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임상가들은 의뢰 사유(Reasons for Referral)를 확인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또 절차에도 익숙한 편입니다. 대부분의 의뢰 사유가 변별 진단이기도 하고 병원 장면에서 의뢰 사유를 충족하지 못하는 심리평가보고서는 사실 상 쓸모없는 취급을 받기 때문이죠.
하지만 단기상담 체제로 바뀌면서 상담자 배정 전에 routine하게 심리평가를 실시하거나 상담자가 상담 도중 필요에 의해 내담자와 상의 하에 심리평가를 self 의뢰하는 상담 현장에서는 의뢰 사유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시하는 심리검사 battery가 검사 수가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고 평가자의 재량권이 별로 없는 병원 장면보다 상담 현장에서 의뢰 사유 파악의 중요성이 훨씬 더 큽니다.
그 이유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의뢰 사유 파악 -> 정확한 가설 설정 -> 최적화 된 검사 도구 선택
의뢰 사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그에 따른 적합한 가설을 설정할 수 있고 가설이 명확하게 설정되어야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최적의 검사도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등교 거부를 하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있다고 해 보죠. 우울이나 불안 같은 정서적 문제가 보고되지 않았지만 온통 게임에만 몰두해 있고 오프라인의 또래 관계도 좋지 않으며 수업 태도가 불량해서 선생님을 비롯한 급우들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적은 중학교 생활 내내 바닥이었고요.
학교 부적응 양상을 보이는 전형적인 청소년인데 의뢰 사유가 상급 학교 진학 및 성적 향상 가능성 타진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의뢰 사유가 학업 수행에 대한 것이니 당연히 가설은 지적 제한이 있느냐, 지적 장애 가능성이 있느냐일테고요.
그러니 필요한 검사 도구는 지적 제한을 확인할 수 있는 지능검사와 BGT, 사회성숙도 검사 등이 될 겁니다. 정서적 문제가 보고된 적도 없고 의뢰 사유에서도 적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상 로르샤하 검사나 그림 검사와 같은 투사법 검사는 굳이 실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보고되지 않은 심리적 문제가 의심된다면 MMPI-A 정도만 추가하면 되겠지요.
이처럼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파악하면 그만큼 가설을 세부적으로 세울 수 있고 그러면 꼭 필요한 검사 도구만 사용해도 되기 때문에 수검자를 불필요하게 괴롭히는 일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의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검사 도구만 사용했기 때문에 결과를 해석할 때에도 불필요한 정보 과잉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수검자 뿐 아니라 평가자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상담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가라면 심리평가에서 반드시 의뢰 사유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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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보고서에는 행동 관찰(Behavioral Observation)이라는 내용 영역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수검자의 관찰된 행동을 통해 수검자의 모습을 좀 더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작성하는거지요.
행동 관찰 영역에 기술되는 수검자의 행동은 종합심리평가를 기준으로 크게 '검사 전 대기실에서 보인 행동', '검사 중 수검자가 보인 행동과 반응 태도', '검사 후 면담에서 보인 행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중 검사 중 수검자가 보인 행동과 반응 태도가 제일 중요하고 분량도 가장 많죠.
행동 관찰 영역을 기술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표준화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의뢰 사유에 연동하는 방식입니다.
표준화된 방식은 그야말로 수검자의 외양, 검사자를 대하는 태도, 검사 자극을 다루는 행동 방식, 검사 중 감정을 표출, 혹은 감추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제스처와 얼굴 표정 등을 활용해 수검자의 이미지가 최대한 생생하게 떠오를 수 있도록 기술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키와 몸무게가 얼마이며, 어떤 옷을 입고 왔고 액세서리는 어떤 것을 착용했으며 위생 상태는 어떠한지, 검사자와 눈맞춤이 적절한지, 표정이 굳어 있지는 않은지, 손떨림이나 초조함, 불안을 드러내는 특징적인 행동은 없는지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게 됩니다.
표준화된 방식은 수검자의 모습을 최대한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지극히 특징적인(때로는 이상한) 행동 특징들을 선별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즉 수검자가 호소하는 증상이나 문제와는 별 상관없는 두드러진 특징들이 검사자의 주관적인 선호에 따라 선별될 수 있다는 약점이 있는거죠. 그래서 화장이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진하다든가, 옷차림이 너무 선정적이라든가, 문신이 눈에 띈다든가, 특이한 곳에 피어싱을 했다든가, 땀이 많이 흘러 검사지가 젖었다든가(사실은 다한 증세일 수 있는데) 하는 내용이 주된 모습으로 강조될 수 있어 이후 제시되는 심리검사 결과와 상충되거나 뭔가 걸맞지 않는 생뚱맞은(혹은 지나치게 튀는) 모습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을 사용할 수 있는데 바로 의뢰 사유와 연동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심리평가 의뢰 사유가 우울 장애를 변별하는 것인 수검자가 있다고 할 때, 우울 장애를 겪고 있는 수검자에게 기대되는 행동 특징들이 검사 중에 나타나는지, 혹은 전혀 반대되는 양상들이 나타나는지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는 겁니다. 검사자와 눈 맞춤을 피하고 표정이 어두우며, 반응 속도가 전반적으로 느리고 필압도 약하고 심지어는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이 관찰된다면 우울 장애를 지지하는 행동 관찰 결과가 될 수 있는거지요. 아니면 정 반대로 기운차게 검사실에 입실하고 시종일관 만면에 미소를 띠며, 검사자가 검사 지시를 마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과제 수행을 시작하고, 반응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면 검사 의뢰 사유였던 우울 장애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기술되는거지요.
그래서 심리평가보고서 작성 시 초심자는 표준화된 기술 방식으로 행동 관찰 영역을 작성하는 것을 먼저 연습할 수 있지만 수검자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싶거나 심리검사 결과와 연동하여 작성하고 싶은 분이라면 의뢰 사유를 염두에 둔 기술 방식을 고려해 보시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행동 관찰의 기술은 종합심리평가보고서 작성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대면 검사를 하지 않는 선별심리평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TCI/JTCI, MMPI-2/A, SCT 등 자기 보고형 검사처럼 활용할 수 있는 검사 도구를 주로 사용하는 선별심리평가에서도 검사지를 제공할 때 orientation을 하는 절차가 있고 질문지를 직접 수령하는 과정에서도 간략하게나마 면담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때 관찰한 내용을 행동 관찰 영역에 통합할 수 있습니다. 꼭 대면 검사에서 관찰한 행동 특징만을 사용하려고 고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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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라면 상담자가 심리평가를 실시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같은 기관에서 일하는 임상심리사에게 넘기거나 외부 기관의 임상심리학자에게 refer했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수요가 공급을 초과했기 때문에 선별심리평가까지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MMPI-2/A, SCT 조합 또는 MMPI-2/A, TCI 조합의 선별심리평가는 대부분의 상담 현장에서 상담자들이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고 앞으로는 종합심리평가까지 상담자들이 해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담에 도움이 될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심리평가를 한 것 뿐이니 보고서 따위는 안 쓰고 그냥 말로 때울래'와 같은 접근이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원래 선별심리검사만 실시했어도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맞죠. 대충 말로 때우면 안 됩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심리평가에 응한 내담자를 기망하는 직무 태만 행위입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상담자가 심리평가보고서를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을 몇 가지 정리해 봤습니다. 이 중 몇몇은 별도의 포스팅으로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각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1. Reason for Referrals(의뢰 사유) 작성 시 평가 의뢰 사유를 항상 염두에 둘 것
: 임상 전공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담 전공자들은 상담 의뢰 사유만 생각하기 때문에 심리평가 의뢰 사유를 별도로 상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기분이 너무 울적해서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눈물만 나오는 문제로 내방한 것이 상담 의뢰 사유라면 우울 장애 변별이 평가 의뢰 사유라고 할 수 있겠죠. 아예
의뢰 사유 영역을 작성할 때 상담 의뢰 사유와 평가 의뢰 사유를 구분해서 작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관련 포스팅 :
'상담 의뢰 사유와 심리평가 의뢰 사유를 구분할 것 : 상담자용'
2. 검사 sign으로 지지되지 않는 내용은 (절대로) 쓰지 말 것
: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 중 하나는 '소설처럼 (생동감있게) 쓰되 소설을 쓰지는 말 것'이라는 원칙입니다. 수검자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은 좋으나 사실이 아닌 평가자의 주관을 사실처럼 써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죠. 소설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철저히 심리검사 sign에 의해 지지되는지를 검증하면서 써야 합니다. 즉 앞서 든 예에서처럼 '수검자는 현재 우울한 정서 상태'라고 쓰려면 우울하다는 걸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찾아내 연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보고서에 기술하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물론 초심자는 개별 검사 sign을 일일이 보고서에 명기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검자를 묘사하는 어떤 내용을 보고서에 썼을 때 이를 지지하는 해당 검사 sign을 말할 수 없다면 그 문구는 빼야 합니다. 평가자의 지나친 과잉 해석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론일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세요. 검사 sign으로 지지되지 않는 문구는 쓰지 않는 게 옳습니다. 그러니 상담 전공자는 임상 전공자보다 심리검사 도구와 검사 sign에 대한 공부에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죠.
3. '빼는 방식'이 아닌 '넣는 방식'으로 쓸 것
: 상담 전공자가 심리평가보고서를 망치는 대표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각 심리검사 결과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추려냅니다. MMPI-2/A에서는 68 또는 70T가 넘는 지표, 로샤에서는 별이 뜬 지표, 지능 검사에서는 유의미한 차이가 나는 지표와 소검사 등등. 그 다음에는 각각의 해석집을 뒤져서 내용을 스크랩한 뒤 보고서의 해당 영역에 붙여 넣습니다. 그 다음에 자신의 수검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빼는 작업을 합니다. 문제는 일단 유의미한 결과라고 해서 몽땅 붙여 넣은 뒤에는 노력이 아깝게 여겨지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빼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그냥 모두 살리는 방향으로 가게 되고 실제 수검자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내용의 보고서가 됩니다.
무엇보다 빼는 방식의 보고서는 군더더기가 많고 지저분하며 자칫하면 앞뒤가 모순된 내용이 들어갈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저 분량이 많아서 내용이 충실해 보이는 착시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심리평가보고서는 넣는 방식으로 써야 합니다. 수검자를 기술할 내용을 하나 찾으면 해당되는 검사 sign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교차 검증을 해 보고 이를 통과한 내용만 넣어야 합니다. 당연히 이 방식은 처음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롭습니다. 다 써놓고 보면 분량이 적기 때문에 부실해 보이기도 하고 통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수검자에게 정확히 적용할 수 있는 핵심 내용만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 없고 심리치료나 상담을 할 때 시작점이 되는 핵심 문제가 담겨 있어서 곧바로 치료로 연결하기도 편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좀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빼는 방식'이 아닌 '넣는 방식'으로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 관련 포스팅 :
'심리평가보고서 작성법 : 빼지 말고 넣는 방식으로 쓸 것'
4. 상담이 이미 진행중인 내담자의 경우 상담 내용을 넣지 않도록 주의할 것
: 상담 현장도 점점 단기 상담으로 재편되면서 상담자에게 배정되기 이전부터 선별평가를 실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그래도 상담 도중에 추가적인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상담자가 평가자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하는 거지요. 이 때 특히 주의해야 하는 건
상담 동안에 형성되었던 내담자에 대한 인상과 가설을 심리평가 동안에는 잠시 덮어둬야 한다는 겁니다. 이 개인적인 주관과 선입견의 영향력은 의외로 심리검사 해석에 자신이 없는 상담자의 눈을 흐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마땅한 검사 sign을 찾지 못하는 경우 상담한 내용에서 그 근거를 가져와 보고서에 대신 넣는 것이죠. 보고서를 읽다가 관련 근거를 대지 못하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다면 상담 내용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고 그런 경우 원칙적으로 빼야 합니다. 상담 내용으로 수검자의 모든 문제를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애꿎은 내담자에게 불필요한 검사를 강요한 꼴이 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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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심리평가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모든 심리검사는 대면 검사로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검사 도구의 선택과 검사 실시 타이밍은 평가자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강조점은 다른 포스팅에서 다시 이야기를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두 번째 강조점 중 심리검사 도구와 관련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심리검사 도구를 사용하는 임상가라면 누구나 심리평가보고서를 잘 작성하고 싶을텐데요. 심리평가보고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수검자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formulation할 수 있어야(즉, 수검자의 심리상태 그림이 잘 그려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심리검사 도구의 선택이 중요하죠.
검사 수가와 관련하여 이미 심리검사 도구 묶음인 battery들이 구성되어 있는 병원 환경은 예전부터 그랬다 치고 요새는 상담 현장도 단기 상담으로 가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선별 심리평가를 routine하게 실시하는데, 원래 그래서는 안 됩니다. 효율성만 따지다 보면 소탐대실 할 수 있죠.
앞에서 말씀드린 심리평가보고서를 잘 쓰는 방법을 다시 요약해 보자면, 수검자의 심리 상태를 잘 그려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제대로 된 검사 도구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검사 도구는 어떻게 선택해야 잘 선택했다고 말 할 수 있는 걸까요? 당연히 평가자가 검사 전에 세웠던 가설(변별 진단을 위한 가설, 성격 역동을 파악하기 위한 가설, 예후를 예측하기 위한 가설 등)을 검증할 수 있는 검사 도구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등교 거부 행동을 보이는 중학생의 부적응 양상을 평가하려고 할 때, 학교 생활의 어려움이 낮은 지능에 의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지능 검사와 같은 인지 기능 검사의 실시가 필수적입니다. MMPI-A에서 LAS, IMM이 상승한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만 이를 입증할 뿐이죠. 결국 지능 검사가 필요합니다.
이미 실시할 검사 도구가 정해져 있는데다 평가자가 검사 도구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임상가들은 이미 실시한 검사 결과를 갖고 일종의 '사후 가설'을 세우는데 그건 연구 방법론에서 일단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한 후 이리저리 통계 분석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소위 말하는 '별이 뜨는' 결과를 중심으로 역방향으로 논문을 엮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엄청 비효율적이고 시행착오적인 방법이죠.
원래
심리평가의 가설 검증 절차는 의뢰 사유와 현 병력, 주 호소 문제를 중심으로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검사 도구를 평가자가 선택한 뒤 실시한 검사 결과에 따라 가설을 채택할 것인지, 기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심리평가 시 심리검사 도구는 평가자가 필요에 따라 선택, 실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가설을 가장 잘 검증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도구를 선택하는 겁니다. 당연히 가설을 가장 잘 검증할 수 있는 심리검사 도구인지를 파악하려면 심리검사 도구에 대한 이해와 숙지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가설을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어떻게 해야 심리평가를 위한 가설을 잘 세울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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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보고서의 의뢰 사유 부분에는 보통 어떤 이유로 심리평가를 받으러 왔는지, 어떤 어려움이나 증상이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기술합니다.
심리평가기관이 병원이라면 주 호소나 증상이 주된 내용이 되겠기에 주로 chart같은 의무 기록을 통해 정보를 얻게 되고 상담 센터라면 상담을 받게 된 사유에 대한 내담자 본인, 또는 보호자의 보고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기록합니다.
의뢰 사유에 기록되는 정보는 결국 평가 가설을 설정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무 기록이 되었든, 보호자 또는 내담자를 통해 정보를 얻었든 간에 informant의 보고가 부정확하거나 평가자가 생각한 내용과 다른 개념일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 남자 청소년이 비자발적으로 평가에 의뢰되었습니다. 본인은 별다른 어려움을 모르겠는데 엄마가 가자고 해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왔다고 했기 때문에 보호자인 모친을 면담한 내용이 주된 의뢰 사유가 됩니다. 도무지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주의가 산만한데다 또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심리검사를 한번 받아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때 가설을 세우기 위해 평가자가 떠올리는 생각은 대충 1) 주의력의 문제가 있을 것 같고 중학교 2학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ADHD라기보다는 정서적인 문제로 인한 2차적인 주의력 저하가 아닌가 확인, 2) 또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하니 왕따 문제일 가능성 등입니다.
비교적 합리적인 가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가설을 심리검사를 통해 검증하기에 앞서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informant의 보고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 확인해야 합니다.
위에서 예를 든 경우라면 집중을 못한다는 것이 주의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문제인지(sustanined attention 문제), 주변 자극에 의해 쉽게 주의가 분산된다는 것인지(distractibility 문제), ADHD가 아닐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라도 hyperacvity 문제로 인해 착석에 어려움이 있는 것인지도 확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또래 관계 문제의 경우에도 평소 잘 어울리던 친구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인지(의욕 저하, 외출 횟수의 감소 등 확인), 지속적인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이 경우 등교 거부로 나타날 수도 있음), 본인은 별로 관계를 맺고 싶은 친화 욕구가 없는데 속된 말로 들이대는 급우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한 명인지 다수의 친구 관계로 문제가 확대되어 있는지까지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야 합니다.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임상가는 대부분 수련 과정을 거치는 동안 부족한 정보로부터 가설을 이끌어내는데 익숙해져 있기 마련인데 문제는 일반인에 불과한 informant도 자신과 동일한 참조틀을 통해 본다고 착각하기 쉽다는 겁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위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informant가 주의가 산만하다고 할 때 그게 어떻게 사용되는 의미인지 한 단계 더 들어가 구체적인 용례를 물어봐야 합니다. informant가 사용하는 주관적인 의미는 임상가가 보는 심리학적, 정신병리적 의미와 전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나중에 심리검사 sign을 갖고 설정된 가설을 검증할 때 엉뚱한 곳에서 헤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수검자나 보호자가 하는 말은 맥락과 함께 주관적인 의미를 반드시 확인해서 평가자 본인이 생각한 의미가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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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를 할 때 수검자를 가장 덜 괴롭히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심리검사 도구를 선택하는 것도 임상가의 능력입니다만 반복 사용에 제한이 있는 심리검사의 특성 상 아무래도 생각보다 많은 도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대면 검사가 끝나고 실시한 검사 sign을 정리하다보면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 선택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심리검사 sign들을 선별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릴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단계. 절약성이 가장 중요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소한의 검사로 최대한의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가장 좋죠. 그러니 검사 도구 선정 단계에서부터 꼭 필요한 검사가 아니면 가능한 한 추가, 실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물론 검사 수가 때문에 이미 검사들이 battery로 묶여서 처방되는 병원 장면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2단계. Key word를 중심으로 정리
인간의 심리 현상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 다단한 것이라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죠. 다만 일종의 Key word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불안정 애착이라든가, 이분법적 사고라든가, 반복적인 욕구 좌절로 인해 내재화된 분노라든가... 그런 Key word를 방사형 원의 중심에 놓을 수 있도록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의뢰 사유를 꼼꼼히 확인해서 진단 가설, 역동 가설, 관계 가설 등을 세우는 것이 유용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수 차례 포스팅을 한 바 있죠(
'심리검사 전 필수 점검 사항 - 의뢰 사유 확인과 가설 설정'). 진단 가설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수검자가 호소하는 문제를 바탕으로 '진단 가설' 세우기'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단계. Key word 및 Key word와 1단계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만 선택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어떤 수검자를 설명하는 Key word로 반복적인 성피해 트라우마를 찾았다고 가정해보죠. 당연히 트라우마랑 연결된 몇 가지 개념들이 더 있을 겁니다. 통제 불능의 자기 파괴적 행동이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정서적 지지 세력의 부재가 다른 하나의 연결 개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찾아낸 개념을 중심으로 이제 트라우마와 연결된 개념들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찾아서 모으는 겁니다.
그렇다면 Key word를 지지하는 검사 sign과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개념을 지지하는 검사 sign을 제외한 나머지 검사 결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과감하게 버립니다. 물론 넓은 맥락에서 보면 그 검사 sign들도 수검자의 특정 측면을 설명하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건 핵심적이지도 않고 의뢰 사유와 맞지도 않습니다(2단계에서 이미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는 과정을 거쳤으니).
위와 같은 과정을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면 어느 순간 자동적으로 최적의 검사를 선택해 실시하고, 의뢰 사유에 따른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하면서 Key word를 찾고, 그 Key word와 1차적으로 연결된 핵심 개념을 찾아서 그걸 지지하는 검사 sign들을 자연스럽게 선별하게 됩니다.
그러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한결 손쉽죠. 정보의 홍수에 떠내려 가면서 허우적대는 일이 현저히 줄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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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심리평가를 할 때
평가자가 빠지는 함정 중 하나는 불안한 마음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빠지는 바람에 오히려 길을 잃는 것입니다.
정보가 많으면 어떻게든 수검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정보는 case formulation을 방해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핵심적인 정보를 골라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는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뢰 사유를 명확하게 해야만 가설을 정확하게 세울 수 있게 되고, 가설을 정확하게 세울 수 있어야만 불필요한 정보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또 다른 방법은 정확한 근거가 없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료력을 조사하던 중 과거에 다른 병원에서 특정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았던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해보죠. 이 때 평가자가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건 그 진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려졌느냐는 겁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문진에 의한 것인지, 약식으로 실시된 자기보고형검사 결과에 기초한 것인지, 종합심리평가를 실시한 것인지, 실시했다면 심리평가보고서를 구할 수 있는지, 어떤 자격을 갖춘 전문가가 실시한 것인지 등등을 확인해봐야 하는 거죠. 진단 근거와 관련된 아무런 정보를 구할 수 없다면 이런 정보는 아예 처음부터 없는 셈치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은 배경 정보의 유효 시한(?)인데
배경 정보는 가설을 세울 때 사용한 뒤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제 방식을 따르자면
대면 검사를 실시하기 전에 없애는 것이죠. 검사 결과를 해석할 때까지 배경 정보를 남겨두면 검사 결과가 제대로 해석되지 않거나 자료가 불충분한 경우 배경 정보를 동원해 그 간극을 메우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야말로 소설 쓰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배경 정보는 사실 굉장히 불완전한 정보입니다. 심리적 고통이 큰 경우 수검자의 주관적 보고는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보호자가 수검자에 대해 잘 아는 signicificant others가 아닌 경우 불완전하거나 편향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정보는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의 오랜 과거 자료로 정확성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배경 정보는 심리검사 의뢰를 받고 chart 확인 후, 혹은 심리검사를 위한 면접 후 가설을 설정할 때 사용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정확한 case formulation을 위해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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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 행동 관찰(behavioral observation) 영역은 다른 영역에 비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심리평가보고서 작성법에 근거하여 외양(appearance), 검사 태도, 평가자와 상호 작용 패턴, 반응 양상 등을 routine하게 쓰는 경우가 많죠.
물론 그렇게 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작성법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행동 관찰 영역도 피검자의 문제 영역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원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행동 관찰 영역을 기술할 때에도 의뢰 사유와 연결해서 써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울한 기분이 계속 지속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며, 매사에 무기력하고 모든 것이 귀찮아서 끼니도 자주 거르는 문제로 도움을 청했고 우울증을 변별 진단하기 위해 심리평가가 의뢰된 피검자가 있다고 해 보죠.
변별 진단이 의뢰 사유 중 하나일테니 우울증인지 아닌지를 심리평가를 통해 가려내야 할 겁니다.
그럴 때 행동 관찰 영역에는 이 피검자의 모습이나 검사 중 보이는 행동, 평가자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우울증 환자의 그것인지 관찰해서 기록하는 겁니다. 반응 속도가 느린지, 평가자와 눈맞춤이 어려울 정도로 시선을 피하는지, 투사법 검사 중 눈물을 흘린다든지, 그리기 과제에서는 필압이 지나치게 약하다든지 등에 대해서요.
반대로 우울증 변별이 필요한 피검자인데 자주 웃고 반응 속도도 빠르고 자발적인 의사 표현이 많고 해서 전형적인 우울증으로 보기에 어려운 모습을 보이는지를 기술해도 좋습니다.
의뢰 사유와 연결해서 주된 가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는지 아니면 반대로 기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는지에 초점을 잡고 쓰는 것입니다.
이 피검자가 뿔테 안경을 쓰고 왔는지, 휴대폰이 최신 스마트폰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피검자가 검사 중 했던 말 중 조금이라도 특이하게 여겨지는 것을 기준없이 나열하는 것도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불필요한 정보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심리평가를 실시하는 의뢰 사유와 목적이 분명하다면 행동 관찰 영역도 그에 맞춰 연결성있게 기술하는 것이 좀 더 깔끔한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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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진단명을 남발하는 것에 알러지가 있습니다만 심리평가의 주 의뢰 사유가 진단인 경우 의심되는 공존 장애가 많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R/O을 붙여서 되는대로 나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 의뢰 사유가 치료 계획 수립이나 향후 대처 방법의 모색인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주의집중을 잘 못하는 초등학교 1학년 남아가 심리평가 의뢰 되었는데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면서 등교를 거부하고 밤에는 혼자서 안 잘려고 심하게 떼를 쓰는데다 억지로 혼자 재우면 어김없이 야뇨를 하고, 시험 기간이나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는 날이 되면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문제를 보일 때 어떻게 formulation해야 할까요?
정확한 변별 진단만 필요하다면 ADHD, Transient Tic Disorder, Enuresis, Adjustment Disorder, Separation Anxiety Disorder 등등의 가설을 세운 뒤 검사 sign으로 검증하면 될테지만 아동에게서 관찰되는 증상이 다양하고 여러가지 진단이 동시에 의심될 만큼 혼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검사 sign을 정리하면서 진단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각 장애로 단독 진단을 한다면 어떤 것이 피검자의 심리적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는지를 특히 염두에 두고 보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아동의 경우 핵심 문제가 평가 불안의 문제인지, 애착의 문제인지, 파괴적 관심 끌기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주의력 문제인지 말이죠.
핵심적인 문제를 찾아내면 거기부터 시작해서 다른 장애의 중복 진단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예상되는 진단 가설이 많을 때에도 좀 더 손쉽게 피검자의 문제를 formulation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연습이 평소에 잘 되어 있지 않으면 핵심적인 문제를 골라내는 눈이 안 생기기 때문에 전에
'임상심리평가보고서 이렇게 쓰면 안 된다 II'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R/O 진단을 남발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양한 진단이 동시에 의심되는 경우에는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독 진단을 먼저 찾고 그 진단을 통해 피검자의 핵심 문제를 찾는 것을 연습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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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의 최종 결과는 심리평가보고서입니다.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심리평가를 실시한 것이 아닙니다.
어쨌거나 심리평가보고서가 심리평가의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니만큼 심리평가를 실시한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실시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의뢰 사유를 명확히 한 상태에서 심리평가를 실시했어야 합니다. 변별 진단을 위해서인지, 지적 장애 판정을 위한 지능 지수 산출이 필요해서인지, 현재 피검자가 경험하고 있는 우울감이 어느 정도로 심한 것인지 등등.
그런데 그냥 단순히 의뢰 사유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피검자를 괴롭힌(?) 댓가로는 뭔가 부족하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하면서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면 좋습니다.
일명 ABC 모델에 맞춘 심리평가보고서 작성입니다. 인지 행동 치료의 ABC 모형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냥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 뿐입니다.
A -> B -> C
A: Explanation(설명)
B: Description(기술)
C: Prediction(예측)
가장 먼저 설명드릴 부분은 B입니다. 기술(description)하기 위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현재 피검자가 다양한 심리측정영역에서 어떤 상태인지를 기술하는 것이죠. 지능이 얼마이고, 정서 상태는 어떻고, 주의력은 어떻고 등등. 아무리 엉터리 보고서라도 B에 해당하는 기술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근거에 기반해야 합니다. 기술도 제대로 되지 않은 걸 심리평가보고서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A입니다. 설명(Explanation)을 하기 위해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단순히 피검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기술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추론과 가설을 설정하고 심리검사 결과를 통해 검증해서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겁니다. 왜 이 피검자에게 발표 불안이 생겼는지, tic 증상이 왜 더 심해지는지 등에 대한 원인을 알려주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심리평가보고서는 최소한 B(기술)와 A(설명)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C입니다. 예측(Prediction)까지 하는 것이죠. 현재 피검자의 심리 상태 기술과 원인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어떠한 개입을 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예상과 제언 부분까지 포함하는 것이 C에 해당합니다.
A, B, C 모두를 포함할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B, 가능하면 A -> B, 목표는 A -> B -> C를 모두 포함하게끔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토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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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평가보고서는 심리검사 결과를 토대로 검사 시 관찰된 행동 양상과 면담 내용까지 종합해서 작성하게 됩니다. 심리검사 결과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행동 관찰(behavioral observation)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취급되지만 의외로 피검자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ADHD가 의심되는 아동이 왔을 때에는 검사 시 과잉 행동 등 주의력 문제가 의심되는 양상이 나타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고 만성 정신분열병이 의심되는 환자가 왔을 때에는 hygiene care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선생님들이 정작 심리평가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는 아무런 기준 없이 검사 또는 면담에서 눈에 띄었던 특징적인 피검자의 모습만을 나열하는데 그치곤 합니다. 그래서 정리해봤습니다.
심리평가보고서의 behavioral observation 영역을 기술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의뢰 사유와 관련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해야 합니다. 위에서 예로 든 ADHD 의심 아동이라면 꼼지락 거리는 행동이라든가, 충동적인 반응 양상을 확인해서 기술해야지 무슨 안경을 쓰고 있었는지, 얼굴이 하얀 지 등은 별로 중요한 정보가 아닙니다. MDD가 의심되는 환자라면 면담 시 눈물을 흘린다든지, 의욕이 없어 반응 속도가 느리다든지, 얼굴 표정이 어둡다든지, 잠을 잘 수 없어서 눈이 충혈되었다든지 하는 정보가 중요하겠지요.
둘째, 의뢰 사유와 관련있는 내용이 두드러지지 않을 경우에는 다음의 순서로 기술하되 피검자가 검사실에 들어와서 검사와 면담을 마치고 나가는 시간 순서를 따릅니다.
1) 피검자의 외양(appearances)을 기술합니다. 이 때, 피검자의 특징적인 모습만 강조하지 말고 가능한 한 피검자의 문제를 드러내는 측면에 집중합니다.
2) 평가자와 상호 작용(interaction) 양상을 기술합니다. 눈 맞춤을 잘 하는지, 평가자의 검사 지시는 잘 이해하는지, 자발적인 언어 표현은 있는지, 평가자를 향한 positive affect는 드러나는지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3) 피검자의 검사 수행 양상을 기술합니다. 반응 속도가 빠른지, 충동적인 모습은 없는지, 수행 동기는 충분한 지, 그리기 과제 수행 시 필압은 적절한지 등을 기술합니다.
각 영역을 들여쓰기해서 단락을 나누어 기술하면 보기에도 좋고 behavioral observation만 읽어도 피검자의 모습이 대충은 그려지게 됩니다.
제가 제안하는 방법이 정답은 아니지만 심리평가보고서를 쓸 때 behavioral observation 영역에 무엇을 써야 할 지 고민이 되는 선생님들에게 대안 제시는 될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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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을 조금 보태서 우리나라 정신과에서 임상심리학자가 하는 일의 90% 이상은 심리평가를 실시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점차 나아질거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속도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닐 겁니다.
임상 현장에 따라 사회복지전문가나 간호사가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특히 정신과에서 심리평가를 의뢰하는 사람은 거의가 정신과 의사입니다. 치료 권한과 대부분의 책임 소재가 모두 의사에게 있으니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마 현장에서 일하는 임상심리학자라면 적어도 한 두번쯤은 다른 전문가가 쓴, 그야말로 형편없는 심리평가 보고서를 접할텐데, 그럴때면 이런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어떻게 잘리지 않고 계속 일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른 임상심리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심리평가 보고서를 보는 축에 속하는데 의외로 형편없는 보고서가 아주 많습니다. 대체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짐작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엉터리 임상심리학자가 퇴출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심리평가를 의뢰한 정신과 의사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친한 의사 선생님께 심리평가 보고서를 모두 읽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어렵다면 제출한 보고서를 나중에라도 확인해 보시면 제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금방 아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습니다. 사실 그럴 시간도 없고요. 대부분은 심리평가 보고서 중에서 Summary & Recommendation만 읽습니다. 그것도 요약 부분 중에서 지능 지수와 진단에 필요한 특정 결과 부분만 (밑줄치면서) 읽습니다.
제가 작성한 종합심리평가보고서는 A4 기준으로 대개 3장을 넘지 않는 적은 양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6~7장이나 되는 보고서를 읽을리가 만무하지요. 제가 supervision 하면서도 그런 보고서를 보면 한숨부터 나오는걸요.
이건 임상심리학자들의 책임도 있는 것이 개업 의사들(특히 소아정신과)이 요구하는대로 visual에만 신경 쓴 나머지 표만 화려하게 집어넣고 양을 늘리는데만 급급했기 때문에 아무도 읽고 싶어하지 않는 보고서가 된 것이죠. 의사들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사정이 이러니 의사가 원하는 진단에 맞는 용어만 몇 개 넣어서 써 주면 별다른 문제 없이 일 할 수 있는 것이죠. 실력이 없어도 들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심리평가를 실시하기 전에 의뢰자에게 의뢰 사유를 꼼꼼히 물어보고 뭘 알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반영해서 보고서를 쓸테니 요약 및 제언만 읽지 말고 전체 보고서를 다 읽어달라고 합니다.
보고서 전체를 꼼꼼히 읽으면 어느 정도는 엉터리 formulation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일부 문구는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어도 실력이 없으면 보고서의 전체 내용을 논리적 빈틈 없이 formulation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뢰자가 심리평가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실력없는 엉터리 임상심리학자들이 하루빨리 퇴출되어 심리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더 이상 침해하지 않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의뢰 사유를 꼼꼼히 확인하고 그 의뢰 사유를 보고서에 반영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보고서를 전부 읽어달라고 요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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