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평가 supervision을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호소하는 문제 중 하나가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입니다. 심리검사도 꼼꼼하게 했고, 면담에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피검자에 대해 많은 양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막상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자료들을 펼쳐 놓고 보면 피검자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고, 검사 시 또는 면담 시 피검자가 보인 행동, 말과 검사자의 주관적인 느낌만 막연하게 맴돌고, 이런 느낌이 검사 자료와 일치하지 않으니 힘들여 작성한 보고서가 한 편의 소설같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리 읽어보아도 자신이 검사한 피검자같지 않다는 생경한 느낌...
많은 평가자들이 경험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심리 검사의 sign을 해석하기 위한 제반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없이 (막무가내로) 심리평가를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심리 평가를 의뢰(refer)받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의뢰 사유 확인(이 사람은 왜 심리평가를 받으려고 하는가?)을 해야 합니다. 군 면제를 위한 병사용 진단서 발급을 위해서인지, 정신장애판정을 위한 보고서 제출인지, 교통 사고 이후 정신장애 추가 진단을 통해 보상금을 받기 위한 것인지 등등. 그 밖에도 의뢰한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어려워 도움을 요청한 것인지, 진단은 명확하나 성격적인 역동이나 심리 상태가 궁금해서 요청한 것인지, 또는 자살 위험성을 평가하거나 치료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피검자의 심리적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인지 등 의뢰 사유는 매우 다양합니다.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은 검사 도구의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통 사고 후 뇌손상에 의한 인지 기능의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라면 Full Battery보다 신경심리평가를 실시해야 할 테니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의뢰 사유 파악이 가설 설정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뢰 사유가 정신 분열병으로 인한 정신장애판정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 피검자는 Axis I. Schizophrenia로 진단할 수 있는가?' 가 하나의 가설이 됩니다. 의뢰 사유에 의하면 반드시 이 가설을 검증해야 합니다. 따라서 평가자는 이 사람이 정신 분열병으로 진단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행동 관찰 시에도 사고 장애 양상이 나타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면담 시에도 증상의 발병과 경과, 현재 상태, 직업 기능, 대인 관계 등을 확인하는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심리 검사 및 보고서 작성은 두 말 할 것도 없죠.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은 넉넉하지 않은 심리 평가 시간을 절약해주고 평가자가 효율적으로 정보를 다룰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평가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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