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 교육
그래도 명색이 연말인지라 처음으로 맡은 강의의 종강을 앞두고 이런저런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많이 생긴데다가 아르바이트로 나가는 병원의 심리평가 의뢰가 지지난 주부터 폭주하여 깊은 생각이 필요한 포스팅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게다가 happyalo님이 포스팅하신 글에 대해서는 저도 하고 싶은 말이 평소에 많았던지라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다보니 이러다가는 올해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하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추가적인 포스팅을 하더라도 일단은 어설프게나마 적어보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어설프게나마'라는 말은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감상을 적는 것도 아닌 글이 될 것 같다는 의미에서 선수를 친 것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려고 Sieg님의 글을 클릭하니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창이 뜨는군요. ㅠ.ㅠ 역시 빨리 포스팅을 할 걸 그랬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 기억과 happyalo님의 글을 기초로 포스팅해야겠군요.
가장 먼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과연 영재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많은 분이 영재를 이미 전제하고 계시지만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영재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개념적으로는 뭔가 있을 듯 하지만 제가 알기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영재는 '특정 분야에서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천재란 용어도 최소한 제가 일하고 있는 임상 심리학 분야에서는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닙니다. 그저 표준화된 지능 검사 도구로 측정한 지능 지수(IQ) 130 이상을 상위 2% 안에 들어가는 최우수 수준의 지적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부를 뿐 천재라고 칭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조차 없습니다. 더욱이 그 '특정 분야'라는 것이 천차만별이라 측정 도구가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제가 병원에서 수련을 받을 때 그 병원이 꽤나 알려진 병원이고 특히 소아 분야에서 매스컴을 많이 탄 병원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자녀가 영재라고 데리고 온 부모들이 많이 있었고 그 자녀를 심리평가해보면 실제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소유한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만... 우리나라 부모들의 지능만능주의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포스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신이 나서는 아이를 지도해 줄 영재 교육원이나 특수 교육 기관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죄송하지만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제대로 된 영재 교육원이 거의(제가 모든 영재 교육원을 아는 것은 아니니) 없습니다. 그놈의 파이를 나눠먹기 위한 싸움들은 많았지만 실제 영재에 대한 제대로 된 학문적인 정의와 접근 하나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영재 교육원이 있을 리 만무하지요. 영재 교육원을 방문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결국은 지능 교육원(용어의 사용이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이거나 혹은 엉터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영재 교육 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제 좁은 소견을 탈피할 기회를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대로 배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영재(다른 용어가 없으니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겠습니다)를 자녀로 둔 부모들이 무척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뭔가 질적으로 다른(이 역시 대부분 매스컴의 판짜기에 놀아나는 동안에 형성된 자기 최면인 경우가 많지만)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것이 인류의 복지를 위한 희생이든, 훌륭한 부모라는 칭호를 받고 싶어서든 일반적인 다른 아이들과는 차별화된 교육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거든요. 그 사이에서 그 아이의 행복 추구권과 아이일 때에만 한시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지요. 게다가 제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대로 된 영재 교육을 위한 시스템은 거의 전무 하다시피하고, 그런 취약한 시스템 안에서 좌충우돌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격증 취득 기계가 되거나 '영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자가 최면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어린 나이에 수많은 자격증으로 무장하고 매스컴을 통해 어른들의 추악한 손때가 묻을 대로 묻은, 그러면서도 또래와 소꿉놀이 한번 한 적이 없고 커서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채찍질당하면서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아이의 미래는 왜 고려하지 않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아이의 선택권을 과연 부모라는 이름으로, 사회라는 이름으로 빼앗을 권리는 누가 주었는지 반문해 보게 됩니다.
병원에서 제가 심리평가를 한 지적 능력이 우수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끝맺음을 하려고 합니다. 지능 지수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130이 넘고, 하루에 3군데가 넘는 학원을 전전하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공부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초등학생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보고형 검사인 문장 완성 검사(SCT)에서는 "내가 가장 행복한 때는 학원이 쉬는 날이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보고하고 투사법 검사에서는 '으르렁거리면서 뒤쫓아오는 괴물'을 지각하는 아이들입니다. 지능 검사도 시험이라고 판단했는지 제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든 잘하려고 애쓰고 자신의 응답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고쳐달라고 떼를 쓰는 아이들입니다.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부모의 극성인가요? 아니면 지능 만능주의로 몰아가는 이 사회인가요?
제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DINK족이 된 것은 이런 연유도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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