험하는 주관적 고통감도 크고 개입도 어렵습니다.
1번과 2번 모두 자녀에게 좋지 않은 환경인 것은 분명하나 굳이 문제의 심각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의 용이성 관점에서 보면 1번 상황보다 2번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습니다. 어차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바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을 어설프게 떠맡는 게 훨씬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역할을 어설프게 수행할 바에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건 굳이 부모 뿐 아니라 모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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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분야, 특히 도박 중독을 다루는 상담자가 꼭 익혀야 하는 상담 기술을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동기 강화 상담을 선택하겠습니다만....(실존 치료는 기술이 아니라고 주장해 봅니다;;;)
동기 강화 상담은 의외로 현장에서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도박 중독의 특성 중 하나가 문제 부인(denial)인데다 동기 강화 상담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관계 맺기조차도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동기 강화 상담을 실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활용해 볼 수 있는 기술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역할 바꿔 연기하기란 건데,
보통의 도박 중독 초기 상담에서는 상담자가 도박자에게 어떤 도박을 얼마나 하셨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냐 등등의 중요하지만 조금은 뻔한 질문들을 하게 마련인데 만약 도박자의 방어가 강하고 자신의 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낮은 것 같으면 역할을 바꿔서 연기를 해 보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즉, 상담자가 '나는 도박 중독자가 아니다, 도박을 하기는 하지만 언제든 끊을 수 있다, 최근에 잃은 돈이 많아서 흥분했기 때문에 좀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언제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조절할 수 있다'며 도박 중독자의 방어적인 모습을 연기할테니 도박자에게는 상담자의 입장에서 그걸 반박해 보라고 하는 것이죠.
상담자의 도박 중독자 연기에 공감하거나 동화되지 말고 어떻게든 도박을 그만두도록 설득해 보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이 방법은 언제나 방어 역할에만 익숙한 도박자를 흔들어서 의외성을 자극함으로써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는 기술입니다.
상담자가 도박 중독 상담 경험이 많아 전형적인 도박 중독자의 방어 논리에 익숙할수록 능숙하게 연기할 수 있고 도박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기 쉽습니다.
어느 정도 도박 중독 상담에 익숙한 중급 이상의 상담자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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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상담 불문하고 최소한 supervisor라면 이 정도의 역할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1. 정확한 지식 전달
임상가들이 수련 과정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지식과 정보를 그동안 학회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었다면 이미 현장 supervisor들의 애로사항이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만 제가 10년 이상 학회를 지켜본 결과 난망한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각개격파, 구명도생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수련 현장에 따른 차이가 꽤 크다는 것인데 그나마 많은 환자가 몰리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 과정과 접점이 많아 최신 지식을 업데이트할 수 밖에 없는 종합병원급 기관은 일이 많아서 힘들어 죽을지언정 실력은 늘 수 밖에 없습니다. supervisor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니까요(물론 그런 기관에서도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시간만 죽이고 앉아 있는 무능한 supervisor도 있습니다만 그건 개인적인 문제이니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고요). 예를 들어 최근에 DSM-5가 출시되었는데 번역판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눈치만 보는 건 supervisor의 자세가 아닙니다. DSM-5는 도입 시점이 문제이지 DSM-IV를 계속 쓸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러니 당장 원판을 구입해서 읽고 정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북 세미나 한답시고 엄한 레지던트 선생님들에게 번역, 정리 맡기는 짓 하지 마시고요.
supervision을 할 때에도 reference가 있는 지식과 자신의 체험에 기반한 지식을 구분해서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윗 supervisor에게 배웠던 지식만 알음알음 끌어모아서 울궈먹을 수 있거든요. 제가 최근에 제 supervisee 선생님들께 reference를 자주 물어보는데 제대로 답변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근거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연습이 안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supervisor들께서는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이 항상 업데이트되어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2. 동기 부여
첫 번째 역할로 말씀드린 정확한 지식 전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동기 부여이며,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정확한 지식 전달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맙니다. 임상, 상담 현장의 일이 재미있고, 호기심이 샘솟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하는 게 즐거워야 계속 하고 싶고 그래야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니까요.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련 과정에서 동기마저 충천하지 않다면 수련 과정을 버티는 것은 물론이고 전문가가 되고 나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에 빠지거나 쉽게 질려서 무력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대개의 경우 supervisee 선생님들에게 동기 부여가 잘 안 되는 건 supervisor 스스로가 동기 부여가 안 되기 때문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 없거나 무료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함정에 빠진 supervisor라면 이 문제부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supervisee들까지 함정에 빠뜨려 공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만 더 첨언하자면 가능하면 동기 부여는 사명감보다는 흥미 유발과 재미 찾기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 임상, 상담 현장은 사명감과 소명 의식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담자/피검자의 문제를 다룰 때 진지해지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임상가들에게 엄숙주의를 강요하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도제식 수련제도 때문에 힘든 수련 레지던트들에게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이상한 교조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3. 핵우산 기능
이건 다른 직능 영역과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곳에서 일하는 supervisor에게만 해당됩니다만 개업 상담센터나 대학 교수가 아닌 이상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supervisor에게 해당된다고 해도 맞을 겁니다. 특히 의사 선생님들과 일을 하거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기관의 선생님들은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기관에 속한 supervisor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핵우산 기능합니다. 여러 직종이나 직능의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는 기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의사전달과정이 모호하거나 명령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때로는 똥물이 튀는 것이 싫어서 희생양을 찾아서 떠넘기는 일도 생기게 되고, 업무 진행 상 약한 부서나 조직에 압력을 행사하는 일은 다반사죠. 그런데 그럴 때 자기 하나 살자고 미사일이 날아오는데 옆으로 비켜서거나 의사를 비롯한 다른 직능 전문가의 뒤에 숨는 일만큼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 나서서 나 하나만 믿고 의지하는 supervisee들을 위해 산화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뭐 그런다고 supervisor가 잘려나가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엄살 부리지 마시고요). 유능한 중재자가 못 된다면 최소한 싸움닭이 되는 것 만큼은 피하면 안 됩니다.
수련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수련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여론조사하면 supervisor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만 내빼거나 쏟아지는 압력을 몸으로 막아내기는 커녕 완장찬 마름처럼 되려 횡포를 부릴 때가 당당히 1위가 될거라는데 제 금쪽같은 돈 500원을 걸겠습니다.
존경받는 supervisor가 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력과 성품을 겸비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동기를 부여하려고 애쓰며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랫사람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supervisor의 역할이고요.
오늘도 현장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계신 수많은 supervisor 선생님들 힘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장래의 동반자가 될 supervisee 선생님들이 모두 잠재적인 우군이니까요. 그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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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자가 계속 치유의 길에 들어서는 걸 주저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 자신의 도박 문제를 진정으로 깊이 들여다보고 도박과 이별하고자 결심한 상태라면 그 방법이 상담이 되었든, 단도박 모임이 되었든, 신앙 생활이 되었든 간에 걸리는 기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결국 도박자는 도박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도박으로 점철된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질수록 치유 속도는 빨라져서 가끔은 가족이나 상담자가 놀랄 정도로 빨리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도박 중독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빨리 나아지는 도박자도 있는 반면 시간이 갈수록 상대적으로 더 힘들어진다고 느끼는 가족들도 많습니다.
대체 왜일까요?
치유 초반에 기대했던 것처럼 도박자가 도박만 하지 않으면, 성실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던 굳은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온통 초조함과 짜증, 불만만 가득하게 되니 말이죠.
그건 역할 변화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중독이든 중독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로 바뀌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일단 바뀌기 시작하고 속도가 붙으면 굉장히 쉬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박 중독자의 역할과 도박 중독자가 아닌 역할이 너무나 극명하게 구분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도박 중독에서 가족들이 맡았던 감시자의 역할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닙니다. 도박 중독자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 떠맡겨진 것이죠. 내 옷이 아닌 옷을 입은 것처럼 껄끄럽고 그렇다고 안 입을 수도 없는 그런 역할입니다. 그걸 억지로 하다보니 이제 슬슬 몸에 익을 때쯤 되었는데 그걸 갑자기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도박 중독 치유를 위해서는 감시, 관리, 통제하려는 마음과 의도, 행동을 모두 내려놓아야 하거든요. 도박 중독에 대응하기 위해 움켜쥐고 있었던 유일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죠.
가족들이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앞으로 감시자의 역할이 아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모델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쉽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로운 역할을 정립하느라고 시간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다보니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생각보다 쉽게 적응하는 도박자에 비해 가족들은 역할 변화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겁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적응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좀 더 마음을 편히 가지고 시간의 힘을 믿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간이 모든 불협화음을 정리해 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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